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경 발상지에서 벌어진 '어부 떼죽음'
포경 발상지에서 벌어진 '어부 떼죽음'
  • 김재현 기자
  • 승인 2018.12.27 2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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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 상업적 포경 재개 선언

내년 7월부터 공식적인 고래잡이

일본 정부가 상업 포경을 재개한다고 26일 밝혔다. 고래 남획 방지를 위한 국제기구인 국제포경위원회(IWC) 탈퇴를 선언한 것. 일본이 IWC에 가입한 건 1951년. 1988년부터 표면상으로는 포경 금지를 지켜왔지만 ‘연구 목적 포경’이라는 명분으로 고래잡이를 계속해왔다.

이번 IWC 탈퇴 선언에 따라 일본 수산업계는 내년 7월부터 일본 영해와 배타적경제수역에서 30년 만에 다시 상업 포경을 하게 된다.

일본 포경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와카야마현에 있는 다이지(太地) 마을이다. 키이(紀伊)반도 남쪽에 위치한 이 마을은 일본 포경 발상지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 다이지는 ‘쿠지라 쵸’(고래 마을)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고래들을 좁은 만으로 몰아넣어 작살로 죽이는 다이지의 잔인한 고래잡이 방식은 그동안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아 왔다.

이번 포경 재개 선언은 정치적인 영향력이 작용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다이지 마을이 속해 있는 와카야마 현은 자민당의 유력 정치인인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간사장의 지역 기반이다.

그는 자민당 파벌의 수장이기도 하다. 니카이 간사장은 정부의 발표 이후 포경 재개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는 과거 자민당 본부 식당에 고래 요리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뿐 아니다. 아베 신조 총리도 포경이 뿌리 내린 야마구치 현 시모노세키가 지역 기반이다.  

일본 포경 역사와 관련, 재팬올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조난사고와 다이지 마을의 고래잡이 방식을 들여다 봤다

포경 발상지 다이지 마을에서 어부 떼죽음

좁은 만에서 작살로 고래잡는 방식 비난

1878년 12월 24일 오후, 고래잡이로 유명한 와카야마현의 다이지(太地) 마을에 비보가 전해졌다. 고래잡이 나간 어부 100여 명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던 것. 당시 어부들은 한겨울 추위속에서 아침 4시부터 다음날 아침 10시까지 무려 30시간 동안 고래들과 사투를 벌였다고 한다. 참고래라는 세미쿠지라(背美鯨) 녀석들과 말이다. 몸 길이 15~20m의 세미쿠리자는 등(背) 곡선이 아름답다(美)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어부들은 사투 끝에 간신히 고래들을 잡았지만 항구로 귀항할 수 없었다. 악천후 때문이었다. 배는 오히려 바다 안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살기 위해서는 잡은 거대한 고래를 배에서 떼어낼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 배들은 쿠로시오 본류에 휘말려 어부들은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출항 7일 만에 표류한 생존자 13명이 살아 돌아왔다. 사망자는 무려 100명이 넘었다. 대참사였다. 이 사고는 세미쿠지라를 잡다가 발생했다고 해서 ‘세미 나가레’(背美流れ) 또는 ‘오세미나가레’(大背美流れ)라고 불린다. 사고 여파는 컸다. 270년간 이어져 오던 다이지 마을의 포경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이는 일본 포경업의 종말을 의미했다.

그럼, 다이지는 왜 포경 발생지로 불릴까. 다이지에서 포경 역사는 16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경업은 이곳의 호족인 와다요리모토(和田頼元)라는 사람에 의해서 시작됐다. 그는 고래잡이의 시조로 불린다.

일본 열도의 영주들이 패권을 다투던 전국시대가 끝이 나자 평화가 도래했다. 그러면서 군대의 수군은 전쟁에 나갈 수가 없게 됐다. 한 마디로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신규 개척사업의 하나로 시작된 것이 포경이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와다요리모토다. 그는 수군의 전투 기술을 기반으로 조직적인 포경법을 개발했다.

노 젓는 작은 배 몇 척으로 팀을 이뤄, 고래를 좁은 만으로 몰아 넣은 후 작살로 포획하는 잔인한 방법이었다. 이런 작살 시스템을 사시테구미(刺手組)라고 부른다. 작살조는 쇠를 두드리는 등 돌고래가 싫어하는 소리를 만들어 수십 마리의 고래들을 만으로 몰아 넣었다. 푸른 바다는 일순간 핏빛으로 변했다.

와다요리모토가 탄생시킨 이 새로운 포경법은 그의 손자에 이르러 절정을 맞았다. 이 손자는 영주로부터 다이지라는 성(姓)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마을 이름 다이지(太地)는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매년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작살로 고래를 잡던 다이지 마을의 전통은 그렇게 270년 간 이어져 오다가 초대형 해난사고로 멈췄다. 다이지 마을이 다시 포경업으로 성황을 누린 것은 러일전쟁 직후다.

근대적인 대자본에 의한 포경 기지가 생기고, 원양 포경선도 건조됐다. 포경총을 사용한 연안 포경은 메이지 시대 말에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원양 포경은 국제포경위원회(IWC)를 중심으로 규제가 진행되면서 이후 상업포경은 서서히 금지됐다.

그런 가운데, 다이지는 일본에서 대규모 몰이식 포경을 하는 유일한 마을로 남게 됐다. 다이지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고래 고기를 일본의 전통적인 식문화라고 주장한다.

태평양 전쟁 이후 먹거리가 부족했던 일본인들에게 고래 고기가 중요한 단백질원이었다는 것이다. 고래 고기는 일본 전역에서 연간 약 20 만톤이 소비됐지만 상업 포경이 중단된 이후 수천 톤대로 격감했다.

<김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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