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미국 리포트/ 이장호 감독 LA 방문기
생생 미국 리포트/ 이장호 감독 LA 방문기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4.06.03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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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고향’ 50년 ··· 철부지로 산 인생 80년
이장호 감독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영화 감독 이장호(80). 필자가 영화인으로 살아가게 된 모티브를 제공한 감독 중 한 분이다. 그가 LA에 왔다. CBS TV의 '이장호, 누군가를 만나다'와 락스퍼국제영화제(SLIFF)의 조그마한 인연으로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그래서 ‘나이 80’이라는 말이 무색했다. 

스스로를 ‘철부지로 산 80년’으로 규정하면서 ‘별들의 고향 50주년’ 기념상영회와 두 번의 디너쇼 그리고 현재 제작중인 ‘하보우만의 약속’에 관한 미팅을 이어갔다. 이장호 감독은 갓 스무 살에 ‘신필름’을 통해 영화계에 입문했다. ‘제2 연출부’ 출신이었던 그는 29세의 나이에 초등학교 때부터 동창이자 죽마고우인 최인호 작가의 동명 소설 ‘별들의 고향’ 판권을 무턱대고 확보한다. 당시 신문의 연재소설로 아침마다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이후 자신의 영화계 멘토인 신상옥 감독을 따돌리고 좌충우돌로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1974년 단관 개봉시절 국도극장에 올려 무려464,308명의 관객을 불러들였다. 1945년 해방둥이. 그는 명동에 건물을 소유할 정도로 부유했던 할아버지 덕에 유복했고 영화 일을 했던 아버지 덕분에 당대 최고의 영화사인 신필름에 입사했다. 홍대 건축미술학과에 입학했지만 캠퍼스 보다는 술집에서 보내는 날이 더 많아지자 입문한 영화계와의 인연은 평생 이어지고 있다.

영화 '별들의 고향'(1974)과 이장호 감독 필모그래피

▲‘별들의 고향’(1974)
뭐랄까 ‘별들의 고향’을 처음 보았을 때 필자는 충격을 세 번 받았다. 첫 번째는 그 유명한 ‘키스 씬’이다. 당시 현동춘 편집감독은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영화 속 키스 씬을 아예 하나로 묶어 편집한 후 한꺼번에 보여주는 파격을 보여줬다. 한마디로 이장호 감독이 그는 부인하고 있지만 지금도 ‘스타일리스트’로 화자 되게 된 배경이 아닐까 싶다. 

둘째로는 눈발 날리는 눈밭에서 주인공 경아(안인숙 분)가 눈을 한 주먹 쥐어 수면제와 함께 털어 넣은 후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눈발이 휘날리는 한강변 나룻배 한 척에서 유골을 뿌리는 문호(신성일 분)의 모습이 교차한다. 누가 죽었냐는 뱃사공의 질문에 “여자가 죽었습니다.”라는 무미건조한 대답을 한다. 그렇다. 

셋째로 받은 충격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문호’를 제외하고는 경아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했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이기적이고도 성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한 도구로 경아를 바라 볼 뿐이다. 그런 경아가 첫 순결을 바치기 전 여관 화장실에서 바친 기도문은 비장하면서도 간절하다. “절 행복하게 해 주소서. 그이가 절 버리지 않고 영원히 사랑하게 해 주소서...” 이후 경아는 진실한 ‘사랑’에 목말라 하지만 전처를 잊지 못해 그 대신으로 그녀를 취한 만준(윤일봉)과의 결혼에 실패하게 되는데 전처의 죽음과 이혼은 전적으로 ‘의처증’ 때문이었을 거라는 암시를 준다. 

영화 '별들의 고향'(1974) 스틸사진

그리고 만난 동혁(백일섭)은 얼굴은 나오지 않는 조건으로 도색잡지에 얼굴을 싣게 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위력으로 그녀를 학대하더니 호스티스로 번 돈까지 착취한다. 물론 경아가 이런 방황을 마치고 돌아올 곳은 문호뿐이다. 하지만 그 조차 ‘섹스’로 맺어진 인연으로 생각할 뿐 경아가 갈구하는 ‘사랑’이나 ‘결혼’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인지 문호에게 조차 버림 받던 경아의 대사는 나의 폐부를 찔렀다. “무서워요. 또 버림을 받을 까봐. 모른 척 하고 있었지만.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군요.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나면 다 그렇고 그런가 봐요…”. 그래서인지 경아의 생애 마지막 밤, 그녀를 찾아가 만나고 집까지 동행한 문호의 대사는 비록 당대의 유행어지만 의미를 알고 나면 더욱 쓸쓸해진다. 

“오랜만에 같이 누워 보는군.”, “참 오랜만이에요.” 이런 무미건조한 대화를 건넨 건 그녀가 문호에게 동혁의 존재를 들켰을 때 했던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도 전에는 이러지 않았어요. 좋은 남자 만났더라면 지금쯤 행복하게 살았을텐데… 지금은 늦었어요, 늦었어. 한때 나에게서 잠시 위안을 받아요. 하나, 둘 내 곁을 떠나지요… 결국엔 우리가 혼자뿐이라는 것…” 순수하고 착한 영혼의 소유자 경아는 결국 네 명의 남자로부터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어쩌면 스쳐 지나가는 별들에게 그녀는 잠시나마 안식처요, 고향이었을까? 그래서 문호는 “여자가 죽었다”라고만 이야기 하였을까?

▲청춘 영화 붐 그리고 호스티스 멜로의 원조
‘별들의 고향’이 제작될 당시 영화계는 한국 영화 4편을 만들면 외화 1편을 수입하던 시절이었다. 방화의 흥행은 의미가 없었고 3-5천명의 관객만 들어도 ‘본전’이라는 의식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상당수의 영화가 필름을 아끼기 위해 반씩 잘라 촬영하는 변칙 시네마스코프가 성행했는데 영화계에서는 이를 ‘하프 사이즈’로 촬영한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대부분 영화 한 편에 필름을 9.000자 – 10.000 자 정도만 사용했다.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매우 특별한 대우를 받는 감독이 쓰는 필름 양도 3만 자를 넘지 않았는데 그는 화천공사와 계약할 때 ‘후지 보다 코닥으로 필름 3만자’로 조건을 내걸어 관철시켰으니 당시로서는 파격에 가까웠다. 비록 모든 것이 무계획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영화는 성공했다. 사실 그는 배짱 하나로 시작했다. 콘티도 없이 일본의 월간 ‘아사히 카메라’라는 잡지에 나온 근사한 장면들을 스크랩해다가 촬영기사 장석준에게 건네며 찍은 씬 들은 일단 편집실로 가져와 현동춘 편집감독에게 내 던져졌고 때문에 영화는 시종일관 ‘플래시백’(회상장면)이 가득하고 거칠게 편집된 화면으로 매워진다. 

이미 만들어진 필름에 맞춰 제작된 이장희의 영화음악 작업 역시 마찬가지. 그렇게 그는 ‘스타일리스트’라는 애칭을 얻으며 영화계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별들의 고향’은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과 함께 197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영화로 남는다. 이후 ‘어제 내린 비’(1974), ‘너 또한 별이 되어’(1975),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1976) 같은 후속 작들을 만들어내며 청춘 영화 붐을 이끌었으며 ‘별들의 고향’의 영향을 받은 ‘호스티스 멜로 영화’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다. 

영화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 촬영장에서

▲리얼리스트로 다시 출발
‘대마초 사건’으로 2년의 강제 휴식기를 가진 이후 서울의 변두리 개발 지역에서 중국집(안성기), 이발소(이영호), 여관(김성찬)에서 일을 하며 서로를 위로하면서 생활하는 세 젊은이가 모티브인 ‘바람 불어 좋은 날’로 재기에 성공한다. 국민 배우 안성기의 출세작이면서 서울관객 100,228명을 모았다. ‘유지인의 막춤’은 지금도 유투브에서 화자 될 만큼 화제를 몰고 온 작품이며 자본주의의 속물인 면도사 미스유(김보연)의 리즈 시절을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 그는 ‘어둠의 자식들’(1981),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1981),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2), ‘바보선언’ (1983), ‘과부춤’(1983) 등을 연이어 발표했다. 이 작품들 속에는 현실적 타락과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화두가 중심을 잡고 있었다. 또한 당시 허가제로 운영되던 한국의 영화제작사들은 1년에 의무적으로 한국영화를 4편 이상 제작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이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바보선언’이다. 

이 감독은 필자에게 “엉터리 같은 제도 때문에 대충 생각나는 대로 찍고 뒤죽박죽 된 걸 편집하면서 될 때로 되라 하는 식으로 완성했고 단성사에서 외화가 빈 자리에 딱 일주일만 조건부로 걸었는데 이게 또 극장에서 터진 거야. 무려 106,423명이 들었지. 영화라는 것은 참 알다 가도 모를 일이라는 걸 그 때 실감했죠.”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때 비로서 ‘이장호 사단’이 형성되었고 그의 페르소나는 배우 이보희의 몫이었다. 이보희는 ‘바보선언’,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어우동’(1985),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 ‘와이의 체험’(1988) 등 작품을 함께했다. 

영화 '무릎과 무릎사이에서'(1984) 현장에서의 이장호 감독과 그의 페르소나 배우 이보희

▲제작사 ‘판’
그런 그이지만 1985년 영화법 개정으로 누구나 신고만 하면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되자 그도 판영화사㈜를 설립하여 제작에 뛰어든다. 그리고 내놓은 ‘이장호의 외인구단’이 흥행에 성공했지만 이후로는 그렇지 못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작품성에서는 인정을 받았다. 제2회 도쿄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하고 제4회 영평상에서 촬영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지만 흥행과는 거리가 있었다. 

‘와이의 체험’은 모호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고 프랑스 감독 막스 오퓔스(Max Ophuls)의 고전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Letter From An Unknown Woman)를 한국영화로 만든 작품이었음에도 실패했다. 판영화사㈜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인 ‘미스 코뿔소 미스터 코란도’(1989)는 겉만 요란한 오락물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그 이후 직접 제작을 하지 않고 김지미씨의 지미필름이 제작사로 나서 만든 ‘명자 아끼꼬 소냐’(1992)로 재기를 꾀했지만 사할린 현지촬영까지 시도한 대작이었음에도 흥행에 실패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천재선언’(1995)은 그의 즉흥적이고도 재기 발랄한 영화 재능이 더 이상 관객들에게 어필 되지 않는다는 역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야 만 영화다. 그런 그가 오랜 침묵을 깨고 지난 2014년 기독교 영화 ‘시선’을 연출하는데 이마저도 당일 세월호의 침몰로 흥행에 실패하고 이후로는 연출작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LA에 온 것은 단순히 별들의 고향’을 개봉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필자와 이장호 감독

▲하보우만의 약속
그는 현재 공식직함이 많다. 서울영상위원회 위원장,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조직위원장, 락스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직을 병행하면서 영화사 ‘하보우만’의 대표로 지금도 다큐멘터리 영화 ‘하보우만의 약속’을 제작 중이다. 제목이 좀 특이한데 애국가에서 따온 것으로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의 약자라고 한다. 박은주 씨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하며 대한민국의 건국과 경제발전에 기여한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의 업적을 조명하는 영화인데 스토리는 아직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군부독재와 고도의 산업화가 절정 이던 1980년대 우울한 시대상과 물질만능주의가 부른 쾌락에 빠진 졸부들의 어두운 이면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그에게 의외의 작품이기도 하다.  

“흔히들 영화로 기울어진 사회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 같은 영화인들이 다시 일으켜 세우면 되겠지요. 어떤 지도자든 공과 과가 있기 마련이잖아요. 이승만, 박정희 두 분을 둘러싼 괴담을 벗겨내는 작업이 지금까지 관객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돌려드리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인터뷰 말미 거장의 미소 속에서 영화 ‘바람 부는 날’에서 세상을 이겨보겠노라고, 좋은 시절에는 바람불어도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던 세 청년 덕배, 춘식, 길남이 오버랩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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