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 경제학(56) / 고지라와 아이돌 무비
일본영화 경제학(56) / 고지라와 아이돌 무비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2.07.30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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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야마구치 모모에

<미국 LA=이훈구 작가 (재팬올 미국대표)> 도호(東宝)는 1970년대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필자의 의문이었다. 왜냐고? 도호는 폭력적인 영화나 정치적 메시지가 강한 영화 그리고 로망 포르노 장르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가족영화’를 표방한 영화사이면서 애니메이션(아니메)과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같은 거장의 작품들을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이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서 착한 영화들과 ‘고지라’(GODZILLA, ゴジラ), ‘도라에몽’(ドラえもん), ‘짱구는 못말려’(クレヨンしんちゃん), ‘요괴워치’(妖怪ウォッチ)와 ‘신카이 마코토’(新海誠)의 감각적 작품들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1970년대 도호는 그 기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이미 미국에 직배극장을 3곳이나(L.A, 샌프랜시스코, 뉴욕) 운영하고 있었고 파라마운드(PARAMOUNT)사의 영화에 대한 일본 내 독점권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ATG(ART THEATER GUILD)를 통해 독립영화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1970년대를 넘어갔다.

원조 고지라 '슈트 배우' 나카지마 하루오

▲고지라, 도호를 먹여 살리다!
1970년대 도호를 이야기 할 때 ‘고지라’를 빼놓을 수 없다. ‘고지라’는 1970년대 도호의 대표적인 ‘캐시 카우’(Cash Cow)였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역사적 관점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역대 고지라 시리즈 중 가장 흥행 성적이 나빴던 ‘고지라 대 메가로’(ゴジラ対メガゴ, 1973), ‘메카 고지라의 역습’(メカゴジラの逆襲, 1975)등도 있었지만 ‘고지라 대 헤도라’(ジラ対ヘドラロ, 1971)같은 역작이 탄생하기도 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97만명’이라는 역대 최하위 성적표를 받아야 했던 ‘메카 고지라의 역습’의 경우에도 ‘쇼와(昭和)시리즈의 마지막’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 된다. 당시 도호는 인기 특수촬영 시리즈의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한 최종작 제작에 나서게 되는데 과거 전성기 시절의 노장 스텝들이 다시 모여 제작한 마지막 작품이 바로 이 ‘메카 고지라의 역습’이기 때문이다. 

'고지라 대 메가로'(1973)와 '고지라 대 헤도라'(1971)

따라서 종전의 황당하고 유치한 개그 씬이 배제되고 진지한 스토리를 지향했다. 물론 관객들이 어색해 했고 쇼와 시리즈의 졸작(拙作)중 졸작인 ‘고지라 대 메가로’보다 더 관객이 들지 않아 ‘고지라 시리즈’ 중 가장 흥행 성적이 가장 좋지 않은 작품으로 공식 기록되어 있기는 하다. 사실 이때 만들어진 시리즈들은 대부분 ‘환경오염’을 먹고 자란 괴물과 고지라의 대결이 주로 등장하는데 이 모티브는 훗날 한국영화계에서 자주 써 먹는 단골소재이기도 하다. 

또한 ‘고지라와 헤도라’의 경우 현재까지도 ‘컬트적 인기’를 구가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특수촬영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1969년 구조조정의 여파로 도호의 ‘특수기술과’가 해체 되었으며 ‘울트라맨’(ウルトラマン)의 아버지이자 ‘특수촬영의 신’이라는 ‘츠부라야 에이지’(円谷英二)가 1970년 1월에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탓도 있었다. 

이 때문에 1971년에는 원조 고지라 슈트 배우였던 ‘나카지마 하루오’(中島春雄)가 계약이 해지 되어 도호 스튜디오 위치에 개장한 볼링장에 재배치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슈트 배우’란 사람이 ‘고지라’의 슈트를 입고 역을 대신 하는 것으로 도호가 제작부를 자회사로 독립시킨 여파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반노 요시미츠 감독

▲반노 요시미츠(坂野義光)
‘고지라’를 말할 때 두 사람이 반드시 언급이 되는데 한 사람은 ‘혼다 이시로’(本多猪四郎)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반노 요시미츠’다. 혼다 이시로는 고지라 시리즈의 서막을 연 감독으로 회사가 요구하는 기획과 예산, 시간을 고려해 그에 맞춰 연출하는 직공 (職工)과도 같은 타입으로 평가 받았다. 

혼다 이시로 감독

반면 반노 요시미츠는 단 한 작품 만에 더 이상 ‘고지라’를 연출하지 못했지만 파격적이고 컬트적 발상이 지금까지도 화자 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감독이다. 제작자 ‘다나카 도모유키’(田中友幸)가 갑작스런 입원을 하게 된 틈을 타 컬트적 장면들을 대거 삽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뒤늦게 도호 측에서 기겁을 하고 더 이상 연출을 맡기지 않겠다는 선언을 할 만큼 영화는 ‘아동용’이라고 보기에는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핵에 대한 공포가 ‘고지라’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면, 헤도라는 1970년대 공업화로 인한 환경오염을 표현했다. ‘고지라 시리즈’를 통틀어 고지라가 방사열선을 뿜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장면이 바로 반노 요시미츠의 아이디어다. 그는 특히 조감독 시절부터 ‘수중특수촬영’에 일가견이 있었고 SF 특수촬영에도 뛰어난 노하우가 있었다. 

혼다 이시로감독과 '특수촬영의 신'이라는 츠부야 에이지

무엇보다도 ‘도호 괴수영화’의 열렬한 지지자이면서 팬이기도 했다. 특히 1970년에 열렸던 ‘오사카 엑스포’의 미쓰비시 미래관의 홍보 동영상으로 명성을 쌓고 있었다. 츠부라야 에이지가 사망하고, 특수촬영 스텝들이 줄줄이 퇴사한 가운데 반노 요시미츠는 그 즈음 이슈였던 공해(公害)를 소재로 한 괴수를 만들어보자고 설득 해서 기획이 시작되었다. 초라한 예산에 촬영 기간도 5주밖에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장편영화 데뷔의 기회였기 때문에 최선을 다 했다. 

그러나 개봉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이 ‘컬트 매니아’들의 전설로 남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잔혹한 묘사와 환각장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주제가로 인해 ‘아동용’영화임에도 텔레비전 상영이 금지 되었다. 참고로 주제가에 대해 언급하자면 ‘헤도라’가 수은과 카드뮴에 중독된 해양 괴수였던 만큼 가사 전체가 온갖 중금속 물질의 원소기호로 채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년에 레전더리(legendary) ‘고지라’(Godzilla, 2014)가 워너 브라더스에서 만들어졌는가 하면 ‘신세기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에서 오마쥬(hommage) 되기도 한 걸작 중 걸작이다. 

▲고지라 시리즈의 의미
‘고지라’라는 이름은 일본 단어의 ‘고릴라’(ゴリラ, gorilla)와 고래를 의미하는 ‘쿠지라’(クジラ, whale)의 합성어다. 인간의 원폭실험에 의해 탄생된 괴수(고대 공룡)로 방사능을 흡수하면서 방사능 덩어리인 고지라는 무서운 파괴자이면서 외세의 침입에 있어서 자신들을 수호해 주는 수호자 헤도라 같은 변종 괴수들과 싸우는 파이터로 묘사되고 있다. 

이 시리즈는 쇼와(昭和) 시리즈, 헤이세이(平成) 시리즈, 밀레니엄(ミレニアム)시리즈로 구분된다. 사실 마지막 고지라 몇 편은 내용면에서나 기술면에서 상당히 퇴보했다고도 볼 수 있다. 1954년 처음 제작했던 고지라는 제 29편을 시리즈 마지막으로 종결되었다. 50년 넘게 도호에서 가장 장수한 시리즈중 하나이면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괴수 캐릭터로 자리매김했고 할리우드 판까지 제작되었으며 심지어 전 세계 괴수영화의 원조인 ‘킹콩’과 대결(관객 1255만명)까지 벌인 고지라. 어찌 보면 1970년대 고지라 시리즈는 현실적으로 아이디어 및 재정이 고갈된 ‘스튜디오 미학의 마지막 표현 형태의 집약체’(막스 테시에)였을지 모른다. 

‘로단’(1956)과 ‘모스라'(1961)

혼다 이시로는 처음 ‘전쟁과 핵무기의 공포와 우매함을 지적 한다’는 생각으로 제작에 임했다고 한다. 사실 특수촬영이었지만 좀 허술해 보일수도 있었는데 흑백영화로 제작되어 단점이 보완된 행운도 뒤따랐다. 1975년과 1995년, 2004년 세 번이나 시리즈가 종결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2014년 할리우드판 고지라(Godzilla)와 2016년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감독의 ‘신 고지라’(シン・ゴジラ)가 대히트를 치면서 다시 화려하게 부활한 상태다. 

또한 고지라는 또 다른 괴수 영화인 ‘로단’(空の大怪獣 ラドン, 1956), ‘모스라’(モスラ, 1961)같은 흥행작들을 양산해 내기도 했다. 고지라에 대한 일본인들의 생각은 애정과 애증의 교차인 것 같다. 이를 반영한 것이 고지라 2000 밀레니엄 (ゴジラ 2000: Millennium, 1999)이다. 고지라가 지구를 위협하는 괴수를 물리친 후 다시 독무대가 된 도시를 파괴하기 시작하자, “역시 고지라는 우리가 물리쳐야 할 괴물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를 왜 구해주죠?”, “그는 우리의 한 일부분이니까”라는 대사를 일갈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안노 히데아키 감독

▲니시카와 가쓰미(西河克己)
그러나 도호가 ‘고지라’ 하나로 버틴 것은 절대 아니었다. 주로 순애보(純愛譜)영화를 만들던 니시카와 가쓰미를 초빙(招聘) 해 온 것이다. 그는 닛카쓰(日活)시절 ‘요시나가 사유리’(吉永小百合)를 대스타로 만든 경력이 있었는데 그가 도호로 건너와 부상시킨 여배우는 ‘야마구치 모모에’(三浦百恵)였다.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근대일본문학의 거성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단편 소설인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를 1963년(닛카쓰)과 1974년(도호)에 각각 만드는데 이때 주연이 바로 요시나가 사유리와 야마구치 모모에였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소녀스타들이 나오는 영화를 ‘아이돌’(idon) 영화라고 부르는데 그는 여성을 탁월하게 묘사하는 감독이었다. 

니시카와 가쓰미 감독

그는 닛카쓰가 ‘로망 포르노’(ロマンポルノ )로 방향을 틀자 텔레비전으로 무대를 옮기도 했으며 문예, 액션, 청춘 드라마, 가요 영화, 멜로드라마 등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한 베테랑 감독이었다. 일본 역사상 무려 4번 영화화가 된 문예 영화 ‘청년’(若い人)에서 요시나가 사유리와 이시하라 유지로(石原裕次郎), 아사오카 루리코(浅丘ルリ子)등 당대 최고의 스타캐스팅으로 센세이셔널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주제는 항상 ‘여성’이었다. 따라서 닛카쓰 시절 일본 최고의 국민 여배우였던 ‘요시나가 사유리’의 거의 모든 주연영화의 감독이었던 그가 도호로 옮긴 후 ‘페르소나’는 영화계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야마구치 모모에였던 것이다. 

야마구치 모모에 주연의 '이즈의 무희'(1974)

▲야마구치 모모에
야마구치 모모에는 가수 겸 배우지만 1970년대를 상징하는 ‘디바’(Diva)였다. 총 2,741일을 활동했지만 지금으로 말하면 하나의 ‘사회현상’까지 몰고 온 국민가수였다. 일본 최고의 MC인 ‘하기모토 킨이치’(萩本欽一)가 사회를 맡은 ‘스타탄생!’(スター誕生!)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하면서 데뷔했다. 

배우 나카모리 아키나(왼쪽)와 마츠다 세이코

‘나카모리 아키나’(中森明菜), ‘마츠다 세이코’(蒲池 法子)와 함께 ‘전설의 일본 3대 아이돌 스타’였던 그녀는 혜성처럼 나타나 니시카와 가쓰미의 영화에 잇달아 주연으로 발탁되어 1970년대 도호를 빛냈다. 순진한 얼굴, 달콤한 미소, 수정처럼 맑은 눈, 장난기 가득한 덧니, 조금은 슬퍼 보이면서도 세련되고 상냥한 마스크. 그녀에 대한 수식어는 끝이 없었다. 

영화 '에덴의 바다'(1976)

특히 중저음이면서 매혹적인 목소리는 최고의 강점이었다. 그녀는 니시카와 가쓰미가 연출한 ‘절창’(絶唱, 1975), ‘에덴의 바다’(エデンの海, 1976)등 주로 ‘니시카와의 리메이크 영화’들에서 주연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절창’의 경우 1958년 영화의 리메이크로 ‘이즈미 마사코’(和泉雅子)와 비교가 되기도 했다. ‘에덴의 바다’의 경우 1950년작에서 니시카와 가쓰미가 조감독을 맡았던 작품으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성’(性)묘사의 영화였기 때문에 1976년판 작품에 대한 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즈미 마사키 주연의 영화 '절창'(1958)

또한 야마구치 모모에 자신은 점점 실험적인 음악을 시도하면서 국민가수로 자리매김 하는 것과 상관없이 1977년 니시카와 가쓰미는 ‘야마다 요지’(山田洋次)감독의 영화를 리메이크 한 ‘안개의 깃발’(霧の旗)에 캐스팅한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남자를 사로잡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위험천만의 미녀, ‘팜므파탈’(famme fatale)로 변신했다. 

‘안개의 깃발’은 매우 파격적 소제였다. ‘마츠모토 기요하리’(松本清張)의 동명소설을 영화화 한 것으로 가난함 때문에 억울하게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어 사형 당한 형의 변호를 거절한 동향 출신 유명 변호사에 대한 한 여성의 불합리한 복수를 그리는 리갈 서스펜스(legal suspense)드라마다. 1965작의 ‘바이쇼 치에코’(倍賞千恵子)의 시종일관 냉정하면서도 무표정한 명품연기를 넘어서야 했는데 그녀 특유의 매력으로 성공을 거뒀다. 

영화 '안개의 깃발'(1977)

특별히 니키사와 가쓰미 감독의 역작 ‘슌 킨쇼’(春琴抄)로 흥행 수입 8억 8,400만엔에 흥행 8위를 기록하면서 칸 영화제에 출품되어 초청 받아 ‘월드스타’로 우뚝 선다. 특히 이 영화는 여성심리를 디테일하게 묘사한 영화로 찬사를 받았다.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 중 한 명이었던 야마구치 모모에는 영화면 영화, 드라마면 드라마 모두 히트시켰기 때문에 도호를 빛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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