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담배를 즐겨 피웠다. 기자가 그를 처음 만난 건 2018년 1월. 당시 기자는 한 독립 시사매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를 만난 건 서울 합정동에 위치한 협동조합 ‘가장자리’ 사무실. 그는 이 협동조합의 이사장과 장발장은행장을 맡고 있었다.
장발장은행에 대한 인터뷰를 사전에 요청하였고 그날 사무실에서 둘이 만났다. 그는 기자에게 간곡하게 양해를 구한 후 줄담배를 피웠다. 인상은 온화했고 말은 따뜻했다. 그런 그가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장발장은행 측은 “지난해 2월 전립선 암 진단을 받은 장발장은행장 홍세화씨가 오늘(4월 18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향년 77세.
고인은 암 진단을 받고도 항암치료를 하지 않고 활동을 계속했고, 12월부터 암이 온몸으로 번진 것으로 전해졌다.
프랑스 망명객으로 한국 사회에 똘레랑스(관용)라는 개념을 제시했던 게 벌써 30년 전이다. 1995년 출간된 그의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70년대 난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등 조직에서 활동하던 그는 무역회사 주재원으로 유럽에 체류하던 도중 남민전 사건이 터지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서슬 퍼런 박정희 유신체제 공안 말기였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망명 20년의 결과물이었다.
2002년 귀국해 한겨레신문 편집국 기획위원으로 일하며 저술 활동과 사회 활동을 이어갔다. 장발장은행장을 맡은 건 2015년부터다.
시민단체 인권연대가 주도한 장발장은행은 경범죄로 벌금형을 선고 받았지만 생활고로 벌금 낼 돈이 없는 이른바 ‘현대판 장발장’들을 돕기 위해 출범했다. 은행 이름은 프랑스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쓴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에서 따왔다.
기자가 홍세화씨를 만났던 2018년 1월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장발장은행의 활성화 보다는 이 은행이 우리 사회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도록 하는 게 목표입니다."
그는 특히 젊은이들의 결핍 상태를 걱정했다. 오랜 취재수첩을 들여다보니 그가 했던 이런 말도 적혀 있다.
“대한민국 청년들은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여유가 없습니다. ‘결핍 상태의 지속’이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결핍이 지속되면 자기 삶을 설계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맹자의 항심(恒心: 백성들이 먹고 살 만해야 도덕적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 중요한 것도 그런 이유겠죠.”
그 이후 장발장은행의 혜택을 받은 청년과 한번 더 홍세화씨를 만났었다. 그의 따스했던 말이 여전히 기억으로 돋을새김된다. 깊은 명복을 빈다.(에디터 이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