기사 (8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㊳ / 황금기 감독열전(2) 라이프&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㊳ / 황금기 감독열전(2) [‘서사’(敍事)의 장인 구로사와 아키라]“하필 구로사와가...”.이 말은 1950년 일본에서 흑백으로 제작된 범죄 미스테리 영화 ‘라쇼몽’(羅生門, Rashomon, 1950)이 195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의 유명한 탄식이다. 당시 이 영화의 감독인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는 미조구치 겐지나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나루세 미키오(なるせみきお)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심지어 제작자가 “이건 영화가 아니다”고 일갈하며 시사회장을 떠난 일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㉞/ 전후 황금기12(다이에이) 라이프&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㉞/ 전후 황금기12(다이에이) 초대사장 기쿠치 간(菊池寬)의 다이에이<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일본 영화 역사상 최고의 해라고 불리는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전국적으로 7,500여 개의 영화관이 있었고 관객수만 해도 11억 2,700만 명에 달했다. 연간 제작 편수는 평균 500-~600편에 이르렀으며 당시(1958년) 상영된 전체 영화 중 일본 영화가 75퍼센트를 차지하는 등 자국 영화에 대한 관객의 호응은 실로 대단했다. 이중 6대 메이저 회사 중에 다이에이(大映)는 초대 사장인 기쿠치 간(菊池寬)의 분위기가 전후에도 느껴지는 영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㉙/ 전후 황금기7 컬쳐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㉙/ 전후 황금기7 삿뽀로맥주와 태양족전후 황금기를 빛낸 스타들을 소개하겠다. 뮤즈들의 얘기가 아니라 남자배우들이다. 황금기의 여자배우들이 점차 전형적인 일본 여성상을 탈피하는 방향으로 갔다면, 남자배우들의 경우는 ‘지다이게키(時代劇)’의 최대 수혜자들 혹은 전후 일본 남성상에 부합하거나 정반대의 인물들이 두각을 드러냈다.일본인들은 이따금 여성들에게 남자배우들에 대한 인기투표 같은 것을 빈번하게 하는데 심지어 ‘악한 역할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도 범주에 넣을 정도로 ‘마초’스타일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어차피 사무라이 영화들을 볼 때 ‘악역’ 캐릭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㉘/ 전후 황금기6 라이프&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㉘/ 전후 황금기6 1950년 이후 영화 제작 편수 급격한 증가이 시기 일본영화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절정기를 이루게 된 배경을 짚어 보도록 하겠다. 메이저 영화사들이 체제를 정비하고 독립영화사들 역시 밑그림을 그리게 된 그 시기 아직 TV는경쟁력이 없었다. 전후 일본인들에게 영화보다 더 좋은 오락거리는 없었고 극장은 전쟁의 폐허와 패배감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위로의 장소가 된다.그 결과로 1946년 불과 69편에 불과했던 제작 편수가 1950년에는 무려 215편으로, 1953년에는 302편으로 증가하였다. 1960년에는 무려 555편의 영화가 제작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㉗/ 전후 황금기5 라이프&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㉗/ 전후 황금기5 전후황금기를 논할 때 감독들이나 제작사 못지 않게 주목할 것이 이 시기를 빛낸 배우들이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출품하는 작품들마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세계의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영화들을 보면 작품성과 감독의 연출력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 이렇게 삼박자가 맞아야 하는 경우를 본다.요사이 한국영화가 침체되는 주요 원인 역시 ‘배우 돌려막기’라는 견해가 많은데 현장 영화인들의 의견으로는 ‘흥행 되는 배우’를 캐스팅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백화점 쇼윈도에 전시된 옷을 자기가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㉕/ 전후 황금기3 라이프&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㉕/ 전후 황금기3 일본 영화와 한국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을 들자면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는 일본영화는 ‘과거와 전통’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리메이크는 물론이거니와 과거의 암울한 시대를 극복한 스토리들을 자주 소재로 삼는다.예를 들어 ‘올웨이즈-3번가의 석양’(Always 三丁目の夕日: Always-Sunset On Third Street, 2005), ‘플라워즈’(フラワーズ, Flowers, 2010, 기무라 타쿠야의 드라마 ‘남극대륙’(南極大陸, 2011) 같은 전후 극복기 혹은 메이지 유신 시기 등의 영화나 드라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⑮/ 군국주의 시대 라이프&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⑮/ 군국주의 시대 재팬올에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을 연재 중인 이훈구 시나리오 작가의 거주지는 미국입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활동 중이었던 작가는 최근 미국(LA)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훈구 작가는 “미국에서도 연재는 계속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군국주의 시대’ 이야기는 그가 미국에서 보내온 첫 글입니다. <편집자주>일본이 1931년 중국 동북부를 침략(만주사변)하면서 1932년 만주국이 세워지고 1937년부터 중국과 전면전에 들어가게 된다.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경계에서 일본의 지식인들은 협소해져 간다.영화인들에게는 더욱 그 입지가 칸 그랑프리 일본 여배우와 한국의 봉준호 글로벌 칸 그랑프리 일본 여배우와 한국의 봉준호 1954년 칸 그랑프리 ‘지옥문’의 여배우 사망#. 2주 전인 5월 12일, 일본에서 한 원로 여배우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쿄 마치코(京マチ子), 95세였다. 그녀는 1954년 5월, 프랑스에서 열린 제 7회 칸국제영화제의 ‘히로인’이었다. 당시 58세의 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貞之助) 감독이 ‘지옥문’(地獄門)이라는 작품으로 그랑프리(지금의 황금종려상)를 거머쥐었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던 이가 바로 쿄 마치코다.1950년대 초, 일본영화는 국제적인 영화제에서 성과를 올리던 시기였다.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을 연재합니다 라이프&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을 연재합니다 1989년, 세계 영화업계에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일본 기업 소니가 ‘미국 영화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콜롬비아 영화사를 인수해 버린거다.메이지 유신 이전, 쇄국(鎖國)적이던 일본의 문을 강제로 연 ‘미국 흑선(黑船) 사건’과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일본 기업이 호황기 경제력을 포문 삼아, 미국 영화 산업의 거점을 함락시켜 버린 셈이다.소니의 콜롬비아 인수 2년 전인 1987년, 한국에도 충격에 가까운 일이 벌어졌다.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영화제에서 배우 강수연(임권택 감독 작품 ‘씨받이’)이 여우주연상을 거머 처음처음1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