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②/ 메이지유신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②/ 메이지유신
  • 이훈구 작가
  • 승인 2019.02.18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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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영화가 독자적으로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세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첫째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다. 19세기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만이 자발적인 근대화에 성공했으며 고대부터 외국의 선진문물을 배우려는 적극적인 태도가 있었던 나라다.

서구문명을 배우기 위해 정부 차원의 대규모 사절단(이와쿠라 사절단)을 해외에 파견한 것이다. 자기보다 우수한 해외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가 발전의 계기로 삼았던 견당사, 견수사의 후예답게 이와쿠라 사절단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당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선진 산업문명과 입헌체제를 배우기 위해 다녀왔다.

이들의 목적은 선진문명을 습득하면서도 ‘일본화’하는 것이었다. ‘영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영화감독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는 “서양 그림이 클로즈업에 의한 한 점의 응시와 집중화라면 일본 그림은 전체적인 화면 구성에 의한 원거리 촬영을 기조로 한다”고 말했다.

둘째는 전통문화와의 교류다. 이탈리아의 영화가 오페라를 원전으로 삼고 중국영화가 경극(京劇)이나 월극(粤劇)에서 모티브가 나왔듯이, 일본 역시 자신들만의 전통문화를 신문물인 ‘영화’와 결합시켰다.

19세기 중반 이후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던 일본에서 가장 모범적인 예술은 문학과 미술이었다. 물론 오랜 역사를 지닌 무악(舞樂)을 비롯, 전통가면극 노(能), 교겐(狂言), 인형극, 가부키(歌舞伎)가 있었지만 이들은 일류 예능인라는 자부심 때문에 영화를 ‘흙탕 속의 연극’(일명 도로시바이)이라고 낮춰 부르며 교류를 하지 않았다.

반면 낮은 부류에 속했던 유랑극단이나 새롭게 등장한 신파극(新派劇)은 달랐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영화와 공존하는 길을 택했다. 일본 최초의 영화상영 때부터 이미 설명자를 따로 두었기 때문이다.

초창기에는 ‘야시(香具師)’라 하여 축제(마츠리)를 찾아다니며 싸구려 물건을 팔거나 구경거리를 보여주던 떠돌이 상인들을 거쳐 배우들이 함께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자막보다는 ‘변사’(辯士)로 발전하게 된 계기다.

서양영화들이 주로 자막과 음악에 중점을 두었다면 일본의 무성영화는 변사가 중심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관을 아직도 극장이라 부르고 영화관을 소극장인 뜻인 ‘고야’(小屋)로 부르며 영화관 이름이나 극단 명칭에 ‘좌(座)’라는 용어를 그대로 쓰는 이유이다.

셋째로는 18세기 무렵부터 읽을거리(모노가타리: 物語), 오늘날로 말하면 대중소설이 유행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만담, 야담, 신문 소설, 어린이 동화까지 읽을거리와 이야기거리가 풍부했던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이야기거리를 시각화 할 수 있는 최고의 매체였으며 동시에 대중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훈구 시나리오 작가>
- CBS(기독교방송) 등 다년간 영화 관련 코너 진행
- ‘영화란 무엇인가?’ 저자
- 영화평론 및 시나리오 집필
- 영화사 (주)라인앤지인 대표이사
- 홍콩킹라이언필름(KING LION HONGKONG FILM)설립, 중화권 콘텐츠 수입
- 현재 L.A 거주. 미국과 아시아권 합작영화 기획 및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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