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④/ 재난과 메이와쿠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④/ 재난과 메이와쿠
  • 이훈구 작가
  • 승인 2019.02.25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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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와쿠 문화는 일본 가정교육의 근간이기도 하다. 유치원과 학교에서도 이런 교육은 이어진다. 일본에서는 유치원에서부터 대중교통 이용 매너 등 공공장소 예절부터 가르친다.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탑승객이 내린 뒤 타기, 버스·지하철 등에서 큰 소리로 떠들지 않기 등 매우 구체적이다.

초등학교에서도 ‘도덕’ ‘생활’ 등의 과목을 통해 공공장소 예의나 대중교통 이용 예절 교육을 이어간다. 한마디로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기조가 강하다.

심지어 일본 부모는 아이에게 몇 달 동안 자기물건 정리하기만 가르치기도 한다. 자기 물건 정리도 안 된다면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는 생각이다. “수준 높은 질서의식을 갖추려면 꾸준한 반복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게 일본의 가정교육이다.

뿐만 아니라 거리가 정돈이 되고 늘 깨끗하게 청소 되어 있는 것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는 인식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기 집, 혹은 건물 앞을 스스로 치우기도 한다. 이러한 가정교육이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지난 2011년 대지진 참사에서 일본 공영방송 NHK는 절제된 보도를 했다. 강진 발생 직후 자막으로 속보를 내보냈고 즉시 특보체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한 시간여 뒤에는 센다이(仙臺) 상공에 헬리콥터를 띄워 쓰나미가 도로·주택·비닐하우스 등을 삼키는 모습을 생중계했다. 그렇게 화재 정보, 정부 발표 등을 신속 생중계하면서도 과도한 공포감을 막기 위해 절제된 톤을 유지했다.

이는 비탄에 빠진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식에서였다. 또한 일본인들은 복구 과정에서도 경이적이고 절제되며, 성숙된 국민성을 보여주었다. 재해로 인해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는 도로에서 신호등 파란불이 바뀌어야 길을 건넜다. 자연재해 앞에서도 줄을 서서 마트를 이용하고 일체의 약탈행위가 없었다.

규슈지역에도 대지진이 났다. 그곳을 영국 언론들이 취재를 갔는데 '죽 1그릇 당 4명'이라는 배식원칙의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기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새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죽이 남았다.

더 놀라운 것은 관리감독 하는 공무원 한명 없었다는 것이다. 기자가 공무원에게 물었다. "이런 재난 현장에서 어떻게 공무원이 빠졌느냐"는 질문에 해당 공무원의 말이 걸작이었는데, "공무원이 없어도 질서정연하게 배급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에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일본의 시민의식은 인류의 정신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대지진에서 보여준 일본인들의 배려와 시민의식은 어릴 때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가르치는 메이와쿠문화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더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다. 테러단체 IS가 일본인 유카나 하루나씨를 납치 살해했다. 그들은 일본 정부를 딜레마에 빠뜨려 일본 내 여론 분열이 일어나면 자신들을 공습하고 있는 요르단, 미국과의 동맹 관계도 흔들 수 있을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진 아버지 쇼이치씨는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오히려 “큰 폐(메이와쿠)를 끼쳤습니다. 정부를 비롯한 관계자 분들이 전력을 다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유카와 하루나씨 살해 영상을 인터넷에 올린 직후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진 아버지의 언론 인터뷰에 오히려 당황한 쪽은 IS였을지 모른다. 아마도 작금의 대한민국 같았으면 정부를 탓하고 촛불시위에 나섰을 터이다.

일본인의 행동양식을 규정하는 용어로는 다테마에(建前)와 혼네(本音), 감바루(頑張る), 오타쿠(お宅) 등이 있다. 혼네(本音·본마음)와 다테마에(建前·겉보기)란 말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일본인의 속내를 알 수 없고, 또 그 마음을 열기도 어렵다는 말이다.

일본인들은 여간해서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예컨대 전국 시대에 '호오코오지(方広寺) 대불건립을 위해서'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에 칼 수거령을 내렸다.  여기서 혼네는 봉기나 반란을 막기 위한 무기압수를 의미했고, 대불건립은 다테마에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본은 예의상 하는 말들이 꽤나 많다. 일본인과 교류를 하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 구별에 익숙하지 못해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으며, 일본인과의 교류가 피곤하며 도대체 속뜻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고, 그래서 애매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그러니까 그 다테마에를 보고 혼네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일본인과의 끊임없는 교류가 필요하다.

쉽게 설명하자면 일본인들은 예의상 하는 말들이 많다. 예컨대, “저희 집 근처에 오면 꼭 한번 들려 주세요”라고 말했다고 치자. 진짜 찾아가는 것은 더더욱 결례이고 “어디로 가면 될까요?”라고 말한다면 그건 또 실례다.

비즈니스 일본어는 더더욱 그렇다. 제안서를 던져 놓았는데 상대편(일본 측 클라이언트)에서 “한번 검토해보겠습니다"(たしかにおっしゃるどおりだと思いますが、一応検討してみます)라는 말도 흔히 외국인은 긍정적인 대답으로 인식하기 쉬운데, 이것은 완곡한 부정이다. 검토한다는 말만 믿고 기다리다 가는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일본도 집단주의가 있다. 확실히 일본인의 집단중시는 ᐃ2차 대전 때에 ‘옥이 아름답게 부서지는 것’처럼 명예나 충의를 중시하여 미련 없이 죽는 교쿠사이(玉砕)와 같은 집단자결의 비극, ᐃ일본인이 한마음이라는 일억일심(一億一心)의 슬로건, ᐃ오늘날 기업과 사회 등에서 집단적인 ‘화’(和: 발음은 와)의 중시, ᐃ그리고 학생들의 일관된 교복에 이르기까지 깊게 뿌리내려 있다.

얼핏 들어보면 한국 속담처럼 들리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데루쿠이와 우타레루(出る杭は打たれる)라는 속담은 일본인의 집단주의를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집단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등을 돌린 사람은 ‘무라하치부’라는 처벌을 당했다.

한국이 끼리끼리의 집단 이기주의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면, 일본은 개인 혹은 특정인들의 주장만 내세우기 보다는 집단 속에서의 개인을 염두에 두고 개인은 집단이 있기 때문에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집단주의가 군국주의를 낳았고, 그건 일본이 개혁을 하지 않고도 버티는 힘이 되었다.

이러한 일본인의 행동양식은 공교롭게도 ‘메이와쿠’ 문화와 잘 접목이 된다. ‘혼네’는 그렇지 않더라도 ‘다테마에’로는 일단 배려부터 하고 본다. 워낙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은혜는 은혜로 갚는다’는 정신이 강하기 때문에, 과장되게 말하자면 예의범절이 밝아 보인다. 한국에서는 흔하게 “밥 한번 먹자”는 말이 일본에선 ‘밥 한번 사달라’는 것이 되니,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른 정서임은 분명하다. <이훈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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