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여인, 이중섭의 일본인 아내 떠나다
그리운 여인, 이중섭의 일본인 아내 떠나다
  • 노운 작가
  • 승인 2022.08.31 13: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 서귀포의 이중섭 거주지. 맨 오른쪽 쪽문 안방에 이중섭 가족이 살았다.

<작가 노운> 화가 이중섭(1916~1956)의 일본인 아내 이남덕(일본명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가 지난 13일 일본 현지에서 별세한 것으로 전해졌다. 향년 101세. 전언에 따르면 도쿄 세타가야 기독교교회 예배당에서 장례식이 진행됐다고 한다.

1938년 일본 문화학원 미술부에서 만난 이중섭과 이남덕 여사는 1945년 원산에서 전통혼례를 올렸다. 앞서 이중섭은 1944년 12월 일본에 있는 이남덕에게 전보를 보냈다. 전쟁 상황이 급박하자 "결혼이 급하다"는 내용의 전보였다.

이중섭은 한국에 건너 온 아내에게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사람'이란 뜻의 이름(남덕)을 지어주었다. 둘은 슬하에 태현, 태성 두 아들을 뒀다. 

제주 서귀포의 이중섭 거리.

한국에서 이중섭 가족의 체취는 제주 서귀포에 진하게 묻어 있다. 이중섭은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가족들을 데리고 서귀포로 피난 와서 1951년 1월~12월까지 살았다. 아내와 두 아들이 일본으로 돌아가고 나서 혼자가 된 그의 삶은 불운했다. 하지만 아내에 대한 애정 표현만큼은 각별했다.

서귀포의 이중섭 미술관

2년 전, 서귀포시에 있는 이중섭미술관을 찾은 적이 있다. 이중섭이 일본으로 떠난 아내 이남덕에게 보낸 ‘일본어 편지’의 한 문장에 시선이 꽂혔다. 여기에 ‘최애’라는 단어가 등장해서다. 이중섭은 아내를 향해 ‘한없이 상냥한 최애의 사람, 나만의 유일한 현처 남덕’(限り無く優しい最愛の人, 我だけの唯一の賢妻南德)이라고 썼다.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 "한없이 상냥한 최애의 사람"이라고 했다. 
1944년 12월 이중섭이 일본에 있는 이남덕에게 보낸 전보.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한글 메모

요즘 말로 치면 이중섭은 ‘사랑꾼’이라 할 만하다. 이중섭의 제주 체류 기간이 짧아 문화유산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의 흔적은 깊게 배어 있다. 서귀포시 서귀동엔 ‘이중섭 거리’가 있다. 1996년에 지정됐다고 한다.

이중섭이 살았던 집으로 가는 골목.
한적한 골목엔 이중섭의 체취가 묻어났다. 

이중섭 거리를 걷다기 이중섭미술관과 마주했다. 둘러보곤 이중섭이 살았던 집으로 향했다. 초가 형태로 보존된 이중섭 거주지다. 주인집 맨 끝방 1.4평 공간. 여기서 어린 두 아들, 아내와 넷이 살았단다. 실제로 들어가 방을 훑어봤다. 혼자 눕기도 부족한 ‘메뚜기 이마빡’만한 공간.

이중섭이 거주했던 공간. 맨 오른쪽 쪽방이다. 

“어찌 여기서 네 명이 살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이중섭은 이곳에서의 생활이 행복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그런 행복은 서귀포를 배경으로 그린 ‘게와 가족’이라는 그림에 잘 묻어난다. 아들 태성과 태현이 게와 장난을 치고 있고, 아버지와 엄마는 그런 아이들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이중섭 가족이 머문 1.4평 공간.

그런 이중섭은 1956년 9월 6일,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았다. 무연고 사망자로 3일간 방치돼 있던 것을 지인들이 수습했다고 한다. 화장한 유골 일부는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중섭 사망 후 이남덕 여사는 70년 가까이 도쿄에서 독신으로 지냈다. 

이중섭의 지인 김광균 시인이 일본에 보낸 '이중섭 부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