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バブル景気, Japanese asset price bubble)는 1980년대 주식과 부동산 시장 전반에 나타났던 현상을 일컫는다. 비록 일본의 영화는 잠시 주춤했지만 거품 경제의 영향으로 호황기 여러 유통회사들의 영화업 혹은 배급업 진출 덕분에 주옥 같은 ‘프로그램픽처’ (プログラムピクチャー)의 명맥은 꾸준히 유지될 수 있었다. TV 방송국, 상사 유통 기업들까지 진출하였고 비디오와 케이블 TV, 위성방송까지 보급 되었으니 영화 필름을 반복하여 사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급기야는 영상 관련 기업들이 비디오의 저작권을 차지 하기 위해 영화제작에 뛰어들게 되는데 한가지 변수가 등장한다. 프로그램 픽처와 연동되어 있던 각 명화(名畵) 극장들은 차례로 문을 닫고 있었고 이를 대신하여 200석 전후의 작은 영화관을 한 건물 안에 여러 개 설치 한 소위 시네마 컴플렉스(CINEMA COMPLEX, シネマコンプレックス)들이 생겨나면서 영화관들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개성 있는 작품들을 골라서 상영할 수 있었다.
이 10년 동안 도쿄의 극장들은 실험적 유럽 예술영화에서 아시아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동시대 뉴욕이나 파리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영화 도시’로 변모하고 있었다. 또 소극장의 급속한 증가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독자적이고 다양한 영화들을 만들어 상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시이 다카시
이시이 다카시(石井隆)는 영화 감독이면서 시나리오 작가, 만화가다. 그는 여러 핑크 필름(Pink film, ピンク映画)을 감독했지만 가장 주목할만한 작품은 1995년 기타노 다케시(北野武) 주연의 범죄 스릴러 ‘고닌’(5人: Gonin)이었다. 대략 5인의 폭력단이 벌이는 복수극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기타노 다케시의 ‘캐릭터 폭력의 미학’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는 원래 와세다 대학에서의 시나리오 연구회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마르크스주의 학생 운동에 휘말리는 것을 싫어하여 ‘영화연구회’로 옮겨 활동했다. 재학 중에도 훗날 걸출한 각본가가 된 가네코 유타카(金子裕) 등과 어울려 다니며 잡지에 글을 기고하거나 카메라맨으로 참여하는 등 내공을 쌓았다. 1970년 ‘사건극화’(事件劇画)라는 잡지사에서 만화가로 데뷔 후 ‘천사의 창자’(天使のはらわた) 시리즈로 인기를 얻다가 직접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하더니 나중에는 직접 감독이 되어 연출하게 된다.
‘천사의 창자’시리즈는 1978년에서 1994년까지 총 6편이 영화화 되었다. 그 중 두 번째 편인 ‘천사의 창자: 붉은 교실’(天使のはらわた 赤い教室, 1979)은 요코하마 영화제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 받았고, 로망 포르노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영화다. ‘천사의 창자’는 이시이 다카시를 성공시킨 출세작이다.
원작 만화를 그리고 각본가를 거쳐 감독까지 되었으니 더욱 그렇다. 1편 ‘천사의 창자 – 여고생’ (女高生 天使のはらわた, 1978), 2편 ‘천사의 창자: 붉은 교실’, 3편 ‘천사의 창자 – 나미’ (天使のはらわた - 名美, 1979), 4편 ‘천사의 창자 - 붉은 춘화’ (天使のはらわた 赤い淫画, 1981), 5편 ‘천사의 창자 - 붉은 현기증’ (天使のはらわた 赤い眩暈, 1988), 6편 ‘천사의 창자 - 붉은 섬광’ (天使のはらわた 赤い閃光, 1994)이 바로 그것이다. 이중 이시이 다카시는 5편 ‘천사의 창자 – 붉은 현기증’으로 감독 데뷔한다.
'천사의 창자' 시리즈는 모두 강간당하는 여자들을 다루고 있다. 이중 이시이 다카시는 6편 ‘천사의 창자 – 붉은 섬광’도 연출하는데 극과 극을 모두 경험하게 된다. ‘붉은 현기증’이 평균 이하의 제작비를 투여하여 짧고 강렬한 작품을 만들어야 했었다면 ‘붉은 섬광’의 경우에는 시리즈 중 가장 많은 예산을 들여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 ‘로망 포르노’의 피날레를 장식하였다.
그는 상복이 많아서 데뷔작부터 오사카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고, 1992년 ‘죽어도 좋아’(死んでもいい)로 키네마준보 각본상, 테살로니키영화제 최우수감독상, 토리노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을, 1993년에는 ‘누드의 밤’(ヌードの夜, 1993)으로 선댄스영화제 도쿄 그랑프리, 다카사키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강간, 살해, 복수, 뒤틀린 사랑 등을 반복적으로 다루며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웠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검은 천사’(黒の天使 1, 2, 1998/1999) 역시 여전사 캐릭터를 부각시켜 주목 받았다. 그러나 그는 ‘SM’(사도 마조히즘)의 대가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감독이다. ‘꽃과 뱀’(花と蛇, Flower and Snake, 일본, 2004, 2005)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네기시 기치타로
역시 와세다대 출신인 네기시 기치타로(根岸吉太郞)는1980년대 뉴에이지 영화의 선두주자로 주목 받았다. 그는 종종 독특한 스타일로 국제적으로 인정 받지는 못했지만 종종 배우들의 강렬한 연기를 이끌어내는 미묘한 감독이라고 불렸다. 1974년 닛카쓰(日活)에 입사하여 로망포르노 감독으로 경력을 시작하였으며 데뷔작인 1978년 에로틱 스릴러 ‘오리온의 살의: 정사의 방정식’(オリオンの殺意より: 情事の方程式)이 성공하면서 화려한 출발을 하였다.
이러한 출발의 배경에는 그의 스승이면서 로망포르노의 선구자 ‘소네 주세이’(曽根中生)가 있었다. 1981년에는 ‘멀리서 치는 천둥’(遠雷)으로 ATG에서 제작한 이 영화는 근대화에 저항하는 소신 있는 농부를 다룬 진지한 휴먼드라마로 그 해 요코하마영화제 감독상을 비롯하여 블루리본상 감독상, 예술선장 신인상을 수상하여 실력파 감독으로 인정 받는다.
물론 한국에서는 ‘눈(雪)에게 바라는 것’ (雪に願うこと, 2005)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알고 보면 총 8편의 로망포르노를 연출하였다. 닛카쓰 로망 포르노 ‘여교사 시리즈’의 네 번째 영화 ‘여교사: 더럽혀진 방과 후’(女教師 汚れた放課後, 1981)로 이 시리즈 사상 최고작이라는 평가를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모두 얻어냈다. 영화 감독뿐만 아니라 1988년에는 ‘푸른 산호초’(青い珊瑚礁)로 유명한 마츠다 세이코(松田聖子)의 무대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되었고 1993년부터는 나카지마 미유키(中島みゆき)의 ‘야회’(夜會) 시리즈 등 가수들의 뮤직비디오와 CF로도 그 영역을 넓혀 나갔다.
‘눈에게 바라는 것’의 경우에는 일본 내에 영화상을 거의 독식했는데 제18회 도교국제영화제에서 4관왕을 차지했다. 냉혹한 ‘경마’의 세계에서 현대사회의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애잔하게 그리는 나루미 쇼우(鳴海翔)의 소설 ‘만마’(輓馬)를 영화화했다. 특별히 ‘반에이 경마’(輓曳競走)를 통해 인생을 이야기한다. 반에이 경마는 그 옛날 만마(무거운 짐을 끄는 말)들이 짐들을 지고와 홋카이도를 개척한 역사적 상징성을 지녀 보통 경마와 달리 '스피드'를 겨루지 않는다. 이 영화가 주는 힐링은 대단했다. 이처럼 네기시 기치타로는 배우들에게서 최상의 연기를 뽑아내는 탁월한 연기 연출로 명성이 높은 감독이다.
▲모리타 요시미츠
모리타 요시미츠(森田芳光)감독은 멜로, 코미디, 호러 등 서로 다른 장르 문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동시에 당시 일본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날카롭게 직시해 주목을 받았다. 동시대 일본의 가족 구조에 관한 신랄한 풍자극 ‘가족게임’(家族ゲーム, 1983)에 대해서는 이 글 연재에서 1980년대를 시작하면서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일본대학(日本大學) 예술학부 방송학과에 들어가 홀로 8mm 영화 제작에 몰두할 만큼 학창시절부터 영화에 심취 되어 있었다.
1960년대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실험영화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라이브 인 치가사키’(ライブイン・茅ヶ崎, Live in Chigasaki, 1978)로 주목 받아 주류 영화계에 데뷔할 기회를 얻게 된다. 워낙 단편 영화로 내공을 쌓은 까닭에 당대 독립영화계에서는 이름이 잘 알려진 감독이기도 했다. 그 뒤 두 편의 영화 ‘두근거림에 죽다’(ときめきに死す, 1984), ‘메인 테마’(メイン・テーマ, 1984)는 비록 실패했지만 1985년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원작소설 ‘그 후’(소레카라, それから)를 영화화하여 일본 아카데미상 5개 부문을 수상한다.
영화 ‘그 후’는 한국의 많은 감독들에게 문예영화 혹은 예술영화의 교과서적인 연출기법으로 영향을 끼치는데 롱테이크, 롱 쇼트 등 형식과 스타일이 돋보였고 시대적 맥락과 정교한 미장센 그리고 뛰어난 세트와 미술이 영화의 작품성을 업그레이드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1980년대 모리타 요시미츠는 다작(多作)을 한 감독이기도 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은 영화를 연출하였다. 광고회사에 관한 코미디 영화인 ‘소로방주쿠’(そろばんずく, 1986)와 야쿠자 영화 ‘슬픈 색이군’(悲しい色やねん, 1988), 풍자극 ‘사랑과 헤이세이의 색남’(愛と平成の色男, 1989), 그리고 요시모토 바나나(よしもと ばなな)의 원작을 영화화한 ‘키친’(キッチン, 1989) 등의 영화를 잇따라 내놓는다. 1980년대 변화된 일본 영화 제작 환경의 수혜자라고 까지 불리워졌던 그는 그 기회를 잘살려 많은 영화를 내놓는다.
그는 61세라는 비교적 짧은 나이에 c형 간염에 의한 ‘급성간부전’으로 사망했지만 건강이 허락되었다면 더 많은 작품을 제작했을 수 있는 역량 있는 감독이었으며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도 잘 적응했던 영화인이기도 했다. 새로운 트렌디에도 매우 민감하여1996년에는 온라인 로맨스를 그린 ‘하루’(ハル, Haru)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모리타 요시미츠는 비록 ‘로망 포르노’로 수업을 받은 감독이었지만 연출가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테크닉을 배웠다고 술회했을 정도였으며 다음 세기의 일본영화를 이끌어나갈 인재로 평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