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경제학(63) ‘로망 포르노의 선구자’ 소네 주세이
이훈구의, 일본영화경제학(63) ‘로망 포르노의 선구자’ 소네 주세이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3.03.0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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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주쿠 혼돈의 도시 갈때까지 기다려' 현장의 소네 주세이 감독(맨왼쪽)과 배우들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닛카쓰(日活)의 로망포르노(ロマンポルノ, 로맨틱 포르노)를 다룸에 있어 사실 가장 먼저 언급할 감독이 있다면 바로 ‘소네 주세이’(曽根中生)감독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를 좀 후반부에야 등장을 시켰다. 그 이유는 좀 더 자세한 자료들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비록 로망 포르노의 선구자임에는 분명하지만 1988년 잠적을 감춘 이후 2011년 잠시 나타나고 이후 2014년 8월 26일 폐렴 때문에 오이타현 우스키시의 병원에서 76세를 일기로 사망하기까지의 행적에 대해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말년을 보냈기 때문에 자료들을 좀 더 찾아보았기 때문이다. 

닛카쓰를 떠난 후 1984년에 와타나베 마모루(渡辺護) 감독과 함께 ‘필름워커스’(フィルムウォーカーズ)라는 제작사를 설립하지만 별다른 작품 없이 문을 닫게 되고 1986년에 닛카쓰가 배급하고 오사카에 근거를 둔 ENK를 통해 ‘불륜’(不倫, 1986)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지만 1988년 ‘플라잉 비상’(フライング飛翔)이라는 주류 영화를 만들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도박과 고속 모터보트 레이싱의 세계를 다룬 영화였는데 제작비가 없었던 까닭에 지방의 야쿠자 그룹에서 거금을 빌려야 했다고 한다. 흥행에 참패하면서 돈을 갚을 수 없게 되자 그는 홀연히 도주하고 행방을 감춰 버렸다고 한다. ‘도시전설’(都市伝説)에 의하면 규슈(九州)지방 구마모토(熊本)의 한 시골마을에서 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그렇게 대중 앞에서 사라졌던 그는 갑자기 2011년 닛카쓰 창립 100주년 ‘살아가는 로망 포르노’(日活創立百周年記念「生き続けるロマンポルノ」 )행사에 나타난다. 오이타현(大分県)에서 왔다는 이야기 외에도 ‘소네 요시타다’(曽根義忠)라는 본명으로 환경 배려형 연료의 제조 장치를 연구·개발하는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인터뷰를 했다. 로망 포르노의 개척자였음에도 그의 말년이 초라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소네 주세이 감독의 사망 기사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던 감독
그는 1937년 군마현(群馬県)에서 태어나 1962년 도호쿠대학교에서 예술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청년 시절 그는 ‘아트시어터길드’(ATG)가 배급했던 폴란드의 신진감독 ‘안제이 바이다’(Andrzej Wajda) 같은 예술영화 감독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닛카쓰에 입사 한 후에는 ‘사이토 부이치’(斎藤武市), ‘후루카와 다쿠미’(古川卓巳), ‘스즈키 세이준’(鈴木清順), ‘우시하라 요이치’(牛原陽一) 등 기라성 감독들 밑에서 도제 수련 기간을 거쳤다.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감독들이니 제대로 영화 수업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이때 그는 ‘구류 하치로’(具流八郎)라는 가명으로 8명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개발팀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다. 와카마쓰 고지(若松 孝二) 감독의 ‘벽 속의 비사’(壁の中の秘事, 1965),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살인의 낙원’(殺しの烙印, 1967)등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사실 이 팀은 영화 ‘러브 헌터’(恋の狩人, 1972)의 ‘야마구치 세이치로’(山口清一郎) 같은 훗날 로망 포르노의 주역들이 모인 집합체이기도 했다. 

사실 그는 1960년대 중반 ‘와카마쓰프로’(若松プロ)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에로영화 제작을 맛본 바 있는 경력자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1971년 ‘색력: 부유하는 세계의 여류 예술가’(色暦女浮世絵師)를 통해 정식으로 데뷔한다.

오타니 마치코, 미즈하라 유우키, 오가와 세츠코.(왼쪽 시계방향순)

첫 영화였지만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색담(色談)으로 시대극에 성애영화를 접합시킨 작품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해 ‘영화예술’지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영화’ 7위에 올라 ‘로망포르노 영화로는 최초로 비평적 성취를 이뤘다’는 평을 얻었다. 그는 비록 로망 포르노 등 성애영화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고자 했지만 결국은 다시 연출을 해야 하는 패턴이 반복됐다. 

물론 그의 데뷔시기와 로망포르노의 런칭 시기가 겹치는 것이 함정이었지만 그나마 장르를 섞어 영화를 만듦으로써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려고 했다. 그 대표적 예가 에로틱 스릴러 였던 ‘불멸의 사랑’(Hellish Love, 1972)이다. 아마도 ‘성 담화: 모란등롱’이라는 1968년 야마모토 사쓰오 (山本薩夫)감독의 영화를 떠올릴 것이다. 초자연적인 설화가 주제이고 일본에서는 워낙 유명하였기에 소네 주세이는 원작에서는 ‘괴담’(怪談)이었던 특징을 ‘색담’으로 바꾸고 호리호리한 신인배우였던 ‘오가와 세츠코’(小川節子)를 주연으로 발탁한다. 

로망포르노의 촬영현장이란 그것을 처음 경험하는 배우나 감독, 스텝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이었기에 선정적 문체만 구사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섬세하면서도 간결하고 부드럽게 만든 섹스 장면과 점점 더 분간하기 어려워지는 꿈과 현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는 음침한 영화적 공간을 창조한 소네 주세이의 연출력은 단연 돋보였다. 영화 속 오가와 세츠코는 늙어가는 사무라이의 외동딸인 오쓰유 역을 맡아 열연했는데 섹스 영화라는 다소 저렴하고 고정 관념적인 개념을 압도적으로 상회 하는 높은 수준의 예술영화라는 결과물이 된 데에는 그녀의 연기력이 절대적이었다. 소네 주세이는 평소 “내 주변에 이런 미인은 없다”는 칭찬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영화 '신주쿠 혼돈의 도시 갈때까지 기다려' 촬영현장

▲뛰어난 달인의 경지
초기 연출작들에서 소네 주세이는 다양한 장르 스타일을 로망 포르노라는 포맷에 맞게 재탄생 시키는데 매우 뛰어난 달인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가타기리 유코(片桐夕子)는 그의 페르소나이기도 했는데 ‘㊙여랑 시장’(女郎市場, 1972) 같은 코미디성이 짙은 로망 포르노 영화들에 단골로 출연하였다. 여랑시장은 ‘창녀시장’ 정도로 번역이 가능한데 단세포적 사고방식을 가진 시골 처녀(가타기리 유코)에 관한 외설적 코미디 영화다. 

주인공은 비록 사창가에 팔려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다양하게 겪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처녀성을 지키는데 매달린다. ‘Secret Chronicle: Prostitution Market’이라는 거창한 영문 제목이 말해주듯 성매매시장의 비밀스런 연대기 정도로 읽혀진다. 매춘부의 비밀일기랄까 아니면 처녀 매춘부 등등 풍부한 상상력을 준 덕분에 일본은 물론 서구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는데 슬랩스틱 코미디의 요소가 다분한 영화다. 이때부터 그는 로망포르노계에서 장르의 혼합과 새로운 시도를 하는 감독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영화 '외국인 매춘부 오만 추분의 꽃들' 스틸사진

‘외국인 매춘부 오만: 비오는 네덜란드 언덕’(らしゃめんお万 雨のオランダ坂, 1972), ‘외국인 매춘부 오만: 추분의 꽃들’(らしゃめんお万 彼岸花は散った, 1972)은 그의 시리즈 영화의 첫번째 작품으로 샐리 메이(Sally May)가 주연하였다. 그녀는 가수로도 유명했고 이따금 홍콩영화에서 한쪽 어깨가 벗겨진 기모노에 화려한 문신을 하고 주사위 놀이를 하는 도박영화의 여인들로 자주 패러디되는 배우다. 그녀는 잃어버린 엄마를 찾기 위해 일본인 연인과 함께 상하이에서 나가사키까지 여행을 한다. 극중 배경인 1930년대 초반 일본은 중국과 갈등 중이었고 그런 시기에 매춘부 ‘오만’이 나가사키에 등장하자 엄청난 편견과 적개심으로 가득찬 사람들를 맞닥뜨리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우아한 분위기의 시대극을 표방하여 역시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이때 그는 잠시나마 현대극을 만들기로 하고 ‘색정자매’(色情姉妹, 1972)를 연출하는데 상영 3일 만에 경시청에 출두하며 영화윤리위원회가 재심의를 요구하는 등 부침을 겪게 된다. 사실 이 시기는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을 완성한 시기였기 때문에 충격이 컸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특성을 잃고 예전의 명성도 다시 회복하지 못한다. 여러 시도를 하다가 ‘신주쿠 혼돈의 도시: 갈 때까지 기다려’(新宿乱れ街 いくまで待って, 1977)에선 다소 폭력적인 스타일의 새로운 에로티시즘 영화를 연출했는데 관객들에게 철저히 외면 받기도 했다. 

영화 '여랑시장'과 영화 '오호!! 꽃의 응원단'

물론 1976년에 인기 만화의 실사 영화화인 ‘오호!! 꽃의 응원단’(嗚呼!! 花の応援団)을 통해 닛카쓰 최고의 대히트작을 만들기도 했다. 그해 키네마 준보(キネマ旬報)의 베스트 10중 ‘7위’에 오를 만큼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당연히 닛카쓰는 이후 ‘시리즈물’로 재기획하였다. 모처럼 로망 포르노물이 아닌 비-로망포르노 영화이자 코미디물로서 ‘오호!! 꽃의 응원단: 야쿠샤 야 노’(嗚呼!!花の応援団 役者やのォー, 1976)와 ‘오호! 꽃의 응원단: 남자 눈물의 친위대’(嗚呼!!花の応援団 男涙の親衛隊, 1977)로 이어지는 3부작을 통해 다양한 장르의 연출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이때의 기억이 좋았는지 이후 독립제작사와 손잡고 ‘하카타 순정’(博多っ子純情, 1978)을 만들기도 했다. 

영화 ‘천사의 창자: 여고생’

▲천사의 창자 시리즈
절치부심 끝에 내놓은 것이 ‘천사의 창자’(天使のはらわた) 시리즈다. 만약 이 작품들이 없었다면 그의 영화 인생에서 명성은 영원히 회복되지 못했을 것이다. ‘천사의 창자: 여고생’(女高生 天使のはらわた, 1978)과 ‘천사의 창자: 붉은 교실’(天使のはらわた 赤い教室, 1979)이 그렇다. 이 영화들은 이시이 다카시(石井隆)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천사의 창자’ 시리즈에서 첫 번째 편과 두 번째 편에 속하며 각본은 ‘이시이 다카시’(石井隆)가 썼다. 

제1편 ‘천사의 창자: 여고생’은 원작과는 주인공도 다르고 이야기도 다소 벗어나 있어 동떨어진 작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세 명의 오토바이족 청년의 성적 일탈과 갈등을 그려내 요코하마영화제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였는데 일본 로망 포르노의 아이돌인 ‘오타니 마치코’(大谷 麻知子)가 주연하였다. 

영화 ‘천사의 창자: 붉은 교실’

2편인 미즈하라 유우키(水原ゆう紀) 주연의 ‘천사의 창자: 붉은 교실’은 남성잡지 편집장과 미스테리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개봉시 제목은 ‘우노 코이지로의 젖은 열기’(宇能鴻一郎の濡れて開く)였다. 강박에 사로잡힌 주인공의 심리를 몽환적인 이미지로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클라이맥스에서 보여진 난교장면은 ‘색계’보다 더 예술적이라는 찬사도 따른다. 게다가 로망 포르노 답지 않게 남자 주인공의 ‘순애보’도 등장한다. 쏟아붓는 비와 극적인 원색의 이미지는 이 시리즈가 원조이면서 이후 스타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영화평론가 재스퍼 샤프가 “로망포르노 시기 닛카츠의 전 작품을 통틀어 최고의 영화”로 꼽았을 정도인데 소네 주세이는 이 두 작품을 통해 이전의 명성을 어느 정도는 회복했다. 스타일리쉬하고 혁신적이며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었다는 평가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이유다.

전성기 시절의 소네 주세이 감독의 기자회견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건재함을 드러내고자 나타났던 영화제 이후 ‘오호!! 꽃의 응원단’의 DVD에 수록된 서플먼트의 인터뷰에 의하면 ‘상업적 목적화의 요구가 지나쳐 거기에 맞추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완성된 작품에의 자기혐오를 견디지 ​​못하고 감독 일을 그만둔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만약에’라는 가정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이겠지만 소네 주세이는 오늘날 다수의 평론가들에게 ‘닛카쓰 로망포르노 감독 중 최고의 감독’으로 꼽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소망했던 것처럼 비 로망포르노 영화, 그중에서도 예술영화를 만들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만 그는 생의 마지막 시기에 ‘소네 주세이의 자전적 에세이 – 사람은 그 이름만의 죄의 깊이이다’(曽根中生自伝 人は名のみの罪の深さよ)라는 긴 제목의 자서전을 남겨 로망 포르노 장르가 그의 숙명이었음을 담담하게 적었다. 내용을 보면 소네 주세이는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한 예로 로망 포르노에서의 ‘지다이게키’(時代劇)에 대한 견해에 대해 ‘항상 미적이며, 그것은 에로티시즘을 빚어도 음란하지 않다’고 말한다. 또한 영화 장르로서 ‘로망 포르노’는 아방 가르드(Avant-garde)여야 하기 때문에 기꺼이 연출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 자신 장르에 대한 애착이 있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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