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77) 스튜디오 시스템의 몰락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77) 스튜디오 시스템의 몰락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4.05.07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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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 요지 감독

<미국 LA= 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1980년대 일본영화의 특징은 상징과도 같던 스튜디오 시스템이 붕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스튜디오 시스템’이 잘 돌아갈 때는 ‘장르영화’가 발전하기 마련이다. 확고한 스튜디오 시스템 아래 성장했던 일본영화에도 각 메이저 회사마다 특화된 장르가 많았다. 쇼치구(松竹)의 멜로드라마와 서민코미디, 도호(東宝)의 사무라이영화와 괴수영화, 도에이(東映)의 야쿠자영화, 닛카쓰(日活)의 로망포르노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당시 7-80년대 세계 영화사들의 추세가 그랬다. 장르 영화가 발달한 할리웃은 말할 것도 없고 이탈리아 같은 경우에도 ‘지알로’ (giallo)라 불리는 공포스릴러가 등장해 인기를 끌었다. 할리웃의 웨스턴 무비(western movie)를 모방한 주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마카로니 웨스턴’(Macaroni Western)도 장르 영화의 파생물이다. 

‘마카로니 웨스턴’은 일본의 영화 평론가인 요도가와 나가하루(淀川長治)가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스파게티 웨스턴(Spaghetti Western) 또는 이탈리안 웨스턴(Italian Western)으로도 불리어졌다. 일본 영화의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 당연히 이 명칭은 빈번하게 쓰이게 되었다. 스튜디오 시스템이 존재하던 시절에는 이처럼 장르영화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1980년대 그 시스템이 흔들리게 되면서 영화의 제작, 배급, 흥행 면에서 붕괴 현상의 징후가 곳곳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극장의 아성을 위협하는 로망포르노 비디오 테이프들

▲닛카쓰와 V시네마
1950년대 생겨나 일본영화의 황금기이던 1961년에 6개 영화사에서 520편의 영화를 제작하던 이러한 스튜디오 시스템 제도는 25년 후인 1986년에 이르러서는 3개 영화사에서 24편 정도 밖에 제작하지 못할 정도로 체력이 약해 있었다. 주로 영화사가 극장 업자에게 특정 기간 동안 제작하는 모든 영화의 상영권을 일정 금액에 양도하는 방식으로 흥행성이 높은 영화에 자사의 흥행 가능성이 없는 다른 영화(B급 영화)까지 끼워 팔 수 있는 독점적 판매 방식인 ‘블록-부킹’(block-booking)이 사실상 어려워져 대작만으로 영화계를 장악해 나가는 게 힘들어졌다. 따라서 일본영화산업의 재편이 이루어 지게 되었다.

 1970년대 한때 ‘로망 포르노’(ロマンポルノ)로 명맥을 유지하던 닛카쓰 역시 ‘AV’영화의 범람과 비디오의 보급으로 인해 위기를 겪는다. 회사명을 히라가나 표기인 ‘にっかつ’ 로 바꾸는 등 경영합리화를 시도해 보지만 AV의 출현으로 저 예산 핑크영화로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결국 닛카쓰는 전속 프로듀서 제도마저 폐지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비디오가 일반 가정에 보급되고 ‘성인 바다오’ 장르 출현으로 인한 시장의 확대로 인해 메이저 영화사의 자회사와 독립 프로덕션이 ‘V시네마’(Vシネマ)를 만들게 된다. 

‘V 시네마’는 섹스나 잔혹한 폭력 같은 나만의 영화를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컨셉을 지향했다. 이른바 ‘비디오 오리지널’, 극장에서 개봉을 하지 않는 비디오 전문영화가 바로 일본의 V시네마인 것이다. 따라서 V시네마의 한 장르로서 로망 포르노의 후예들은 꾸준히 명맥을 이어간다. 이에 뒤질세라 닛카쓰 역시 ‘로망 X노선’이라는 이름으로 좀 더 야한 섹스 영화 쪽으로 방향을 돌려봤지만 이미 대세를 거스르기에는 너무 늦었다. 1988년까지 무려 1000편의 로망 포르노 영화를 양산했지만 최후의 방법으로 16년 동안이나 계속해 온 로망 포르노 노선을 버리고 ‘롯포니카’ (シネ・ロッポニカ)라는 회사명으로 일반 영화제작에 뛰어 든다. 그러나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제작을 중단해야 했고 일반 영화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야한 장면들이 빠질 리 없어 관객들에게 새로울 것이 없었다.

영화 '무는 여자'(1988) 스틸 사진
영화 '무는 여자 '(1988) 포스터

▲무는 여자
롯포니카의 작품으로는 ‘무는 여자’ (噛む女, 1988)가 대표적이다. 모모이 카오리(桃井かおり), 나가시마 토시유키(永島敏行), 히라타 미츠루(平田満), 요 키미코(余貴美子), 가토 젠파쿠(加藤善博), 쿠스다 카오루(楠田薫), 타케나카 나오토(竹中直人) 등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로망 포르노와 일반 영화를 반반 섞은 듯한 작품이다. 감독의 이름을 마지막에 밝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구마시로 다쓰미’(神代辰巳). 본 연재의 61회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누구인가? ‘로망 포르노의 거장’이다. 

그는 흥행을 생각하고 있었고 따라서 ‘반반 영화’를 제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코가 유우이치(古賀雄一)는 시나리오 작가를 거쳐서 지금은 성인 비디오 제작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 치카코(ちか子)는 딸 사야코(咲也子)와 함께 교외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지만 그날 밤 비디오 마무리 작업 후 바람을 피우느라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늘 바람을 피운다. 그러던 어느 날 코가 유우이치는 친구인 프로듀서 야마자키(山崎)로부터 TV 와이드 쇼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는 의뢰를 받는데 그곳에서 과거 같은 반이었고 지금은 배우인 츠노다 쇼(角田祥)와 재회하게 된다. 

그 결과로 TV 프로그램을 봤다는 초등학교 시절 동급생 에비노 사나에(海老野早苗)로부터 연락이 와서 만나기로 한 코가 유우이치. 처음부터 서로 뭔가에 이끌려 호텔로 가는데 에비노 사나에는 오랜만의 섹스에 흥분을 했는지 난데 없이 코가 유우이치의 어깨를 깨물어대기 시작한다. 제목 그대로 ‘무는 여자’다. 유우키 쇼지(結城昌治)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이 102분의 영화는 지금도 이따금 공유 사이트에 올라올 정도로 한국에 골수 팬들이 있을 정도다. 

닛카쓰는 이처럼 장르가 모호한 영화들로 1980년대 명맥을 유지해 나가기는 했지만 메이저 영화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감독들을 키워내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케다 토시하루(池田敏春), 나카하라 슌(中原俊), 나스 히로유키(那須博之), 가네코 슈스케(金子修介), 여류 감독 이시이 다카시(石井隆), ‘뚝심의 감독’ 네기시 기치타로(根岸吉太郞), 모리타 요시미츠(森田芳光) 감독 등이 닛카쓰에서 상장했다. 

쇼지쿠의 첫 극장판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3부작

▲쇼지쿠
쇼지쿠(松竹)는 야마다 요지(山田 洋次)감독의 ‘남자는 괴로워’(男はつらいよ)시리즈로 10년을 버텨내면서 1980년대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機動戦士ガンダム)을 극장판으로 내놓는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오리지널은 아니다. TV판 종영 이후 1년 뒤에 나온 3부작 재편집 극장판이다. 다분히 우주전함 야마토(宇宙戦艦ヤマト)의 극장판을 의식한 기획이었다. 

그러나 3부로 갈수록 작화의 수정도 재창조 수준으로 바뀌고SF로서의 완성도가 상당히 높아졌고 더빙, 음악, 편집도 수준급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당연히 기대 이상의 흥행을 가져 왔기 때문에 세편 다 10억엔이 넘는 흥행수입을 올렸으며 특히 3편 ‘해후의 우주’는 23억엔의 흥행수입으로 건담 영화 흥행 1위 자리를 2024년까지 지키고 있었으며 지금도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한편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는 1980년대 25편부터 42편까지 제작하였다. 

영화 '203 고지'(1980)

▲도에이와 도호
쇼지쿠에 비하면 도에이와 도호는 흥행이 될 만한 기획도 세우지 못한 채, 고정 관객에게 예매권 방식으로 관객을 대량 동원하는 영화들만 제작하면서 도산 위기를 겨우 넘기는 수준이었다. 도에이는 8월만 되면 연례 행사처럼 ‘마스다 도시오’(舛田利雄)감독을 통해 옛날 군사 강대국이었던 일본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전쟁 작품들을 주로 만들었다. ‘203 고지’(二百三高地, 1980), ‘대일본제국’(大日本帝国, 1982) 등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 '하코다산'(1977)

도호는 1977년부터 시작하여 1980년대 내내 영웅주의와 비장미를 예찬하는 대작을 연속해서 제작했다. 그 시효는 1977년 모리타니 시로(森谷司郎)의 ‘하코다산’(八甲田山, 1977)을 비롯하여 영웅주의와 비장미를 예찬하는 영화들이 그렇다.. 이 영화는 다카쿠라 켄(高倉健) 주연으로 일본 소설가 닛타 지로의 소설 ‘하코다산의 방황’ (八甲田山死の彷徨)을 원작으로 제작한 영화다. 1902년(메이지 35년)에 아오모리현(青森県)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5연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혹한기 행군 중길을 잃어 210명중 199명이 사망한 사건을 영화화 했다. 

바쓰바야시 슈에 감독

당시 극중 다카쿠라 켄의 “하늘은 우리를 놓쳤다.”(天は我々を見放した)는 대사가 대유행어가 될 정도였다. 이러한 경향은 바쓰바야시 슈에(松林宗惠) 감독의 영화 ‘연합함대’(聯合艦隊, 1981)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영화는 일본 연합함대의 흥망성쇠를 담담하게 다루는 영화이기도 하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후 연합함대는 청나라 함대와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하고 제2차 대전에도 초기 그 위용을 자랑하였으나 미드웨이 해전 이후 전함 야마토(大和)의 침몰 까지를 다루는 대작이다. 

영화 '자토이치'(1989)

인재 양성소 역할을 하던 스튜디오 시스템의 해체는 결국에는 촬영, 조명, 녹음, 미술 등 현장 스텝들의 기술을 계승하는데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또 1989년에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해체를 촉발시킨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배우인 카쓰 신타로(勝新太郎)가 감독한 자토이치(座頭市,1989)의 촬영장에서였다. 검술 장면을 지도하던 스텝이 배우가 휘두른 칼에 죽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당시 현장 조감독의 관리 진행 능력을 포함하여 시대극의 기술 수준이 어떠한 상태였는지 보여주는 실례였다.

남자는 괴로워 25편(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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