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 경제학(58)/ 로망 포르노의 역설
일본영화 경제학(58)/ 로망 포르노의 역설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2.10.11 2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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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 메이코가 주연한 '노라-네코 로코'시리즈 중의 '폭주집단'(1971년)

로망포르노(ロマンポルノ, 로맨틱 포르노)가 닛카쓰(日活)에 끼친 공로 중 최고를 꼽자면 적어도 10년간은 감독과 영화 스텝들 그리고 배우들이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핑크 영화 산업은 일본에서는 상당한 규모로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배우들로서는 부담스러운 세계이기도 했다. 

배우라면 그리고 감독이라면 누구나 ‘주류’를 꿈꿀 것이다. 그러나 핑크 영화 산업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주류에서 비주류로 전락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의 영화사가 발 벗고 나서서 장르화해 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셈이다. 스타가 되기 위해 거쳐 가는 코스 정도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지 메이코의 이적
닛카쓰가 성인영화를 정식으로 런칭하자 계약 하에 일하고 있던 다수의 감독과 남녀배우들은 소속을 옮겼다. 지난 회에 남자 배우들을 주로 언급했으므로 다른 설명이 필요가 없겠지만 간판급 여배우들도 회사를 떠났다. 그중 최고의 스타라면 ‘카지 메이코’(梶芽衣子)일 것이다. 

닛카쓰의 인기 있는 시리즈물이었던 ‘노라-네코로크’(野良猫ロック, Stray cat Rock)시리즈의 상징적 배우이기도 했다. ‘노라-네코로크’하면 일본어의 영어 발음(Nora-neko rokku)그대로 쓴 제목인데 정식 영어제목은 ‘Stary cat Rock’이다. 갱단(暴走集団)인 ‘도둑 고양이’(Stray cat)의 리더가 바로 ‘카지 메이코’였던 것이다. 

이 영화는 ‘하세베 야스하루’(長谷部安春)감독의 연출로 하드보일드 액션에 가까웠는데 여성 갱단이 등장하여 화제를 몰고 왔다. 특히 1970년 작인 ‘섹스 헌터’(野良猫ロック・セックスハンター)나 1971년 작인 ‘폭주집단’(暴走集団)에서의 카리스마는 당대의 그 어떤 여배우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도에이(東映)의 간판급으로 옮겨 ‘여죄수 사소리’ 시리즈(女囚さそりシリーズ.), 수라설희(修羅雪姫) 등에 출연한다. 

간판급 여배우의 이적은 닛카쓰의 수뇌부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1960년대 여자 팬들을 몰고 다녔던 미남 배우들을 통한 ‘스타 시스템’을 그대로 벤치마킹했다. 핑크 영화계 속에 묻힌, 비록 거칠지만 유능한 원석 같은 여배우들을 새롭게 ‘로망 포르노’의 스타로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기존의 여배우들 외에도 모델이나 누드 쇼, 극단 활동, 니카쓰 자체 스튜디오 오디션, 길거리 캐스팅 등 다양한 방식이 동원되었다. 이렇게 발굴된 신인 여배우들의 (섹스 어필한)매력은 야한 잡지에 끼워진 화보나 회사가 매년 발간하는 달력 등의 머천다이즈(merchandise) 상품을 통해 홍보됐다.

미야시타 준코의 기사가 실린 주간지 '주간 마이니치'

▲누드라도 상관없다!
지금까지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했던 감독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누드라도 상관 없다’는 여배우들이 대거 데뷔했다. 시라카와 가즈코(白川和子), 오가와 세츠코(小川節子), 미야시타 준코(宮下順子), 가타기리 유코(片桐夕子), 다니 나오미(谷ナオミ), 이사야마 히로코(伊佐山ひろ子), 가자마 마이코(風間舞子), 하야시 미키(林美樹), 다마 루미(珠瑠美), 마츠이 야스코(松井康子), 니조 아케미(二条朱実)등이다. 

다마 루미

이들에게 있어서 ‘로망 포르노’는 신세계였는데 현대극이냐 시대극이냐에 따라 캐스팅이 갈라졌다. 아무리 로망 포르노라는 장르라 하더라도 현대극과 시대극으로 나뉘어 제작했기 때문에 시라카와 가즈코는 현대극에서, 오가와 세츠코는 시대극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전략은 주효하여 관객들은 금방 ‘팬덤’을 형성하였다. 

가자마 마이코

거의 20여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로망 포르노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비평가를 놀라게 하고 오늘날에도 꾸준한 상영회를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88년, 고다마 타카시(児玉高志) 감독의 ‘댓츠 로망 포르노 – 여신들의 웃음’(ザッツ・ロマンポルノ 女神たちの微笑み)은 기념비적 영화다. 여배우들의 에로티시즘이 폭주하던 닛카쓰 로망포르노 전성시대를 회고하고 과거 작품들의 엄선된 장면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순전히 여배우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마츠이 야스코

마지막에는 주연을 맡은 여배우들의 이름과 사진, 장면들을 나열했다. 사실상 닛카쓰 로망 포르노의 마지막 작품이면서 끝판왕이기도 한데 이 장르의 매니아가 아니라면 좀 지루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덕분에 1997년 6월에 ‘런던현대예술연구소’(London’s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에서 열린 로망포르노 회고전 당시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사실 로망 포르노는 칭송받을 명작들로 변모했다가 쇠락의 길을 걷더니 자연스럽게 사라진 장르다. 

따라서 최근에 다시 제작되고 재평가되는 이유 역시 닛카쓰가 남긴 클래식 에로틱 영화들 때문이다. 외국의 매니아들은 아직도 열광하고 있으며 새롭게 발견하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해외의 배급사들의 노력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파간 필름(Pagan Films), 아츠매직(Artsmagic), 레피드 아이 무비(Rapid Eye Movies), 이미지 엔터테인먼트(Image Entertainment) 등이 그것이다. 

로망 포르노 현대극에서 탑 스타였던 시라카와 가즈코

▲시라카와 가즈코
단연 가장 먼저 인기를 얻은 여배우는 ‘시라카와 가즈코’였다. 니시무라 쇼고로(西村昭五郎)감독의 ‘단지부인 : 오후의 정사’(団地妻 : 昼下りの情事)의 주연으로 ‘로망 포르노의 여왕’(ロマンポルノの女王)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일부 매체에서는 그녀가 “시라카와 가즈코는 닛카쓰 로망 포르노의 상징”(白川和子, 日活ロマンポルノの象徴)이라고 까지 불리울 정도였다. 

그녀는 1947년 9월 30일 나가사키현 사세보시(神奈川県相模原市)에서 태어났으며 1967년에 무카이 간(井寛が)감독의 영화 ‘여학생 기숙사’(女子寮)를 통해 데뷔하였다. 그녀는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에 반발하여 아토미 대학교(跡見学園女子大学) 재학시절 신부수업이나 받아야 하는 현실을 거부하고 도쿄의 연예계를 기웃거렸다. 

물론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도쿄로 전근을 오게 되어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극부 활동을 하였고 배우 ‘이치하라 에츠코’(市原悦子)를 동경했다고 한다. 또 1966년 ‘주간 평범’(週刊平凡)의 자매지인 ‘디럭스 펀치’(デラックス・パンチ)를 통해 누드화보를 찍기도 한다. 집에서는 늘 화장기 없는 얼굴을 유지했지만 대학까지 중퇴하며 5년간 230개의 핑크 필름에 주연을 맡아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닛카쓰에서 훨씬 높은 출연료와 안전 보장 조건을 제시하며 계약하자고 했음에도 그녀는 처음에는 이적을 망설였다고 한다. 

이미 1960년대부터 영화에서 섹스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지만 대중들의 눈에는 섹스가 당혹스럽고 부끄럽거나 더러운 것으로 치부됐다. 닛카쓰 같은 메이저 영화사의 전속이 된다면 사방팔방 포스터와 사진이 붙게 되고 결국 부모에게 들킬 것을 염려하여 망설인 것인데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그녀의 영화들이 대히트를 쳤기 때문에 언론들은 앞다투어 “갑자기 나타난 닛카쓰의 구세주”(突如として現れた日活の救世主)라는 타이틀 기사를 내보냈고 사내에서도 그녀의 영화라면 히트를 친다는 공식이 성립되었다. 사실 ‘핑크 필름’ 시절 몰래 여관방에서 메이크업도 없이 촬영하던 시절에 비하면 닛카쓰는 거장 스텝들과 최고의 카메라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인기는 학생운동으로 살벌하던 대학가의 축제에도 초청되는 기이한 현상까지 일어났다. 명문 ‘도호쿠 대학교’(東北大学)의 축제 게스트로 초청을 받았고 사회자로부터 “마지막으로 축제에 참석한 학생들을 향해 뭔가 한마디”하라고 하자 그 유명한 “닛카쓰 로망 포르노를 보고 평화로운 사회를 구축하자”(日活ロマンポルノを見て平和な社会を築こうよ)는 명언을 남겼다. 

그녀는 1년 3개월간 20편 정도의 로망 포르노 영화를 찍었고 1973년, 기념비적인 자전적 영화인 ‘소네 주세이’(曽根中生)감독의 ‘실록 시라카와 가즈코의 벌거벗은 이력서’(実録 白川和子・裸の履歴書)를 끝으로 은퇴했다. 그러나 1976년 이혼 후 주류영화계와 방송계로 돌아와 활동을 이어갔다.

로망 포르노 시대극에서 탑 스타였던 오가와 세츠코

▲오가와 세츠코
시대극에서는 단연 오가와 세츠코가 탑이었다. ‘깨질 것 같은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그녀는 핑크필름을 거치지 않고 경력도 전무 해서 무명으로 출발한 첫 번째 스타이기도 했다. 오가와 세츠코는 닛카쓰 외 다른 영화사의 작품에는 한번도 출연하지 않았으며 1971년부터 1974년까지 로망포르노 22편에 이름을 올렸다. 아이보리 빛 피부, 얇고 갸름한 얼굴, 우아한 기품 등 일본의 고전적인 미인이 가진 불가사의함을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여배우였다. 

영화 '부유하는 세계의 여류 예술가'

1971년 11월 20일, 닛카쓰의 그 유명한 ‘로망 포르노’는 정식으로 런칭 되며 첫 번째 동시상영 작품이 하야시 이사오(林功)감독의 ‘색력 오오쿠 비화’(色暦大奥秘話)와 ‘단지부인 : 오후의 정사’였기에 더욱 상징성이 있었다. 그녀는 에도시대의 색담을 다루는 총 7편에서 모두 주연으로 출연했다. ‘소네 주세이’ 감독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다루기로 하고 오가와 세츠코의 역작 ‘부유하는 세계의 여류 예술가’(色暦女浮世絵師, Eros Schedule Book: Female Artist, 1972)는 그녀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이 영화로 감독에 데뷔한 소네 주세이는 로망 포르노계에서 최초로 비평적 성취를 이뤘다고 인정받았으며 ‘영화예술’(映畵藝術)에서 선정한 ‘올해 최고의 영화’ 7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음악이 흐르는 이 영화는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오가와 세츠코는 화가 세쓰이의 아내인 오세키 역을 맡아 열연했다. 영화 속에서 세쓰이는 지병으로 쇠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투지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아내 오세키는 이러한 남편을 응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로운 삶은 근처를 떠돌던 사디스트적 연쇄 강간범의 등장으로 산산이 부서진다. 이 강간범은 남편을 위해 약초를 뜯던 오세키를 유린한다. 

이러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오세키는 남편의 에로틱한 그림 연작을 도우면서 기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녀가 일하는 여관에서 벌어지는 성행위들로 상상만 커질 뿐이다. 마침내 그림이 유명해지고 잘 팔리게 되어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는가 싶은데 강간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괴로운 기억 탓에 고통이 여전하다. 

영화 '성담모란등롱'

급기야 남편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슬픔에 잠긴 오세키는 강간범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 하게 된다. 상영시간 67분의 칼러 영화로 오가와 세츠코의 사슴 같은 눈망울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연기가 일품인 영화다.

‘성담모란등롱’(性談牡丹燈籠, Hellish Love, 1972)은 전통적인 귀신 이야기(괴담)를 섹시 하게 각색한 것이다. 다지모토 하지메(谷本一), 하야시 미키(林美樹)가 함께 출연한 이 작품은 홍콩영화 ‘천녀유혼’(倩女幽魂, A Chinese Ghost Story, 1987)에 비견할만한 영화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을 필자에게 붙이라는 제의가 왔다면 ‘A Japanese Ghost Story’라고 붙였을 것이다. 

하야시 이사오(林功)감독의 ‘색력 오오쿠 비화’(色暦大奥秘話)

일본의 전통적인 귀신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신비한 여자와 깊은 사랑에 빠진 남자가 마침내 그녀가 귀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모란꽃 등불 아래서 섹스’ 정도로 보면 제목이 이해가 될 것이다. 실제로 절세미인과 우산 장인이 비오는 날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녀가 귀신임을 감지한 승려도 등장한다. 일본의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이면서 에로틱한 요소가 가미 되어 일본은 물론 서구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천녀유혼’의 왕조현(王祖賢), 장국영(張國榮) 두 히로인과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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