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을 연재합니다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을 연재합니다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19.02.18 15: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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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세계 영화업계에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일본 기업 소니가 ‘미국 영화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콜롬비아 영화사를 인수해 버린거다.

메이지 유신 이전, 쇄국(鎖國)적이던 일본의 문을 강제로 연 ‘미국 흑선(黑船) 사건’과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일본 기업이 호황기 경제력을 포문 삼아, 미국 영화 산업의 거점을 함락시켜 버린 셈이다.

소니의 콜롬비아 인수 2년 전인 1987년, 한국에도 충격에 가까운 일이 벌어졌다.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영화제에서 배우 강수연(임권택 감독 작품 ‘씨받이’)이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면서다.

정말로 반가웠다. 해외에 한국 영화를 알리는 첫 신호탄, 변방이던 한국 영화의 해외 데뷔는 정말로, 너무나 반가웠다.

하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서양의 눈에 한국과 일본 영화는 분명 같은 변방이었지만, 두 변방 사이엔 36년이라는 간극이 존재한다. 무슨 얘기일까.

한국동란이 한창이던 1951년, 일본의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일본 최초로 강수연과 같은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작품 ‘라쇼몽’)를 수상했다. 1951년의 일본(구로자와)과 1987년의 한국(강수연) 사이엔 이렇게 36년이라는 시차가 생긴다.

여기에 우연치곤 묘한 숫자놀음이 등장한다. 두 나라 영화의 해외 데뷔 시차가 공교롭게 일제강점기(1910~1945)의 기간인 36년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충무로의 걸어 다니는 영화 사전’이라 불리는 영화 연구가 정종화씨는 이렇게 말한다.

“분명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 영화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그만큼 제작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광복 이후 또 한국전쟁으로 발목이 잡혔다. 그만큼 해외영화제 수상 등 세계 무대 데뷔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 영화의 국제 데뷔가 늦은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런 데뷔가 한국 영화의 깊이와 넓이를 재는 가늠자라고는 할 수 없다.

일본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쇄국적이던 한국에 큰 변화가 생긴 건 1998년이다.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면서 일본 영화 상영금지 조치가 풀리기 시작했다. 이 해 역시 공교롭다. 1898년, 일본 최초로 영화가 촬영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화로 끝나지 않는다. 산업을 동반한다. 영화 산업은 한 나라의 문화 수준, 더 나아가 경제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이기도 하다. 소니의 미국 공략이 일본 경제력의 과시였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건, 재팬올의 새 연재 코너 때문이다. 이훈구(50) 시나리오 작가가 재팬올에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이라는 타이틀로 일본 영화 이야기 실타래를 풀어 나간다.

‘영화란 무엇인가?’의 저자이자 영화사 (주)라인앤지인 대표인 이훈구 작가는 중국, 일본 등 아시아권 영화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미국에 거주하는 작가는 홍콩킹라이언필름(KING LION HONGKONG FILM)을 설립해 중화권 콘텐츠 수입, 제작도 하고 있다.

글로 무장하고, 콘테츠와 제작으로 한번 더 무장한 그의 영화 오딧세이가 기대되는 이유다. 일본 영화의 태동기를 다룬 1, 2회가 먼저 독자를 찾아간다. <에디터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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