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입에 털어넣기... ‘원샷’은 이렇게 생겨났다
한 입에 털어넣기... ‘원샷’은 이렇게 생겨났다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19.01.11 18: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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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했지만 승리가 아니었다. 승장이었지만 결코 승장도 아니었다. 휘하 병력 6만명이 살아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중엔 자신의 두 아들도 있었다. 러일전쟁(1904~1905)에 참전한 일본 육군 대장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1849∼1912) 이야기다.

노기 대장은 러일전쟁에서 이긴 7년 후인 1912년 9월 13일, 할복했다. 그가 목숨을 끊은 날은 메이지 일왕의 장례일이었다. 노기는 이날 일왕의 사진이 걸린 방에 정좌해서는, 일본 군도로 배를 갈랐다. 아내도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손으로 단도를 꼭 잡고 앞으로 꼬꾸라져 자결했다.

메이지 일왕을 따라 자살한 노기 대장을 일본인들은 ‘충성심의 상징’으로 여겼다. 러일전쟁에서 병력 13만명 중 6만명 가량을 희생시키고도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는 이유다. 그가 자결하자 전국 각지에 추모 신사가 세워질 정도였다.  

노기 장군은 맥주를 무척 좋아했다. 술을 단숨에 비우는 ‘원샷’ 즉 ‘잇키’(一気:イッキ)라는 말을 일본에 처음 유행시킨 주인공이 그였다고 한다.

그가 맥주를 사랑하게 된 계기는 독일 유학 시절이었다고 한다. 1885년 육군 소장으로 승진한 노기는 2년 뒤인 1887년 군 편제 등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떠났다. 1년 반 남짓 독일에 머물렀던 그는 독일 맥주, 특히 라거(lager)에 빠져들었다.

 노기 마레스케 육군 대장
 독일 유학후 환영식에서
 한입 털기 원샷(one shot)외쳐

‘맥주, 문화를 품다’라는 책을 쓴 일본 맥주 전문가 무라카미 미쓰루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일본 육군은 (보불전쟁에서) 무적의 프랑스 육군을 격파한 프로이센(독일) 육군에 매료되어, 수많은 군인을 독일로 유학 보냈다. 이중엔 노기 마레스케 장군도 있었다. 노기는 귀국 후, 프로이센 육군식 맥주 마시는 법을 연대(連隊)에 유행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한입 털이’(one-shot)의 뿌리가 되었다.”

노기 장군과 맥주에 얽힌 일화는 일본 기린맥주 홈페이지에도 올라와 있다. 군대에서 색다르게 맥주 마시는 방법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노기가 사단장을 맡고 있던 1898년, 문부대신인 가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 해군 대장이 시찰을 나왔다. 노기는 환영 연회에 사단 장교들과 병사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원샷 ‘깜짝 쇼’를 위해서였다.

간단한 환영 인사 후 노기가 갑자기 “맥주를 부어라”고 명령했다. 부동자세로 서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맥주병을 들어, 장교들의 잔에 부었다. 그 동작이 끝나자 노기는 “맥주를 마셔라”라고 외쳤다.

장교단은 일제히 단숨에 맥주를 마시고 잔을 테이블에 놓았다. 그러자 “맥주를 부어라”는 목소리가 다시 메아리쳤다. 병사들이 장교들의 잔에 또 맥주를 부었다. “맥주를 마셔라”는 구령에 장교들은 또 이를 단숨(一気)에 들이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낙오자가 속출했다. 하지만 “부어라”, “마셔라”는 노기의 명령은 계속됐다. 10여 번 넘게 잔이 돌았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끝까지 멀쩡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가바야마 문부대신과 노기, 두 사람 뿐이었다고 한다. 

‘원샷’을 뜻하는 ‘잇키’가 다시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1985년이다. 그해  신조어‧유행어대상에서 ‘잇키’가 금상을 받았다.

게이오 대학 체육회(慶応大学体育会)가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학생들 회식과 미팅 자리로 퍼졌고, 결국 단숨에 사회 전반으로 유행하게 됐다. 당시 수상자는 당연히 게이오 대학 체육회였다.

일본 사람들은 술집에 가면 ‘토리아에즈 비루’(먼저 맥주)라고 외친다. 하지만 맥주 소비가 줄어들면서 이런 외침은 이제 과거의 일이 돼 가고 있다. 더군다나 ‘잇끼’(一気)는 더 그렇다. 오히려 바다 건너 한국으로 이 말이 건너와 도처에서 성행하고 있다. <에디터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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