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경제학(80)/ 인디 영화를 넘어 자주영화로(1)
이훈구의, 일본영화경제학(80)/ 인디 영화를 넘어 자주영화로(1)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4.08.07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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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장에서의 소마이 신지 감독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1980년대에도 여전히 인디영화(독립영화)들은 생산되고 있었다. 다만 그 범위가 8mm 인디 영화로 국한된 경우도 있었고 다큐멘터리와 극 영화를 돌아가면서 연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쩌면 ‘새로운 도약’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1980년대의 인디영화들은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 올 정도로 기초가 잘 닦인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필자는 ‘일본 인디영화 컬렉션’ DVD 세트를 2개나 한국에서 구매하는 호사를 누린 적이 있다. 덕분에 2000년대 들어서 제작된 우수한 인디영화들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유서 깊은 '극단 시키'의 상설극장

196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일본의 인디영화는 ‘기록영화계의 전설’ 하라 가즈오(原一男)와 다카미네 고(高嶺剛), 오가와 신스케(小川紳介) 등이 선구자였다면 8mm 인디영화 운동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오오모리 카즈키(大森一樹), 나가사키 슌이치(長崎俊一), 이마세키 아키요시(今關あきよし), 소마이 신지(相米慎二), 데즈카 마코토(手塚眞), 야마모토 마사시(山本政志), 이시이 소고(石井聰瓦), 이마티 주조(伊丹十三), 사와이 신이치로(澤井信一郎), 탐정 영화의 전설이자 재일교포 3세였던 하야시 가이조(林海象), 그리고 역시 재일교포였던 최양일(崔洋一 )등이었다. 이중 소마이 신지 감독은 워낙 공헌도가 커서 현재 ‘소마이 신지 영화 축제’(相米慎二監督映画祭)가 9회째 개최 될 정도다.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 스틸 사진
제8회 소마이 신지 감독 영화 축제 포스터

이들 중 일부는 닛카쓰(日活) 로망포르노(ロマンポルノ)계에서 활동할 때 필명(筆名)으로 (로망포르노)시나리오를 쓰고 심지어 출연을 한 경우까지 있었다. 또한 메이저 영화사에서 독립하여 여러 영화에서 조감독을 거친 후 1980년에 당대 스타를 주연으로 한 일명 ‘아이돌 영화’ (アイドル映画)로 본격 데뷔한 경우도 있었다.

더러는 미국의 평론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말을 빌자면 ‘민족적 알레고리’의 실례 라고 하여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의적(義賊)들의 이야기나 사회적 이슈들을 다루었고 일본 내 소수민족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영화들에는 예외 없이 일본 표준어 자막을 넣어 주었다. 물론 1980년대에는 영국의 웨일즈(Wales), 프랑스의 부르타뉴(Bretagne), 대만 등 여러 나라에서 소수민족에 대한 영화들이 제작되던 시기였다. 

종합 매거진 '피아'

▲피아(ぴあ, PIA)
‘피아’는 당시 공연문화 정보지를 발간하던 회사로 인디영화들의 활성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처음 공연정보와 시간, 티켓 구매를 돕기 위한 이해로 시작한 이 회사는 성장하여 훗날 미디어그룹 '피아'(PIA)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극단 시키’(劇団四季)와 예약시스템을 최초로 개발하기도 한 회사이다. 이 ‘피아’가 발행하는 문화예술정보지 '주간 피아'(毎週 ぴあ)는 영화작품들에 대해 출구조사를 실시 관객들의 만족도를 발표했으며 이 순위를 요미우리 신문(讀賣新聞) 같은 일간지들이 인용하여 보도를 하면서 명성을 쌓게 되었다. 

피아는 매주 신작 영화의 공개 첫날 영화관람을 마친 관객들을 상대로 작품에 대한 감상과 평을 직접 조사해 왔다. 이들은 더 나아가 영화제를 주최하고 인디영화 운동을 지지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아이러니한 일도 일어났다. 그들이 8mm 영화를 만들려고 한 시대는 이미 8mm 촬영용 기자재와 필름 생산이 거의 중단되어 비디오 영화로 이행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나가사키 순이치 감독

또 이때는 앞 다투어 감독으로 추대 되었던 유명인들이 한 작품만 만들고 물러나 다음 작품으로까지 이어진 경우가 극소수이던 시기이다. 이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기타노 다케시(北野武), 만도 다마사부로(坂東玉三郎), 다케나카 나오토(竹中直人) 등으로 이들은 1990년대에도 인디영화계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피아’는 영화제까지 개최했다. ‘피아 필름 페스티벌’(Pia Film Festival, ぴあフィルムフェスティバル, 약칭 PFF)이 바로 그것이다. 

‘피아’는 1977년에 일반 개봉관에서 보기 힘든 영화와 잡지를 통해 공모한 인디영화를 상영하는 이벤트 ‘피아전’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81년부터 피아 필름페스티벌로 개칭한 이후 메인 프로그램은 응모자격에 아무런 제한이 없는 자유로운 경쟁부문을 통해 신인 감독들의 등용문으로 자리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유명한 감독들은 너무나도 많다. 모리타 요시미츠(森田芳光), 구로사와 기요시(黒沢清), 츠카모토 신야(黒沢清), 후루마야 도모유키(古厩智之), 야구치 시노부(矢口史靖) 등이 그렇다. 피아영화페스티벌에서는 영화제의 지원으로 제작 완성된 작품을 상영하고 신인감독의 등용문이 되어 주면서 작품의 다양성과 장르의 다변화에 공헌하였다. 

오가와 신스케 감독

알찬 프로그램으로 영화의 창작자와 수용자 모두에게 일본 영화의 미래를 낙관하게 만들어준다는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다큐멘터리도 소개하고 세계적 거장들인 마틴 스코시즈(Martin Scorsese), 조지 루카스(George Lucas), 데이빗 린치(David Lynch), 파트리스 르꽁트(Patrice Leconte), 에미르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감독 등의 초기 중·단편영화도 소개 하는 등 기여하고 있다. 

▲자주영화(自主映画)
80년대 일본영화의 혈맥을 이어준 것은 단연 비주류영화들이었다. 70년대 자주영화 운동을 통해 나가사키 슌이치, 오오모리 카즈키, 야마모토 마사시, 데즈카 마코토 감독 등이 등장하였다. 이 명맥이 80년대에도 이어져 내려 오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일본의 인디영화계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지기도 했지만 ‘제작 시스템의 정착’이라는 성과도 만들어 냈다. 

요즈음만 하더라도 연간 300여 편 이상의 영화가 제작되는 일본영화계에서 메이저 영화사들은 직접제작 영화 보다 부분투자 영화와 전국에 걸친 자사 라인 극장의 배급업무에 집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다양한 색깔을 가진 독립제작사의 활동이 일본영화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국영화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러한 인디(독립, 자주)영화들을 개봉 할 수 있는 구조가 잘 되어 있어 그 저력을 실감한다는 것이다. 

다카미네 고 감독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감독의 ‘우나기’(うなぎ, 1997)와 베니스국제영화제 금사자상을 받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하나비’(花火, 1997) 등이 모두 일본 인디영화 제작 시스템하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두 영화 모두 당대 일본 사회의 ‘무력한 남자’라는 소제를 다뤘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국제적으로 성과를 냈다는 점이다. 특히 ‘하나비’의 경우 한국에서 개봉된 최초의 일본영화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끊임없이 재생산 되는 '사다코' 영화들

일본의 ‘인디영화’는 그 자체로 주류 일본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작가적, 상업적으로 광범위한 영역에 두루 걸쳐 있다. 이러한 일본 인디영화의 오랜 전통은 최근까지 이어져 유키사다 이사오(行定勲), 이누도 잇신(犬童一心), 이상일(李相日), 야마시타 노부히로(山下敦弘) 등의 새로운 감독들이 일본영화계를 이끌게 되는 기본 바탕이 됐다. 따라서 일본 영화계를 메이저와 인디로 구분하기보다 큰손을 뜻하는 '大手'(오오테)영화사’와 그보다 작은 군소 제작사 등 그 규모를 보고 이야기 하는 것이 옳다. 

최양일 감독의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1985)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일본의 인디영화는 감독 개인이 제작비를 충당하는 ‘자주영화’와는 또 결이 다르다. 일본의 영화계는 독립제작방식과 메이저 배급 시스템을 넘나드는 일본의 청춘 스타들이 등장하는 상업적인 영화라는 견해가 맞을 것이다. ‘일본 인디영화 컬렉션’ 시리즈만 봐도 탑 스타들이 부지기수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적은 예산과 만화, 베스트셀러 소설, TV 드라마를 리메이크하며 다양성과 상업성 거기에 국제 영화제 도전까지 가능한 일본 인디영화들은 자국 영화시장 활성화는 물론 생태계를 강화시키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제제 다카히사 감독

스튜디오 시스템이 무너졌지만 자주 영화 시스템까지 살아 있는 것이 일본영화의 현주소이다. 자주 영화는 저 예산이지만 창작자에게 무한한 자유가 부여된다. 그 전통 하에서 하마구치 류스케(濱口竜介), 미야케 쇼(三宅唱)같은 감독이 등장했고 그들은 현재 일본뿐 아니라 세계 영화를 이끄는 거장들이 되었다.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고 있는 젊은 시네아스트가 계속 등장하는 것이다. 인디영화를 넘어 아예 구애 받지 않고 영화를 만드는 ‘자주영화’ 제작 시스템까지 구축된 일본영화계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라는 상황 하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영화는 곧 ‘돈’ 이라는 항간의 상식을 뒤엎어버리는 현상을 가져왔다. 이 모든 토대가 1980년대에 심기 시작하여 1990년대에 맺은 열매들의 결과다.

하라 가즈오 감독

▲상업적 가능성이 무기
개성 있는 감독들을 대거 배출해낸 일본 인디영화나 자주영화의 강점은 무엇보다도 상업적 가능성이다. 장르 문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도 스타를 끊임 없이 배출해낼 줄 아는 일본 인디영화는 현재 쇠퇴기를 넘어 기나긴 ‘겨울잠’에 들어선 한국영화계에 주는 시사점이 있다. 혹자는 일본 인디영화의 두 가지 뛰어난 발명품을 벤치마킹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1980년대 최고의 아이돌 스타 '마츠다 세이코'

그 두 가지란 ‘사다코’ (貞子)라 불리는 머리 풀어헤친 귀신과 꽃 미남, 꽃 미녀로 이뤄진 청춘 스타 군단들이다. ‘J호러’와 일본 청춘영화라는 장르명으로 바꿔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인디영화가 예술과 상업성을 적절하게 섞어 왔다. 아마도 1980년대에서 1990년대 KBS TV의 ‘전설의 고향’에서 해마다 누가 ‘구미호’를 맡느냐가 화제가 되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젊은 배우들 역시 폭넓은 작품 선택의 스펙트럼을 갖고 각종 인디영화와 자주영화에 등장하고 세계 영화제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독립영화라고 해서 지루할 거 라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고 상업적 가능성을 무기로 한 일본의 인디영화는 이처럼 긴 역사를 갖고 있으며 수많은 스타들과 감독들을 양산해 내는 성과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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