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①/ 쇼치쿠의 탄생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①/ 쇼치쿠의 탄생
  • 이훈구 작가
  • 승인 2019.02.18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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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한국영화 100주년’이 된다. 1895년 3월 22일, 프랑스 리옹의 사진사이자 초상화가의 아들인 오귀스트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cinéma, 처음에는 극장이라는 의미로 쓰임)를 상영한 이후, 이들은 극동지역을 주목했다.

1895년 초에 이미 카메라, 인화 기계, 영사기 역할을 하는 작은 기계 ‘시네마토그래프’의 특허를 낸 바 있지만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의 영사기(1893년 발명 키네토스코프) 시연에서 영향을 받은 태생적 한계로 인해 세계영화시장의 주도권 장악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1896년 여름 뤼미에르사의 카메라맨들이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 이래 베이징, 텐진, 광저우, 난징, 상하이 같은 대도시의 이국적 이미지를 필름에 담았다. 그 해 8월 11일 상하이에서 버라이어티쇼의 일환으로 영사기를 돌렸고 ‘아기의 식사’, ‘종업원의 외출’ 같은 초기 프랑스 영화를 상영함으로써 중국영화사의 서막을 연 것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에디슨이 1893년에 만든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 상자 속에서 전개되는 영상의 움직임을 한 사람씩 들여다보는 장치)를 통한 상영이 1896년 11월 고베(神戸)의 한 여관에서 있었다.

총포상이자 흥행주였던 다카하시 노부하루(高橋信治)가 ‘사진무용’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황족의 관람을 추진한 것도 이 때다. 1897년 2월에는 이나하타 가쓰타로(稻畑勝太郎)가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를 수입하여 오사카(大阪)에서 처음으로 공개했고 파리에서 온 카메라맨이 동행하여 교토(京都)에서 가부키 연기를 촬영한 것이 일본영화사의 첫 페이지다.

물론 일본은 ‘1895년’이라는 영화가 탄생한 해에 오타니 다케지로(大谷竹次郞)형제가 교토의 유명 가부키(歌舞伎) 공연 전용극장을 인수해 쇼치쿠(松竹)를 창립한 것을 근거로 1995년에 이미 일본영화 100주년을 기념하였고 2005년에는 쇼치쿠 110주년을 기념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쇼치쿠 영화사가 1920년 ‘쇼치쿠 키네마 합명사’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영화제작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이해를 달리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경우,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김도산 감독의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가 상영된 것을 기점으로 올해 2019년을 ‘한국영화 100주년’으로 기념하고 있다. 실제 공연과 영화가 상영되는 작품으로 알려진다.

중국인이 최초로 영화를 제작한 것이 1905년 북경에서의 일이었고 한국은 1923년, 대만은 1925년의 일이었으므로 일본의 1898년과는 격차가 있다. 그 100년 뒤인 1998년에 비로소 한국에서 일본영화 상영금지 조치가 풀린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앞서 얘기 했듯 일본인 최초로 영화를 촬영한 이는 도쿄의 고니시(小西)사진관에 근무하는 아사노 시로(浅野四郞)로 ‘둔갑한 지장 보살’, ‘죽은 자의 소생’이라는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일본영화가 세계 3대 메이저가 될 것 임을 예측할 만한 스토리텔링을 담았다. 내용은 이랬다.

‘죽은 자의 소생’의 경우, 두 명의 인물이 관을 들고 가던 도중 관의 바닥이 빠져 시체가 떨어졌는데 그 충격으로 시체가 살아난다는 내용이다. 일종의 ‘트릭 촬영’ 기법도 선보인 것이다.

당시의 영화들이 풍경을 담아내기에 만족했고 최초의 SF 영화이자 스토리텔링 영화였던 조르주 멜리에스 감독의 ‘달 세계 여행’(Le Voyage dans la lune)이 1902년에 만들어졌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일본인들의 가장 큰 특성이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사진과 영화가 순식간에 화제를 일으켰음은 물론, 1897년 3월에 키네토스코프를 개량한 비타스코프(Vitascope)가 수입되고 4월에는 ‘자동사진술’이라는 잡지가 오사카에서 나올 정도였으니 단순한 보여주기식 영화가 아닌 ‘시나리오’가 있고 기승전결이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을 터다.

게다가 아사노 시로는 이듬 해인 1899년에는 해외 개봉을 염두에 둔 촬영도 했다. 세 명의 게이샤(藝者)의 춤을 신바시(新橋)의 요정에서 촬영했는데 당시 게이샤 여성의 브로마이드 그림엽서가 인기가 있었고, 프랑스 파리에서 일본 전통 판화인 우키요에(浮世絵)가 선풍적 반응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대부분 풍속화였지만 우키요에가 당시 유럽 화단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여인들이 등장하는 그림이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게이샤의 영상은 국제적인 수요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영상은 훗날 일본영화의 국제화에 있어서 하나의 숙제로 등장했다. 당시의 영상들이 다분히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으로 촬영된 것이었으므로 ‘일본적인’ 영상에 대한 자성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활동사진’이라는 명칭으로 공개된 이후 아사노 시로의 영향으로 실사(實寫) 필름과 촌극식(寸劇式)의 단편극영화들이 모여져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고 곧 대중적인 인기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훈구 시나리오 작가>
- CBS(기독교방송) 등 다년간 영화 관련 코너 진행
- ‘영화란 무엇인가?’ 저자
- 영화평론 및 시나리오 집필
- 영화사 (주)라인앤지인 대표이사
- 홍콩킹라이언필름(KING LION HONGKONG FILM)설립, 중화권 콘텐츠 수입
- 현재 L.A 거주. 미국과 아시아권 합작영화 기획 및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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