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모리 가즈오 별세②/ JAL 되살린 ‘경영의 신’
이나모리 가즈오 별세②/ JAL 되살린 ‘경영의 신’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22.09.13 2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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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은 2005년 교세라의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은퇴했다. 이나모리가 2세 세습을 하지 않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나모리 회장은 2013년 10월 18일, 주간아사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첫 번째 이유는 자녀를 딸만 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교세라는 전 종업원의 행복을 추구하는 회사이지, 이나모리가(家)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는 세습을 하더라도 잘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문: 一つ目の理由は、子どもが娘だけだったからです。二つ目の理由は、京セラは全従業員の幸福を追求するための会社で、稲盛家のものではないからです。三つ目の理由は、世襲してもうまくいくわけがないと思ったからです。)

이나모리 회장은 딸만 셋 뒀다. 물론 딸과 사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종업원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그의 말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는 교세라의 사시와 ‘교세라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이나모리 회장은 자신의 책(‘회사는 어떻게 강해지는가’)에서도 세습에 대해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다음과 같다.

<내 경우에는 애초에 대물림 경영을 생각한 적도 없었고, 지금은 회사 자체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경영 세습을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중소기업이라면, 가업으로서 세습이 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회사는 어떻게 강해지는가’ 165쪽 인용, 김정환 옮김, 서돌출판사 2012)

경영 세습을 하지 않은 이유로 사회적 책임을 꼽은 것이다. 이나모리 회장은 평소에도 그런 책임을 외면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JAL(일본항공) 회생 건이다.

2010년 JAL은 2조 3000억 엔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회생은 불가능해 보였고, 회생을 믿는 이들도 많지 않았다. 당시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와 마에하라 세이지 국토교통상 등이 삼고초려를 한 끝에 은퇴한 그를 모셔왔다. 이나모리 회장은 제안을 수락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항공이 그대로 도산한다면 일본 경제도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일본 산업의 상징이기도 하고, 직원 수 만 명의 일자리와 관련된 일이기도 하다. 나는 늙어서 일주일에 3일만 시간을 낼 수 있으니 월급은 받지 않겠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사회적 책임을 ‘나 몰라라’ 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그는 한 푼의 월급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나모리 회장은 경영을 맡은지 3년 만에 JAL의 V자 회복을 이루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의 또다른 열정은   KDDI 설립이다. 그는 1984년 DDI(다이니 덴덴: 현재의  KDDI)이라는 통신회사를 만들어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NTT(일본전신전화)에 도전했다.  당시 교세라를 비롯 미츠비시 상사, 소니 등 25개사가 출자했다.

설립 당시 이름은 ‘다이니 덴덴 플래닝 컴퍼니’(Dai-ni Denden Planning Company). 이듬해인 1985년 DDI(Daini Denden Inc.)로 이름을 바꿨다. 다이니 덴덴은 NTT에 이은 제2 이동통신사를 의미하는 (주)제이전전(第二電電)의 일본어 발음이다.

DDI는 2000년 10월, KDD(국제통신주식회사+일본고속통신주식회사의 합병 조직)와 IDO(일본이동통신)와 합병해 지금의 거대기업 KDDI가 되었다.

이나모리는 65세가 되던 해엔 교토에 있는 사찰 엔후쿠지(円福寺)로 출가하는 기행의 길을 걷기도 했다.  <3편에 계속(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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