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 경제학(57)/ 새롭게 태어난 닛카쓰
일본영화 경제학(57)/ 새롭게 태어난 닛카쓰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2.09.13 2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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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무라 쇼고로 감독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사실 일본영화 역사를 이야기할 때 ‘1970년대’는 ‘닛카쓰’(日活)의 독무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970년대 초기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저예산 고효율’을 목표로 제작된 이 프로젝트는 경영난을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돌파구 역할을 했지만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자면 대형 스튜디오가 장르 영화(로망 포르노)의 틀 안에서 감독들이 고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당시 중소형 영화사들이 2-3일 만에 만들던 그런 에로영화가 아닌,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비록 로망포르노(ロマンポルノ, 로맨틱 포르노)가 핑크필름(ピンク映画)을 참고로 하였다고는 하나 독립 영화 제작 시스템에 속한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몇 배의 예산이 투입되어 제작되었다. 침실 장면을 몇 장면씩 삽입해 넣기만 하면 그 다음은 각자의 창의력을 발휘할 영역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신인 감독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프로젝트였다. 

▲닛카쓰의 리셋 프로젝트
사실 ‘로망포르노’가 탄생한 배경 뒤에는 닛카쓰의 ‘리셋’(reset)과도 연관이 깊다. 닛카쓰는 1969년에 촬영소를 매각하고, 1971년에는 제작 중지 상황에 이른다. 이에 도산 위기에 처한 닛카쓰는 노동조합이 경영권을 인수하게 된다. 그 와중에 눈을 돌린 것은 ‘고정 관객’의 확보였다. 

이때 주목한 것이 ‘핑크필름’이었다. 닛카쓰의 스탭과 촬영기재, 세트를 이용하여 ‘고품격’ 에로영화를 만들어 승부를 본 셈이다. ‘로망 포르노’라는 브랜드가 생겨나고 제작에 들어가자 많은 배우들과 감독들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이 영화사를 떠났다. 

가장 먼저 간판 스타였던 고바야시 아키라(小林旭)와 와타리 데쓰야(渡哲也)가 도에이(東映)로 이적하여 의협영화들에 잇따라 출연하였다. 시시도 조(宍戸錠) 역시 도에이 의협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TV의 개그 프로그램에서 더 유명해졌다. 이들은 총 5부작으로 제작된 ‘진기(仁義 : 도박꾼이나 깡패 집단에서 상하간의 도덕, 혹은 서로 의리를 표현하기 위해 나누는 인사)없는 전쟁’(한국에서는 ‘의리 없는 전쟁’으로 번역함)에 모두 출연하여 존재감을 과시했다. 

덕분에 닛카쓰에서 지금까지 빛을 못 보던 감독이나 배우들이 점차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덕분에 로망 포르노는 감독들은 물론 조감독이나 시나리오작가 등 젊은 인재의 등용문이 되었으며 당대 일본영화계에서 ‘비교적 사치스럽게 만든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로 인해 대성공을 거둔 닛카쓰는 메이저 중에서 유일하게 저예산이지만 한주에 한편 꼴의 대량생산체제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 장르는 관음증이나 젊은이들의 반항, 정치 및 사회 시스템의 부패와 같은 주제까지 확장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권력관계(power relations)까지 다루었다. 한마디로 ‘섹스영화’가 가진 표현의 한계점을 완벽하게 알고 서구인들의 ‘아시아적 에로티시즘’을 만족시켰다.

하세베 야스하루 감독

▲닛카쓰의 대표 브랜드
1971년 11월 20일. 닛카쓰의 그 유명한 ‘로망 포르노’는 정식으로 런칭 된다. 닛카쓰가 만든 첫 번째 동시상영 작품은 하야시 이사오(林功)감독의 ‘색력 오오쿠 비화’(色暦大奥秘話)와 니시무라 쇼고로(西村昭五郎)감독의 ‘단지부인 : 오후의 정사’(団地妻 : 昼下りの情事)였다. 

이중 가장 주목할 것은 ‘단지부인 : 오후의 정사’일 것이다. 2010년도에 ‘나카하라 슌’(中原俊)감독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단지 부인’(団地妻) 시리즈를 만들어 일본과 한국에 ‘00부인’시리즈를 양산하게 한 원조이기 때문이다. ‘정사’(情事) 시리즈의 원조이기도 하다. 사전적으로는 ‘남녀 사이의 사랑에 관한 일’ 혹은 ‘남녀 사이에 벌이는 육체적인 사랑의 행위’라는 뜻이 된다. 

하야시 이사오 감독은 20편의 영화를 연출하였음에도 자료가 많지 않다. ‘로망 포르노’의 첫 작품을 내놓았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나카하라 슌 감독의 경우는 로망 포르노 계열의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연출로 지난 2008년까지 활동했기 때문에 자료가 많은 편이다. 교토대학 문학부 불문과를 졸업한 후 영화계에 입문 하였으며 로망 포르노에 입문한 감독 중 2번째로 ‘베테랑’에 속하는 감독이었다. 

사실 많은 감독들이 이 노선에 반기를 들고 소속사를 옮긴 까닭에 신인감독뿐 아니라 베테랑 감독도 상당히 필요했었는데 ‘하세베 야스하루’(長谷部安春)감독이 17편, 나카하라 슌 감독이 그 다음으로 14편의 연출 경력으로 ‘로망 포르노’라는 브랜드를 알리는데 도움이 되었다. 1988년 이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로망포르노 영화는 850편이 제작되었다. 

이중 710편이 닛카쓰의 자체 제작이었으니 베테랑 감독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닛카쓰가 운영하는 성인극장에서는 ‘3편 동시상영’을 했으니 감독의 역량이나 경력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로망포르노라고 해도 핑크필름 보다 수준 높은 작품이 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장르는 다른 메이저 영화사들을 자극하여 많은 파생 영화들을 탄생시켰다.

섹스 다큐: 모텔의 여왕

▲도에이 포르노와 구분
닛카쓰 포르노는 당대에 ‘도에이 포르노’(東映ポルノ)와도 달랐다. 사실 도에이는 닛카쓰에 비해 먼저 이 장르에 런칭 하였다. 따라서 ‘도에이 포르노’ 영화들은 서구에 컬트팬들이 의외로 많은데 ‘핑키 바이올런스’(Pinky Violence)라고 통칭하는 영화들로 특별히 이 시리즈는 여자만으로 구성된 패거리들, 심지어 수녀들이 등장하는 레퍼토리로 구성되는 소위 ‘물량공세’ 핑크계열 영화로 서구 영화계에서 수많은 패러디 혹은 리메이크물들을 양산해 냈다. 

1970년대 초반 도에이는 ‘섹스 다큐멘트’(セックスドキュメンテーション)라는 이름의 시리즈로 약 1시간 분량 정도 되는 다수의 ‘쇼큐멘터리’(Shockumentary : 충격적 장면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출시한다. ‘노다 유키오’(野田幸男)감독의 ‘섹스 다큐멘트 : 금발의 콜걸’(セックスドキュメント 金髪コールガール, 1973)이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서구여성(금발 백인)콜걸이 엔고(円高)의 땅인 일본에서 남성을 유혹하는 현장을 폭로하는 듯한 ‘페이크 다큐’(fake documentary, 연출된 가짜 다큐멘터리)형식을 취한다. 

내래이션은 자랑스러운 말투로 금발의 백인 콜걸들이 일본의 신 경제 부흥에 매료되어 원정을 와서 매춘을 한다는 식으로 설명을 하면 화면 속 일본인 남성들은 1만엔 짜리 지폐를 내고 그녀들은 매춘 후 값비싼 보석을 사는 식이다. 일본 남성의 자존심을 세워준다는 명목으로 영화 끝 부분에는 사이키델릭한 프리 러브 파티(フリーラブパーティー)까지 등장한다. 다카쿠와신(高桑信) 감독의 ‘섹스 다큐멘트 : 모텔의 여왕’ (セックスドキュメント モーテルの女王, 1973) 역시 다양한 커플(외국인, 레즈비언 커플 등 포함)들이 등장하는 ‘러브호텔’이 주요 무대다. 

영화 '진기없는 전쟁'

▲쇼치쿠의 에로틱 영화에도 영향
전통적으로 건전한 영화를 고집했던 쇼치쿠(松竹)도 이 판에 끼어들게 되는데 1970년대 초반 자회사를 세우고 도에이에서 만든 영화의 스케일과 닛카쓰의 에로틱한 열망을 결합했다는 의미에서 경쟁사들의 한자이름을 결합시킨 ‘도카쓰’(東活)라는 자회사를 만들어 에로틱 영화를 제작하였다. 

대표작품으로는 핑크영화계의 대부였던 ‘고바야시 사토루’(小林悟)감독의 ‘거울속의 야심’(鏡の中の野心, 1972)이다. 고품격 ‘에로틱 영화’를 표방하였다. 러닝 타임은 총 96분으로 일단 캐스팅 자체가 초호화였으며 주연부터가 파격적이었다. 다시 최고의 대중적 뮤지션이었고 수십 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한 ‘아라키 이치로’(荒木一郎)가 맡았는데 로망포르노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것이 인연이 되어 아예 주연배우로 데뷔하게 된다. 

1960년대 울트라맨 시리즈로 큰 인기를 얻었던 히시미 유리코.

여주인공은 ‘히시미 유리코’(ひし美ゆり子)였는데 1960년대 울트라맨(ウルトラマン) 시리즈의 히로인으로 유명했던 터라 파격적 변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라키(아라키 이치로)는 악동 같은 기회주의자로 온천 리조트에서 처음 만난 미용사들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급기야 ‘오드리 헵번’같은 느낌의 여주인공(히시미 유리코)을 만나 형형색색의 꿈 시퀀스를 이어가더니 빠리의 미용학교에서 연수중이라는 금발의 두 미녀가 목욕을 시켜주는 등 시종일관 판타지에 가까운 화면을 만들어 냈다. 

고바야시 사토루는 도카쓰에서 많은 에로틱 영화를 만들었는데 1983년까지 당시 핑크 영화들의 보편적 경향에 맞춰 별난 주제들을 선택하였다. ‘치한의 함정’(痴漢の落し穴, 1976), ‘보여 지기 좋아하는 여고생’(見たがる女高生, 1976), ‘엿보기 폭행’(覗き暴行, 1977), ‘밑에서 보기’(下から見る, 1981) 등의 영화들을 만들어 흥행에도 성공하였다. 

하지만 1983년 ‘강한사례’(強漢御礼)를 끝으로 도카쓰에서 더 이상은 감독을 맡지 않았다. 일본 역사상 최대 450편, ‘핑크필름’의 외길만을 걸었던 그가 1983년 단 한편의 작품만 내 놓았고 도카쓰를 떠난 가장 큰 이유는 ‘거울 속의 야심’ 같은 대규모의 투자가 요구되는 작업을 중단한 것으로 짐작된다. 

닛카쓰의 간판스타이자 '캐시박스'였던 이시하라 유지로. 
영화 '살인의 낙인'

▲닛카쓰의 구조조정 이유
1909년 닛카쓰는 원래 네 개로 분리 되어 있던 각각의 부분을 결합해 새롭게 떠오르던 영화산업을 독점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일본필름기계제조회사’를 세우면서 시작했다. 한때 닛카쓰는 일본영화역사의 거물이 되는 여러 영화인들의 요람이었으며 한때 도쿄에 3개, 교토에 1개의 자체 스튜디오를 소유할 정도였다. 

그러나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면 다이에이(大映)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다이에이는 닛카쓰를 큰형처럼 여기고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다이에이는 태생부터가 닛카쓰의 제작 설비 회사였던 ‘신코 키네마’(新興 キ ネ マ)와 ‘다이토 영화’(大東映畫)를 병합하면서 만들어졌다. 1942년 10대 메이저 영화사들의 거대한 구조조정 시기에 설립되어 전시에도 살아남은 영화사였다. 다이에이는 닛카쓰가 떠나면서 모회사와 완전히 분리되어 순수하게 영화관 운영에만 관여했다. 

1954년까지 영화제작에 손을 대지 않았던 닛카쓰가 전후 주로 할리우드 영화를 배급하며 어마어마한 돈을 모았던 반면 다이에이는 계속 영화를 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체 극장 체인이 없었다. 따라서 두 회사는 뗄려야 뗄 수 없는 회사였던 셈이다. 때문에 1971년 다이에이의 붕괴는 닛카쓰의 경영진에게는 일종의 ‘경고’와도 같았다. 

이 두 회사는 1970년 6월, 짧게나마 ‘다이니치영화배급주식회사’(ダイニチ映配株式会社)를 설립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통 비용을 분담하고자 합병하여 파트너십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 파트너십은 1971년 8월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리스크로 돌아와 닛카쓰를 괴롭혔다. 게다가 내부적으로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었다. 

스즈키 세이준 감독

첫째로는 스즈키 세이준( 鈴木清順)감독의 존재감이다. 그가 1967년 ‘살인의 낙인’(殺しの烙印, 1967)을 만들었을 때 대표였던 ‘호리 큐사쿠’(夢野久作)의 폄하로 불공정하게 해고당한 이후 수많은 감독들이 닛카쓰를 떠났다. 둘째로는 ‘태양족’(太陽族)영화의 원조였고 닛카쓰의 간판스타이자 가장 많은 수익을 안겨주었던 ‘이시하라 유지로’(石原裕次郎)마저 1968년 갑작스럽게 회사를 떠났다. 그것도 혼자서가 아니라 그의 성공작마다 연출자였던 마스다 도시로(舛田利雄)가 함께 떠났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이 사건들은 닛카쓰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시한부인생’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1969년에는 야심작이었던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의 ‘신들의 깊은 욕망’(神々の深き欲望)까지 박스오피스에서 참패를 당하면서 극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처방이 닛카쓰에 요구되었다. 따라서 3편 동시상영이 가능하고 자신들의 전용상영관에서 배급됐기 때문에 수익이 보장된 ‘로망 포르노’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영화 ‘신들의 깊은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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