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계속>
오사카증권거래소가 도쿄증권거래소에 흡수합병 되기는 했지만, 금융거래 역사로 보면 그 ‘정통성’은 오사카쪽에 있다. 에도 시대 당시, 오사카에는 거상 요도야(淀屋) 가문이 있었다. 이 가문은 ‘요도야 쌀시장’을 만들어 선물시장을 형성했고, 이는 일본 거래소의 시초가 되었다. ‘거상들의 시대’(와키모토 유이치 저, 강신규 옮김, 한스미디어, 2008년)라는 책은 오사카가 금융, 상업도시로 성장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오사카가 다른 도시와 뚜렷한 차이가 생기게 된 한 원인은 막부의 경제정책에 있었다. 무역 권익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막부는 유일한 국제도시인 나가사키와 연결하는 전국시장을 국내에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점 찍은 곳이 세토 내해의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는 오사카였다.>(‘거상들의 시대’ 90쪽 인용)
책은 요도야 가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초기 거상들 중에서 다소 특이했던 사람은 일본 최고의 거상이었던 요도야 가문이었다. 1대조인 요도야 조안은 요도가와 강을 개수하여(분로쿠 제방 건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은 다음, ‘오사카 전투’가 벌어졌을 때에는 조립식 병영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바치는 등 약삭빠르게 말을 갈아탔다.(중략) 요도야 조안은 막부로부터 저습지인 나카노시마 개발을 허락 받았다. ‘조안 마치’라 하여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지명도 남아 있다. 오사카 대학 주변이다. 요도야 조안이 개발한 나카노시마는 나중에는 여러 영지의 창고저택이 들어서 ‘천하의 경제도읍’ 오사카의 심장부가 되었다.>(같은 책 91쪽 인용)
요도야 조안의 가업은 2대인 요도야 고안에게 이어졌다. 그는 오늘 날의 ‘오사카 3대(大) 시장’을 만들었다. ‘요도야 쌀시장’을 열었고, 쌀 거래를 활성화 하기 위해 요도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요도야 쌀시장은 이후 도지마 쌀시장으로 발전했다. 도지마는 현재 오사카의 중심 상업지역이다.
요도야 조안은 또 나루터에 해산물과 비료인 정어리기름을 취급하는 시장(에코노시마 어시장으로 발전)을 열었고, 자신의 집과 가까운 교바시 1번지에는 야채 시장(덴마 야채시장으로 발전)을 열었다.
책은 “천하의 경제도읍을 이끌어낸 3대 시장은 요도야 고안이 상인으로서의 재치를 발휘했기 때문에 시작될 수 있었다”며 “오사카 발전의 밑바탕을 쌓은 최고의 공로자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했다.
요도야 고안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각 지방(번) 영지의 창고저택이 오사카에 모여들도록 했다. 창고저택(쌀 저장고)과 쌀값 변동을 이용해 전국 유통시스템을 새롭게 정비했던 것이다.
하지만 에도가 중심인 막부는 돈이 오사카로 몰리는 것과 쌀값 하락으로 거둬들이는 수입이 줄어드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책은 “도쿠가와 요시무네(막부의 8대 쇼군)는 어떻게 하든 오사카로 보내는 쌀을 줄이고자 온갖 조치를 취했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쌀값 통제를 단념했다. 책은 “1730년 8월, 마침내 도지마에서 ‘장부상 쌀거래’, 즉 선물거래를 공인했다”며 “통제에서 시장에 맡기는 방향으로 전환한 것”이라고 했다. 책은 이렇게 쓰고 있다.
<세계에서 다른 나라 보다 100년 이상 앞선 선물시장이 생긴 것이다. 세계 최대의 ‘시카고 상품거래소’ 편람에는 ‘선물거래는 오사카가 발상지’라고 적혀 있으며,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시카고 대학의 교수가 도지마 쌀시장의 기념비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오사카를 방문하기도 했다. (중략) 막부 말기까지 연간 150만 섬이나 되는 쌀이 오사카로 올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과 도지마는 상품시장뿐만 아니라 금융시장으로서의 기능도 수행하게 되었다 >(같은 책 330,332쪽 인용)
<에디터 이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