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1980년대 들어서도 여전히 ‘프로그램픽처’ (プログラムピクチャー)의 명맥을 유지하는 장르가 있었다면 단연 ‘에로영화’였다. 영화관의 매주 프로그램을 채우기 위해 양산되는 영화를 뜻하는 ‘프로그램 픽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가 그의 저서인 ‘일본영화발달사’(日本映畫發達史)에서 언급한 것으로 영화관의 매주 프로그램(program)을 채우기 위해 양산되는 영화로 할리우드에서는 ‘더블 피처’(double feature)라고 불렀다.
따라서 일본영화의 경우 극장에서 구작과 신작을 동시 상영하거나 현대극 1개와 시대극 1개를 사영하는 경우 외에도 타사 영화를 함께 보여주는 혼영(混映), 저 예산 영화 한편을 끼워 상영하는 경우까지 다양했다. 사실 이러한 ‘프로그램 픽처’는 과거 도에이(東映)가 가장 많이 활용하였으나 1980년대 들어서는 ‘에로영화’를 상영하기 위한 방편으로 많이 활용하였다.
그것도 처음에는 ‘자매영화’(姉妹映畫)라는 명칭이 붙기도 했다. 그러나 자매영화라는 호칭은 ‘첨부물’을 연상시키는 뉘앙스 때문에 ‘프로그램 픽처’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프로그램 픽처에 어울리는 신인감독들을 다수 발굴해 낸 것이 바로 닛카쓰(日活)이다.
지난 회에 언급하였던 바 이케다 토시하루(池田敏春), 나카하라 슌(中原俊), 나스 히로유키(那須博之), 가네코 슈스케(金子修介), 이시이 다카시(石井隆), 네기시 기치타로(根岸吉太郞), 모리타 요시미츠(森田芳光) 감독 등이다. 이들은 로망 포르노로 대부분 출발했지만 훗날 ‘독립영화의 반란’을 이끌거나 ‘로망 포르노’의 마지막과 함께 한 인물들이다.
▲이케다 토시하루
이케다 토시하루 감독은 ‘공포’ 혹은 ‘컬트 영화’에 일가견이 있었다. 한국의 팬들이라면 당연히 ‘생령’(生靈, Shadow of the Wraith, 2001)이 떠 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원래 ‘로망 포르노’에서 내공을 쌓은 감독이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도 이즈미 준(泉じゅん) 주연의 ‘천사의 창자 4 - 붉은 춘화’ (天使のはらわた, 1981)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성인물 위주의 장르였지만 ‘로망 포르노’(ロマンポルノ)에도 흥행 보증수표로 불리던 시나리오 작가들이 존재했던 게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 중 ‘이시이 다카시’(石井隆)가 단연 탑이었는데 그가 원작자이면서 각본을 썼으니 당연히 파격적 장면과 작품성이 인정 받았다. 1985년에 일본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한 마에다 요네조(前田米造)가 촬영을 맡았을 정도의 작품으로 강렬한 원색이 시종일관 어우러진 작품이다. 여주인공의 자위장면을 보여주면서도 파격이었던 작품으로 스커트 속을 카메라로 줌 업 하여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파격을 보여준다. 영화감독 ‘소노 시온’(園子温)이 극찬한 바로 그 영화다.
그러나 정작 이케다 토시하루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은 ‘인어전설’ (人魚傳說, 1984)이다. 미야모토 카즈히코(宮谷一彦)의 공포 만화가 원작이며 장르는 범죄, 복수극이며 일명 ‘분노하는 바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마에다 요네조는 몇 안 되는 ‘바다 촬영 전문’ 감독이기도 했다. 제6회 요코하마 영화제에서 이케다 토시하루가 감독상, 시라토 마리(白都真理)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다. 물론 이 영화는 닛카쓰의 제작은 아니고 독립영화사 디렉터스 컴퍼니(ディレクターズカンパニー)의 작품이다. 1982년 6월에 설립된 일본 영화 제작 회사로 기존 대형 영화사의 제약으로부터 자립한, 주로 전작 로망 포르노 출신 감독들에 의해 작가성과 오락성을 양립한 영화 제작의 거점으로서 설립된 회사였다. 하세가와 카즈히코(長谷川和彦)가 대표였다.
일본 독립영화계에 있어서 이 회사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반 원전운동이 시작되거나 소련의 체르노빌 발전소 폭파가 있기도 전에 만들어진 ‘반원전’ (反原電)영화의 효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는 한 어촌마을을 배경으로 원전파와 반원전파간 갈등을 그려낸다. 전반부는 사회 고발형 스릴러물로 흐르지만 극 후반부로 갈수록 호러 무비의 전형으로 간다. 원전 찬성파에게 살해 당한 남편에 대한 복수로 무려 13분간 죽이고 또 죽인다. 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것과 별개로 흥행은 참패한다. 그러나 이후 일본의 영화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아마짱 ‘(あまちゃん, 海女) 때문이다. 관련 영화들과 복수극이 다수 제작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나카하라 슌
나카하라 슌(中原俊)도 연극의 풍미를 살리고 장르를 변주하는 스타일로 주목 받은 감독이다. ‘단지부인’(団地妻) 시리즈도 만들었으며 본 연재에 자주 등장하는 감독이지만 그가 이 시절 내놓은 작품으로는 바로 ‘벚꽃동산’(櫻の園, 1990)이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를 잇는 가교 같은 영화이다. 나카하라 슌 감독은 이 작품을 2008년에 리메이크 하는 저력을 발휘한다.
일본의 여류 만화가 요시다 아키미(吉田秋生)가 1985년부터 1986년까지 하쿠센샤(白泉社)를 통해 만화잡지 월간 라라 (ララ)에 연재한 것을 원작으로 한다. 여자 고등학교 연극부의 안톤 체홉 원작 ‘벚꽃 동산’의 연극 공연 직전까지의 비밀 소동을 중심으로 하면서 소녀들의 복잡한 감정을 애절하게 그린 영화이다. ‘소녀들의 우정’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화려함 대신 섬세하게 그려내 퀄리티 높은 작품으로 인정받아, 제64회 (1990년) 키네마 준보(キネマ旬報) 베스트 원 수상을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2008년 리메이크작이 더 유명한데 가수이자 배우인 ‘후쿠다 사키’(福田沙紀)의 첫 출연작이면서 오스기 렌(大杉漣), 우에토 아야(上戸彩), 쿄노 코토미(京野ことみ), 오오시마 유코(大島優子) 등 낯익은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실 2008년작이 더 많은 호평을 받았다. 평단의 찬사와 대중적 환호를 받으며 요코하마영화제(ヨコハマ映画祭),다카사키영화제(高崎映画祭), 일본아카데미상(日本アカデミー賞)등에서 다수의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였고 그 해 키네마 준보 베스트텐 1위에 선정되었다. 특정 집단 내 다양한 인물들의 개성을 하나하나 살려내는 나카하라 슌의 재능은 최고라 할 수 있다.
▲나스 히로유키
이 감독을 언급하게 된 배경은 바로 이 배우 때문이다. 나카야마 미호(中山美穂)가 등장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나스 히로유키는 ‘데빌맨’(デビルマン, Devilman, 2004)이 한국에는 알려져 있지만 사실 제8회 요코하마 영화제에서 ‘비 밥 하이스쿨’(ビー・バップ・ハイスクール, B bop high school, 1985)로 감독상을 받을 만큼 재능 있는 감독이다. 일본 영화 사상 가장 성공한 만화원작 영화이며 액션 가득한 통쾌 청춘 영화로 6탄까지 만들어질 만큼 큰 인기를 얻었다. 이른바 ‘불량영화’(不良映画)의 금자탑으로 불리 우는 영화이다.
하이틴 영화와는 다른 개념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학교 일진들의 전쟁’을 다룬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고교판 건달 2인조’가 등장하는 영화다. 만년 모범생일 것으로 생각되는 나카무라 토호루(仲村トオル)가 고교 ‘짱’으로 나와 거친 연기를 펼치고 시미즈 코지로(清水宏次朗)가 잘생긴 나머지 ‘짱’ 역할을, 나카야마 미호가 학교의 퀸카(일본에서는 마돈나로 부른다, マドンナ) 교코(今日子)로 나온다. 이 여세를 몰아 2편 ’비 밥 하이스쿨 고교 건달 애가(ビー・バップ・ハイスクール 高校与太郎哀歌, 1986)가 만들어지는데 역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1편 보다 더 강한 고교생 난투극이 등장한다.
▲가네코 슈스케
'오타쿠'(オタク) 출신의 영화감독 1세대로 분류되며 일본 괴수영화의 현대적 버전을 제시한 감독으로 ‘기메라’(ガメラ)시리즈로 유명하다. 한국팬들에게는 ‘가메라: 대괴수 공중 격전’(ガメラ 大怪獣空中決戦, 1995), ‘가메라 2 : 레기온의 습격’(ガメラ2 レギオン襲来, 1996), ‘데스노트’(デスノート, 2006)로 잘 알려져 있다. 지난 2019년 제23회 부천국제영화제에 왔다.
그의 영화 ‘우노 고이치로의 젖은 정사’(宇能鴻一郎の濡れて打つ, 1984)는 당시 인기를 끌던 TV 애니메이션 ‘에이스를 노려라!’(エースをねらえ!)를 패러디 하여 이목을 끈 로망포르노다. 이 영화로 요코하마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그는 1980년대에도 재기 발랄한 로망포르노의 걸작들을 내놓는다. 그러나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같은 해 발표한 두 편의 영화 ‘1999년 여름방학’(1999年の夏休み, 1989)이다.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자살한 소년을 둘러싸고 있는 갈등과 상처로 인한 소년들의 애증을 그린 청춘 판타지이다. 훗날 ‘데스노트’로 발전한 모티브가 되는 영화이다.
‘라스트 카바레’(ラスト・キャバレー, 1989)는 닛카쓰 로망포르노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작품이면서 그 장르의 수작으로 꼽히는 이 영화는 특히 여배우의 개성과 아름다움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담아내 아직까지도 찬사를 자아낸다. 다만 내용은 탐욕스러운 토지 개발업자가 인기 있는 카바레를 폐쇄하도록 강요하자 주인의 딸은 과거를 회상하기 위해 아버지의 옛 여자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인데 이 이야기는 곧 영화 제작이 중단될 닛카쓰 스튜디오 자체의 종말에 대한 은유로 비평가들에 의해 받아 들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