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미국 리포트/ 남다른 아우라의 배우, 킬리언 머피
생생 미국 리포트/ 남다른 아우라의 배우, 킬리언 머피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4.04.01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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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다채로운 연기 스펙트럼 ··· 매혹적인 눈동자
크리스토퍼 놀런과 킬리언 머피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이 막을 내렸다. 당연히 남우주연상 트로피는 수상이 가장 유력했던 킬리언 머피(Cillian Murphy)에게로 돌아갔다. 한 매체가 ‘화면 속으로 빠져들어갈 것 같은 깊은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가장 매력적이라는 찬사를 보낸 만큼 그의 치명적 매력은 아무래도 ‘눈’이다. 170 초반으로 크지 않은 키임에도 유독 그의 눈동자는 남다른 아우라를 풍기기에 전 세계 팬들을 사로잡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크리스토퍼 놀런(Christopher Nolan)과 가장 케미가 잘 맞는 대세 배우이기도 하다. 연기 스펙트럼이 워낙 넓어 맡은 역할 마다 다양한 스타일을 소화해내고 있다. 특별히 그의 패션 스타일링은 키가 그다지 크지 않은 남자들에게 롤 모델이 된다는 평가.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의 킬리언 머피

▲아일랜드
킬리언 머피는 아일랜드(Ireland) 남부의 소도시인 코크(Cork) 출신이며 ‘코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어머니는 프랑스어 교사이며 아버지는 장학사였다. 원래는 변호사를 지망했으나 연극 ‘디스코 피그’(Disco Pigs)에 출연했다가 불안정한 코크 청소년 배역을 맡음으로 호평을 받으면서 진로를 변경했고 2001년 동명 영화를 통해 스크린에 데뷔했다. 

필자는 왠지 그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아일랜드의 슬픈 역사가 떠오르고는 한다. 대기근과 영국의 억압이 있었던 아일랜드의 역사는 그가 맡았던 배역들 속에서 묻어나는 듯 하다. 필자에게 킬리언 머피의 최고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켄 로치(Kenneth Loach)감독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2006)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아일랜드의 독립투쟁 과정을 그린 이 영화에서 의학도 데미안 역을 맡은 그는 상냥하고 예민한 성품 때문에 전사(戰士)가 된 젊은이의 고뇌를 고스란히 ‘눈’으로 말해준다. 

영화 '나이트 플라이트'(2005)
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2007)

런던으로 가기 위해 기차에 오르던 그가 플랫폼에서 차장과 기관사를 폭행하는 영국군을 목격하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는 전사가 되어 싸우는 내내 동시에 누군가를 치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애당초 폭력과는 거리가 먼 그가 전사가 되어야만 하는 현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보여져야 하는 예민함을 그는 오직 ‘눈’으로 말하고 있다. 

게다가 영화의 배경이 바로 그의 고향이라는 점에서 그가 보여준 절절함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초창기 그의 작품들 속에서 비춰진 이미지는 ‘킬리언’이라는 별난 이름만큼이나 독특했다. 앙상한 알몸과 쏙 빠져들 것 같은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상황에 깊이 빠져 들게 만든다. 이 영화는 켄로치의 독특한 촬영만큼이나 그에 대한 최초의 매력을 느끼게 해준 하나의 사건이었다. 켄 로치는 처음부터 시나리오를 배우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그 날 찍을 분량의 대본만을 주는 독특한 촬영법으로 유명하다. 

또한 장면의 순서대로 배우들이 자신의 역할이 겪게 되는 사건들을 시간 경과에 따라 찍을 수 있게 한다. 배우들에게 있어 이러한 방식은 생소하지만 이내 상황에 익숙해져 더욱 실감나는 연기를 펼칠 수 있게 된다. 생각해서 나오는 연기가 아니라 반응으로 나오는 연기이기 때문에 훨씬 자연스러운 감정을 표현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촬영기법에도 불구하고 킬리언 머피는 썩 잘 소화해 낸다. 때문에 킬리언 머피는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라 인물 자체로서 같은 과정을 겪는 동화현상을 체험했다”고 말하고 있다. 

영화 '28일 후'(2003)

▲28일 후
킬리언 머피가 ‘디스코 피그’에서 보여준 연기는 ‘28일 후’(28 Days Later..., 2003)의 출연진을 찾고 있던 대니 보일 감독의 눈에 띄게 된다. ‘28일 후’는 2002년 말경 영국에서 개봉된 후 모두의 예상을 깨고 미국에서도 흥행했고 전염병에서 살아남는 청년 짐으로서의 연기로 그는 각종 상을 휩쓸었으며 틀을 벗어난 연기를 통해 바이러스로 인해 혼돈에 빠진 한 남자의 생존을 위한 의지를 처절하게 묘사해 호평을 받았다. 

컬트 영화의 걸작이자 좀비 영화의 시조인 ‘28일 후’는 좀비 바이러스의 기원과 전파가 모두 인간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리는 스토리 라인으로 큰 충격을 안겼다. 최초의 좀비는 감금된 침팬지였으며 이를 구출하기 위한 동물보호단체의 운동가들이 연구원들의 경고도 무시한 체 감염 되면서 결국 전파되고 만다. ‘분노’로 명명된 이 질병은 연구소의 실험과정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데 모든 상황이 악화일로로 흐른 28일 후에 정신을 차린 그가 마네킹처럼 무거운 나체의 몸을 이끌고 ‘HELLO’를 외치는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왜 캐스팅이 되었는지를 알려준다. 세가지 버전의 엔딩들은 덤.

영화 '배트맨 비긴즈'(2005)

▲배트맨 비긴즈
그런 그가 크리스토퍼 놀런을 만나 보여준 반전은 다름 아닌 ‘배트맨 비긴즈’ (Batman Begins, 2005)일 것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 2003)와 ‘콜드 마운틴’(영화Cold Mountain, 2003)을 거친 그는 웨스 크레이븐(Wes Craven)의 ‘나이트 플라이트’(Night Flight, 2005)를 거쳐 ‘배트맨 비긴즈’를 통해 악역으로 거듭난다.

 사실 이 영화에 나오기 전 그는 ’플루토에서 아침을’(Breakfast On Pluto, 2005)을 통해 트랜스젠더 아일랜드 여성을 연기하여 골든 글로브 상 후보에 오른다. 킬리언 머피는 락 밴드로 커리어를 시작해 연극을 거쳐 영화계에 데뷔했다. 그래서인지 가끔 연극적으로 느껴지는 크고 정확한 몸짓, 예를 들어 말할 때의 손동작을 하는데 과장되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움직임의 가장자리가 섬세하기 때문이다.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2008), ‘다크 나이트 라이즈’(The Dark Knight Rises, 2012) 등 크리스토퍼 놀런의 배트맨 3부작은 킬리언 머피의 출연작이기도 하지만 캐스팅 비화가 따른다. 배트맨 3부작 중에 킬리언 머피의 비중이 가장 많은 영화인 ‘배트맨 비긴즈’의 경우 원래 배트맨 역할로 오디션을 봤는데 어울리지 않아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런은 그에게 이미 반해 있었고 결국 더 잘 어울리는 역할인 빌런 ‘크레인 박사’로 캐스팅을 했다. 거칠고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 디테일 한 연기는 정말 잘 어울렸기 때문. 특히 면회실에서 “Would you like to see my mask?(내 복면 볼래요?)”라고 말한 후에 짓는 미소는 어긋난 장난기가 밴 아이의 그것이다. 워낙 강렬했던 탓에 ‘다크 나이트’에는 카메오로 등장하지만 그 짧은 순간의 장면들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그나마 촬영장을 방문했다가 즉석에서 카메오로 나오게 된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경우에는 그래도 5마디 정도의 대사까지 등장하는데 그가 절친 톰 하디(Tom Hardy)와 같이 등장하는 만큼 스팟 라잇이 그에게 집중 될 만 한데 관객들은 오히려 ‘킬리언 머피’를 지금도 떠올리는 역설이 있다. 덩케르크로 다시 크리스토퍼 놀런과 만나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다.

BBC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에서의 킬리언 머피

▲피키 블라인더스(Peaky Blinders)
영화 ‘대부’(God Father)시리즈와 비견될 만큼 완성도가 높은 BBC의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 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적 혼란기였던 시대에 '피키 블라인더스'라는 범죄조직과 이를 이끄는 쉘비 가문의 이야기를 그린 갱스터 드라마다. ‘영국판 대부’인 셈인데 시즌1에서 6까지 완주한 킬리언 머피의 연기는 그 누구도 소화할 수 없는 ‘넘사벽’의 그것이었다. 넷플릭스의 영국 드라마 중 가장 화제작이기도 하다. 

킬리언 머피가 연기하는 갱 보스 토마스 쉘비는 어두운 얼굴과 연하고 탁한 눈, 입에 문 담배, 회색 수트와 모자, 살짝 깔린 목소리와 어우러지는 영국 버밍엄 지역의 발음으로 전설적 캐릭터를 재현해 냈다. 우중충한 공업도시 버밍엄의 날씨와 탁월하고 화려한 음악까지 킬리언 머피의 존재감을 빛내 줄 요소는 많다. 그의 커다란 에머럴드 빛 눈동자는 이제 ‘28일 후’의 우수(憂愁)나, 덩케르크(Dunkirk, 2017)에서 보여지던 겁에 질린 눈이 아닌 냉혹한 보스의 그것으로 완벽하게 변신한다. 

1차 대전 이후를 그려낸 디테일한 미장셴과 스타일리쉬한 연출로 빛이 난 드라마였지만 킬리언 머피의 얼굴 자체가 ‘미장셴’이었던 드라마였기에 무게감 있는 동작 아래 불안을 숨기고 있기에 보스로서 지시하고 행동한다. 때로는 사람들을 내리누르거나 격려 하다가도 혼자 있을 때는 전쟁의 트라우마와 각종 복잡한 감정에 시달려 쓸쓸히 담배를 피고 독한 술을 물처럼 들이킨다. 이렇듯 킬리언 머피는 불안에 떨며 안절부절못하거나 불안을 숨기고 있어 위태로워 보이는 역할을 잘 소화해 냈다. 이후 그는 ‘정신 없이 불안해 하는 연기 전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게 된다.

영화 '오펜하이머'(2023)

▲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
킬리언 머피에게 첫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오펜하이머’. 킬리언 머피는 카리스마 넘치는 원자폭탄 개발 연구 소장으로 등장한다. 기존에 그가 보여준 슬림한 몸매는 그대로인데 뭉퉁한 느낌의 수트 핏, 오버사이즈 재킷과 고집스러워 보이는 짤막한 타이에 어느덧 그의 시그니처가 되어버린 페도라까지. 게다가 극중 오펜하이머는 동성애자다. 

시종일관 원자폭탄 개발에 따른 책임감과 죄책감이 동시에 교차하는 연기는 과연 그가 왜 깊은 내면의 갈등을 가진 캐릭터들을 표현하는데 왜 탁월한지를 보여준다. 그는 원래 메소드 연기와 캐릭터 해석에 일가견이 있는 배우다. 따라서 원자폭탄의 성공 이후 그를 칭송하는 사람들의 환호성은 어느새 비명처럼 들리고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는 표정연기는 감탄을 자아내면서 왜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는지 수긍하게 된다. 

킬리언 머피는 수상 소감에서 이 영화에 대해 “20년간의 배우 생활 동안 가장 창의적이고 만족스러웠던 작품”이라며 “우리는 원자폭탄을 개발한 사람이 만든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이 땅에 평화가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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