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열전/ 아사히 맥주를 구한 남자②
CEO 열전/ 아사히 맥주를 구한 남자②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18.11.01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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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 계속>

무라이 쓰토무가 아사히 맥주에 점령군으로 들어갔을 당시, 노조는 크게 반발했다. 처음 출근 한 날 노조원들이 막아서며 ‘은행가가 뭣 때문에 왔느냐, 돌아가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아사히 맥주 명예고문을 지낸 나카죠 다카노리(中條高徳)는 경영잡지 ‘기업가구락부’에 “무쓰이씨는 조직 점령군으로서의 접근이 노련했고 ​​자연스러웠다”(組織に対する占領軍からのアプローチが巧みで、自然なんです。)고 회고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라이씨는 모든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장 취임 파티 때 ‘무라이씨, 당신이야말로 새로운 제품입니다’라고 말하는 신문기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원문: 村井さんはみんなを惹きつける不思議な魅力のある人でした。社長就任パーティの時、「村井さん、あなたこそが新製品ですよ」と言った新聞記者がいたそうです。)

무라이 쓰토무가 경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가장 중점을 둔 것은 ‘현장’이었다. 이른바 ‘현장주의’다. 경영인 전문 인터뷰어인 오오츠카 히데키(大塚英樹‧67)씨는 10월 31일, 시사매체 슈칸겐다이(주간현대)에 ‘무라이 쓰토무의 현장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

<‘회사의 운명은 현장에서 결정된다’고 했다. 무라이씨는 먼저 공장, 지사, 지점 등 현장을 적극적으로 돌며 직원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경영자와 직원 사이의 ‘얼굴과 얼굴의 커뮤니케이션’을 반복했다. 경영자와의 ‘장’(場)을 공유하면서 직원들의 동기 부여는 높아졌고, 그것은 도전적인 제품 개발과 사업의 고효율화로 나타났다. 무라이씨는 경영 개혁을 단행했고, CI(기업 아이덴티티)를 도입해 히트 상품을 내놓았다. 1986년 발매한 고쿠키레비루(コクキレビール)였다. 거기에서 아사히의 부활이 시작됐고, 1987년 ‘수퍼 드라이’의 발매로 이어졌다.>

고쿠키레비루(コクキレビール)에서 ‘고쿠’(コク)는 풍성함, 키레(キレ)는 산뜻함을 뜻한다. 기존맥주는 사람들이 쓰다고만 느꼈다. 이 쓴맛에 2가지 맛(고쿠와 키레)을 추가한 것이다. 고쿠키레비루의 맛을 좀 더 개선해 시장에 내놓은 것이 ‘수퍼 드라이’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드라이 맥주 전쟁’이 불붙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카죠 다카노리는 ‘기업가구락부’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 당시 ‘생생함이야말로 맥주의 생명’(生こそ命)이라는 구호 아래, 수퍼 드라이를 개발했고, 이 제품을 내세워 마침내 1998년 맥주 부문(발포주 제외)에서 기린을 제치고 시장 점유율 정상에 올랐다. 이것은 산업 역사에 길이 남을 영광스러운 기적이었다.>

(원문: この時「生こそ命」のかけ声のもと、スーパードライを開発、同商品を押し立てて、ついに98年度のビール部門(発泡酒を除く)でキリンを抜きシェアトップに立った。これは産業史に残る輝かしい奇跡である。)

1986년 아사히 맥주 대표이사 회장에 오른 무라이 쓰토무의 경영 보폭은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인 1987년에는 민영화로 출범한 JR서일본(서일본여객철도)의 초대회장을 맡았다. 그러면서도 아사히 명예회장(1992년), 아사히 명예고문(2001년)직을 이어갔다.

우리가 편의점이나 수퍼에서 흔히 고르는 아사히 맥주의 ‘수퍼 드라이’는 무라이 쓰토무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꼭 10년 전인 2008년 10월 31일, 그는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90세였다. <에디터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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