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반항아, 스승 장 뤽 고다르를 추모하며...
영원한 반항아, 스승 장 뤽 고다르를 추모하며...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2.09.15 16: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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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감독

<미국 LA=이훈구 작가> 필자는 깊은 추모의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나를 시네마 세계로 이끌어 준 영화 스승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가 9월 13일 91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고다르는 '조력자살'을 선택했다. 불치 질환을 앓고 있던 그는 스위스에서 의료진이 제공한 약물을 스스로 투약했다.

언론들은 일제히 프랑스 영화의 ‘새로운 물결’이 멈췄다고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50년대 말 기존 영화 문법에 저항하며 프랑스 영화계에 ‘누벨 바그'(Nouvelle Vague, 새 물결)를 이끌었던 이가 바로 고다르였던 것이다.

그는 타고난 반항아였다. 어떤 이들은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Roland Truffaut)가 그 유명한 영화 ‘400번의 구타’(Les quatre cents coups, 1959)의 연출로 영화계의 대표적 반항아로 이야기 하기도 하지만 고다르는 태생부터가 반항아였다. 부유한 빠리지앙(빠리시민)출신임에도 그는 소르본느 대학교를 중퇴하고는 빠리 영상원 '시네마떼끄 프랑세즈'(La Cinematheque Francaise)에서 영화공부를 시작한 이래 영화에 미친 사람으로 평생을 보냈다.

프랑스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

그는 당대를 이끈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과 감독이자 배우였던 끌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감독이자 소설가였던 에릭 로메르(Jean Marie Maurice Scherer) 같은 이들과 숙명처럼 만나 영화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했다. 당시 이들이 모여 3년 동안 본 영화만 2,000여 편에 이른다고 하며 영화의 장르와 스타일, 형식, 문법을 이해하기 위해 토론을 펼쳤다고 한다. 

고다르는 토론 후 이것을 정리하여 권위 있는 프랑스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에 기고했다. 그의 이 같은 노력은 훗날 영화의 교과서가 되어 기존의 형식과 틀을 깨는 새로운 영화문법과 형식을 후세대 영화인들이 공부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물론 그는 시대를 잘 타고난 영화인이기도 했다. 때마침 거장들과 함께 토론하고 연구할 수 있었고 세계 영화계가 '새로운 물결'을 요구하던 때였으며 무엇보다도 프랑스 정부가 재정지원을 통해 영화를 계속 만들어 나갈 토대를 닦아준 시기였다. 1960년 이후 그가 영화를 10편 넘게 만들었지만 흥행에 성공하거나 돈이 되지는 않았음에도 계속 새로운 영화들을 만들게 된 계기다. 

영화 '네 멋대로 해라'

마침내, 1960년 ‘네 멋대로 해라’(À bout de souffle)를 내놓게 된다. 앞서 언급한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와 함께 누벨바그의 신호탄이 된 영화였다. 프랑수아 트뤼포와 지하철에서 토론하며 구상한 영화이기도 했다. 물론 타고난 반항아 기질에 형식과 문법을 파괴한 새로운 시도의 영화였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그날 그날 쪽대본으로 내놓는 '파격'이었지만 관객들은 열광했다. 그는 비록 할리우드의 B급 영화들을 보며 영감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전혀 새로운 영화를 내놓았던 것이다.

빠리의 거리에서 삼각대 없이 핸드헬드(handheld)로 촬영한 이 작품은 참신한 시도로 가득했다. 현대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점프 컷’(하나의 연속된 샷에서 액션이 시간에 맞춰 앞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임)을 시도했는데 불필요하고 늘어지는 씬을 과감히 ‘가지치기' 하고생략하면서 극을 빠르게 전개하는 기법을 썼던 것이다. 갑자기 스크린에서 배우가 관객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영화 '네 멋대로 해라'(영상 캡처)

물론 이 작품은 장 뽈 벨몽도(Jean-Paul Belmondo), 진 시버그(Jean Seberg) 두 배우의 기가 막힌 앙상블이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했다. 내가 처음 그 영화를 보았을 때 극중 ‘미셸’로 나오는 장 뽈 벨몽도가 경찰들에게 총을 맞고 쓰러지면서도 애인 파트리샤(진 시버그)를 향해 ‘역겹다!’(C'est vraiment dégueulasse)고 욕을 한 뒤 자기 손으로 자기 눈을 감기며 죽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매우 흥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마치 부도덕한 세상을 향해 욕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리라. 게다가 파트리샤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역겹다는 게 무슨 뜻이죠?”라고 묻고는 현장을 떠나 버린다. 그는 이 작품으로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았다. 

영화 '국외자들'

영화 팬들은 “고다르의 스타일이란 스타일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아낌 없는 찬사를 보냈다. 영화를 '예술'로 승화시킨 스타일리스트, 바로 고다르의 늘 새로웠던 영화들은 항상 나를 흥분시켰다. 그는 지난 2018년 영화 '이미지 북'(Le livre d'image)을 만드는 등 쉴 새 없이 세상에 '새로운' 것을 내놓았으며 2020년까지 시나리오 작업을 이어갔다고 한다.

나는 오늘 비로소 그를 천국으로 떠나 보내면서 한 영화를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Bande à part’(국외자들, 1964) 이다. 영어권 제목으로는 ‘Band Of Outsiders’이다. 너무 어렵게 번역한 듯 하다. 나같으면 그냥 영어로 아웃 사이더‘로 했을텐데 국어사랑이 과하여 빚어진 번역의 참사다. 

아주 파격적이면서 후세대 영화에서 오마주 된 영화이다. 자유분방함 그 자체이며 우리에게는 영화 ‘라 붐’(La Boum)에서 소피 마르소(Sophie Marceau) 아버지로 나왔던 클로드 브라쐬르(Claude Brasseur)의 젊은 날을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비브르 사 비'

또한 고다르 영화 중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비브르 사비'(Vivre Savie, My Life To Live, 1997)의 여주공이자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에 빛나며 고다르의 부인인 안나 카리나(Anna Karina)가 등장한다. 그 외에도 프랑스 청춘 영화의 단골인 사미 프레이(Sami Frey), 고다르 영화의 단골 배우인 사디 레보트(Sady Rebbot), 자유분방함의 배우 앙드레 S. 라바르트(Andre S. Labarthe)의 젊은 날을 스크린 속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오딜(안나 카리나)이 영어학원에서 프란츠(사미 프레이)를 알게 되면서 시작된다. 이후 프란츠의 친구 아르튀르(클로드 브라쐬르)와 3자공모를 해서 오딜이 일하는 저택의 금고에서 돈을 훔치려다 실수로 저택의 부인을 죽이게 되면서 계획이 틀어지고 꼬이게 되는 범죄영화이다. 이 영화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을 다수 남겼다. 그 대표적 씬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세 명이 질주하는 장면이다. 

영화 '국외자들'의 루브르 박물관 질주 장면(영상 캡처)

영화 속 내레이터는 감독인 장 뤽 고다르로, “한 미국인이 루브르에서 세운 종전 기록 9분 45초를 깨려고 뛰었는데, 2초 단축한 9분 43초의 기록을 세웠다”고 말한다. ​자끄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가 1800년에 그린 ‘레까미에 부인의 초상’(Le Portrait de madame Récamier) 옆을 그들은 천진난만하게 질주한다. 이 장면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의 2003년작 영화 ‘몽상가들’(The Dreamers)에서 재현되어 고다르의 영화 ‘국외자들’에 나온 기록을 갱신하기 위해 도전하는 장면으로 재현되었다. 또한 극 후반부에 등장하는 ‘발 없는 새’라는 대사는 장국영(張國榮)이 주연하고 왕가위(王家衛)감독이 연출한  ‘아비정전’( Days of Being Wild, 阿飛正傳, 1990)에서 오마주되었다.

영화 '국외자들' 까페 춤추는 장면(영상 캡처)

또한 이 영화의 가장 명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까페에서 오딜, 프란츠, 아르튀르가 춤을 추는 씬으로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에게 영감을 주어 펄프픽션(Pulp Fiction, 1994)에 영향을 끼친 명장면이기도 하다. 까페에서의 1분간의 정적, 세 사람의 춤추는 장면은 도저히 잊혀 지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나는 늘 '춤추는 장면'만 편집하여 보고는 한다. 

내 영원한 스승 장 뤽 고다르. 그의 영화혁명을 ‘꿈과 음악 사이에’에서 방송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5년 전의 일이다. 녹음을 해 놓지 않는 한 방송은 다시 들을 길조차 없는데 영화는 늘 언제나 우리 곁에 남아 벗이 되어주고 있으니 내가 평생 손을 놓지 못하고 영화를 계속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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