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경제학(60)/ 로망 포르노와 핑크 영화계
일본영화경제학(60)/ 로망 포르노와 핑크 영화계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2.12.08 1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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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 고이치 감독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1970년대 로망포르노(ロマンポルノ)가 핑크필름(ピンク映画)을 생산하는 이른바 ‘핑크 영화계’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닛카쓰가 제작한 로망 포르노 영화들이 당시 그들만의 직영 극장 네트워크를 통해 배급되었고 차곡차곡 보관되면서 오늘날 DVD로 출시되고 재상영되고 있지만 그 이전까지 영세했던  ‘핑크영화계’는 산업 생태계가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시절에도 에로덕션의 영화들을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극장들은 존재했고 닛카쓰의 부족한 물량을 메워 준 것이 바로 핑크영화계였지만 아무래도 메이저 영화사이자 배급사인 닛카쓰로 인해 타격을 받은 것만은 확실했다. 극장주들은 ‘핑크필름’들을 ‘일회성’으로 여겼고 전국적으로 상영을 마치고 나면 그 역할을 마쳤거나 수명이 다했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이 여파로 1970년대 전반기의 ‘독립섹스영화’ 제작사들의 작품은 많이 남아 있지 않고 DVD로 거의 출시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닛카쓰를 비롯한 메이저 영화사들의 ‘에로’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핑크영화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했다. 그들도 메이저 영화사들의 생존 방식을 벤치마킹하여 TV 프로덕션, 테마파크, 파친코, 부동산, 금융 서비스 등 다른 시장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74년에 접어들어서 완전히 칼러화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니시하라 기이치 감독의 영화 '흐트러진 관계'

▲신도호(新東宝)의 태동
단순히 ‘신도호’라고 해서 1947년~1961년까지 14년간 800편 이상의 영화를 제작하고 초기에는 문예색이 강하고,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던 그 회사가 아니다. 오사카(大阪)에 본사를 오랫동안 두었으며 도산 후 다시 조합된 ‘신도호영화주식회사’(新東宝映画株式会社, しんとうほうえいが)를 이야기 한다. 

이 회사는 주로 ‘간사이 지회’(関西支社)쪽에 배급망이 특화된 회사였다. 따라서 전신은 ‘신도호흥업주식회사’(新東宝興業株式会社). 작품에 따라서는 ‘신도호흥업 간사이’(新東宝興業関西)명의의 것도 있다. 1982년이 되고 나서 본사를 도쿄로 이전할 정도로 간사이 지방을 중심으로 한 배급회사이기도 했다. ‘지방상영업자’들과의 거래가 굉장히 중요해졌다. 사실 한국의 경우도 지방배급업자들의 파워가 막강했던 시기가 있었다. 당연히 신도호 역시 막강한 파워를 바탕으로 외화수입까지 하면서 제작·배급했다. 

지난 2017년 열렸던 나카가와 노부오 감독의 회고전 포스터

물론 1963년에 구(舊)신도호의 감독이자 괴기영화의 대가였던 나카가와 노부오(中川信夫) · 고모리 시로(小森白)가 공동연출하고 다카하시 노리(高橋典)가 조감독으로 ‘일본 잔혹 이야기’(日本残酷物語)를 제작·배급하였지만 이후로는 줄곧 외화 배급을 전문적으로 했다. 배급되는 외화는 이른바 ‘버레스크’(Burlesque, バーレスク)류의 영화들로  일반적으로는 성적(性的)인 웃음을 유발하는 콩트나 누드까지는 이르지 않는 여성의 매력을 강조한 춤을 포함한 쇼를 말한다. 

이러한 경향의 영향을 받아 신도호에 관계하고 있던 감독이나 각본가를 이용해 ‘핑크 무비’라고 총칭되게 되는 단편의 성인 영화들을 잇달아 제작해 나간다. 당초는 구(舊)신도호계열의 상영관을 중심으로 배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직영의 성인 영화관으로서, 도쿄에 ‘시네마 유라쿠조’(シネマ有楽町), 오사카에 ‘히가시우메다시네마’(東梅田シネマ)와 ‘넘바신도호’(ナンバ新東宝)등을 운영하면서 수익을 올렸다. 

이 극장들은 결국 ‘신의 한수’가 되었다. 핑크 무비들은 지속적으로 제작 되었으며 닛카쓰가 로망포르노 제작을 멈춘 이후로 국내 영화의 제작 총 제작편수가 전체적으로 감소하는 과정에서도 주류영화 대비 핑크 영화의 비율은 실질적으로 증가했다. 일종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경쟁자가 사라진 까닭이다. 신도호의 사장이면서 그 자신 영화감독이었던 ‘고토 고이치’(後藤幸一)는 훗날 로망포르노가 막을 내린 후인 1991년부터 1992년에 회사의 수익이 가장 높았다고 술회했다. 

때맞춰 당시 일본 영화 산업 전반적으로 티켓 가격이 상승해 운도 좋았다. 때문에 핑크무비는 어느새 영화 내용 때문에 습관적으로 극장에서 시간을 때우는 나이 많은 매니아 층이 줄고 더 넓은 층의 잠재적 관객들을 확보해 나가기 위한 참신한 아이디어로 일본 독립 영화계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전용 상영관 덕분에 ‘게이 시장’을 타겟으로 한 영화들이 제작되기도 했다. 따라서 비평적 평가와 감상의 대상으로 주목을 받더니 나중에 다루겠지만 ‘사천왕’(四天王, Four Devils)이라 불리는 감독들이 혜성같이 나타나 핑크무비의 작품성을 격상시키게 된다. 이 중심에 ‘신도호’의 공이 매우 컸다. 

이즈미 세이지 감독

▲신도호의 황금기
신도호가 처음부터 본격적인 핑크무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하였다. 물론 1969년에서 1971년까지 새로운 시도를 하기는 했다. 일본 영화 태동기의 영화형식을 창조적으로 변형해 낸 ‘연쇄극’이 그 주인공이었다. 연쇄극은 원래 순회공연을 하는 신파 극단이 펼치던 무대극으로 연극에 실사 영화를 첨가한 것이다. 무대에서 실내 장면을 연기하다가 멈추면 프로젝터를 이용하여 미리 촬영된 옥외 장면을 스크린에 비추는 방식이다. 

신도호는 이것을 반대로 이용했다. 영화를 상영하다가 에로틱한 순간이 되면 연기자들이 스크린 앞으로 나와 더 실감나는 경험을 관객들에게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와 라이브 쇼가 혼합된 이 연쇄극은 제작비가 많이 들어갔다. 배우의 부상 위험도 따랐고 보험에 대한 부담까지 더해졌기에 핑크무비를 직접 제작하거나 배급하는 것이 수익 면에서 더 낫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변화된 영화 생태계로 인해 급속도로 재편되었다. 작은 프로덕션들은 사라지고 소수의 그것도 배급이 가능한 프로덕션들이 살아남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종류의 영화가 돈이 되는지가 보다 더 명확해졌다. 지방상영업자들 역시 규모가 큰 핑크무비 업자들과 거래를 하기 원했고 1970년대 초반 이미 전국에 300군데가 넘는 상영 네트워크가 확립됐다. 이때의 양대 산맥이 바로 신도호와 오쿠라영화(大蔵映画)로 배급을 담당했으며 현재까지도 핑크 무비를 제작하고 있다. 

신도호의 서부 간사이 지구(関西地区)의 배급사이자 지점인 ‘도쿄흥영’(東京興映)은 제작사로 나뉘어 운영되었는데 1972년 통합하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신도호’영화사로 재출범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간사이 지역만이 아닌 전국적 배급 네트워크를 창조해 냈다. 고쿠에이(國映), 니혼시네마(日本シネマ), 니시하라 기이치(西原儀一)가 설립한 아오이영화(葵映画)와 네트워크를 통합했다. 

이중 전국에 광범위한 극장 네트워크를 갖고 있던 ‘니혼시네마’와의 네트워크 통합은 단숨에 신도호의 약점을 카버 하며 ‘전국구’로 거듭나게 했다. 고쿠에이는 배급업에서는 손을 뗐지만 자체적으로 계속 핑크무비를 제작해 나갔다. 아오이영화는 신도호에 흡수되었지만 감독 니시하라 기이치를 얻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했다.

니시하라 기이치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제작된 아오이 영화에서 저예산, 선정주의의 핑크 무비로 알려졌으며 ‘일본에서 가장 저속한 영화 작가’나 ‘야쿠자 영화 팬들 사이에서 컬트적 인기자’로 불렸다. 그의 대표작은 ‘흐트러진 관계’(乱れた関係, 1967). 특히 1970년대 초반 발굴한 ‘이즈미 유리’(泉ユリ)와 히트작들을 내놓았는데 결국 두 사람은 결혼한다. 1972년부터 1976년까지 신도호는 매년 60여편의 영화를 개봉했다.

오쿠라영화의 미츠기 오쿠라

▲오쿠라영화(大蔵映画)
특별히 ‘오쿠라영화’(OP PICTUERS로 더 많이 알려짐)의 경우에는 최근에는 ‘퀴어’(Queer)영화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핑크무비를 만들지만 그중 퀴어 영화도 제법 많이 제작한다. 신도호, 밀리언필름(ミリオン)과 함께 3대 메이저 핑크필름 제작사로 군림했으며 신도호와는 전략적 제휴를 통해 생존해 나갔다. 사실 오쿠라영화는 태생적으로 신도호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1960년 12월 1일 신도호의 대표이사에서 퇴진된 ‘오쿠라 미츠기’(大蔵貢)가 제작물을 납품하던 후지영화(富士映画)를 모태로 설립한 회사였기 때문이다. 

영화 '태평양전쟁과 히메유리부대'의 해외 개봉 포스터

첫 출발은 일본에서 두 번째 70mm 대작 영화였던 ‘태평양전쟁과 히메유리부대’(太平洋戦争と姫ゆり部隊)를 개봉하였으나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오키나와 공방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미노미하라 히노지(南原宏治) 주연으로 오키나와제일여학교(沖縄第一高等女学校)출신의 ‘히메유리부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였는데 ‘히메유리의 탑’ (ひめゆりの塔, 1995)으로 재각색 되기도 한 영화다. ‘히메유리 학도대’란 ‘종군간호부’인데 여기서 언급하는 이유는 이 영화의 수출 후 포스터 때문이다. 다소 외설적인 포스터로 승부하여 훗날 ‘오쿠라영화’가 어떻게 생존할지에 관한 힌트를 준 셈이다. 

오쿠라영화의 '퀴어'영화들

핑크무비의 제1호 영화인 고바야시 사토루(小林悟)감독의 ‘육체의 시장’(肉体の市場)을 대히트시킨다. 이 여세를 몰아 핑크필름들을 지속적으로 제작하게 되는데 신도호와 달리 간토지구(関東地区)를 중심으로 배급망을 확보하여 생존해 나가는 방식을 취하였다. 자사 직영관과 외부 핑크 무비 제작에 관련된 군소 프로덕션 등을 중심으로 성인 취향 영화 배급망인 ‘OP 체인’을 조직한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현재까지 이어지는 핑크 필름 전문 회사로서의 체제를 굳혔다. 뿐만 아니라 외주제작을 과감히 수용하는가 하면 ‘오쿠라 영화 촬영소’(大蔵映画撮影所)를 어뮤즈먼트(오락)시설인 ‘오클라랜드’(オークラランド)로 과감히 전환하고 외화배급업에서도 손을 뗐다. 독자생존의 길이 이때 열렸으며 설령 영화산업이 끝장난다고 해도 회사는 살아남는 과감한 선택이었다. 이 시기 핑크무비들은 메이저 영화사에서 만든 영화들과 함께 3편 동시 상영되는 방식이 아니라 전용상영관에서만 배급됐기 때문에, 이런 영화들이 수익을 보장했던 현상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970년대 '후텐족'(フーテン族)들

▲밀리언필름(ミリオン)
밀리언은 핑크필름을 제작하던 회사 중 가장 스탈일리시(stylish)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고가치 창출이 가능하고 기본 역량이 있었기에 히트작들을 연달아 내놓기도 했다. 1980년대에 AV(adult video)가 출현하면서 핑크영화 관객의 대부분을 앗아가 버렸지만 계속 핑크필름이나오고 있으며 DVD로 출시되어 이 시기 대표작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신도호의 고토 고이치가 술회했듯이 “당시 우리는 텔레비전으로 포르노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는 말로 미루어 핑크필름들을 비디오로 만들기 위한 마스터 본조차 남겨 놓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다만 많은 양이 국립영화센터에 기증되었는데 이 또한 연구목적이 아닌 일반관람을 원하는 사람들은 접근할 수 없는 현실을 비춰보면 밀리언필름은 ‘게이츠프로덕션’(惠通プロダクション)이라는 튼튼한 모기업을 바탕으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어 훗날 DVD회사인 ‘에이스듀스엔터테인먼트’에 소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또한 1980년대에는 외국의 수위 높은 에로영화들을 ‘요핀’(洋ピン)이라는 이름으로 배급해 수입을 올렸다. 게이츠프로덕션이 원래부터 극장과 놀이시설의 운영을 위해 만들어진 회사였기에 이후 오락과 레저부문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작은 배급사들을 끌어들이기에도 용이했다. 
밀리언의 핑크무비들은 차별화 되었다. 최신의 해외 소울(SOUL)과 재즈 음악으로 사운드트랙을 채우며 가볍고 경쾌한 매력을 띄게 했다. 이 모든 공헌은 전설적 핑크필름 회사인 ‘프로덕션다카’(プロダクション鷹)의 설립자인 ‘기마타 아카타카’(木俣堯喬)의 아들인 활동명(活動名) ‘이즈미 세이지’(和泉聖治)의 공로다. 

그는 1972년 ‘붉은 동굴’(赤い空洞)을 시작으로 100여편의 각종 영화를 감독했는데 프로덕션 다카에서 제작하고 밀리언에서 배급하는 형식으로 만든 핑크필름들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중 지금도 ‘에이스듀스’(Ace Deuce Entertainment)에서 DVD로 출시되어 전설로 남은 영화는 두 편으로 ‘요코하마 샤이엔 : 여자의 습지대’(横浜シャイアン 女の湿地帯)와 ‘새색시 : 흐트러진 모습’(新妻 乱れ姿)이다. 그는 각본과 감독을 겸하며 다작을 했지만 핑크필름 외 상업영화나 TV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이중 ‘새색시 : 흐트러진 모습’은 ‘후텐족 패거리’를 중심으로 한 핑크필름이다. 미국의 히피문화가 일본에서도 대유행하게 되었고 이를 따라하는 후텐족(フーテン族)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후텐족’들은 주로 신주쿠역 근처 광장에서 시너를 흡입하고 몽롱해진 채로 여기 저기 기웃거리거나, 혹은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이상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댄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이들은 재즈와 보헤미안의 정서가 있었는데 여기에 수수께끼 같은 불륜의 여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불륜의 대상인 검은 옷의 여인이 아주 위험한 유희의 상대였음이 곧 드러난다. 이 영화는 지금도 매니아들 사이에서 걸작으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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