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⑦ 도쿄와 교토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⑦ 도쿄와 교토
  • 이훈구 작가
  • 승인 2019.03.16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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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라는 복잡미묘한 나라의 사회와 경제를 이해하는데 영화만한 도구가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국에 일본 영화 자료가 너무 없습니다. 일본 영화의 ‘깊은 숲'을 이루는 거대한 나무들 즉 구로사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 오시마 나기사, 이마무라 쇼헤이 같은 감독들을 알려야 합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재팬올이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을 연재 중입니다. 이훈구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 의미를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미국 LA에 거주하는 작가는 ‘영화란 무엇인가?’의 저자이자 영화사 (주)라인앤지인 대표입니다.

홍콩킹라이언필름(KING LION HONGKONG FILM)을 설립해 중화권 콘텐츠 수입과 제작도 하는 작가는 중국, 일본 등 아시아권 영화와 문화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훈구 작가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의 특징인 ‘즉시 일본화’(신문화를 신속하게 받아들이는 것) 현상을 연구함으로써 일본을 올바로 보자는 취지입니다. 또 최근 100년간 일본 문화의 격변기에서 그들은 어떻게 독자적인 문화코드를 만들어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본 영화는 어떻게 서구세계를 매료시켰는지, 우리는 왜 그렇게 못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이 7회로 이어집니다. 7회는 일본 영화의 양대 산맥인 도쿄와 교토의 유쾌한 경쟁, 그리고 초창기 일본 영화계를 이끈 닛카쓰와 쇼치쿠에 대한 내용입니다. <편집자주>

일본 영화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도쿄(東京)와 교토(京都)다. 교토는 헤이안 시대가 열린 794년부터 도쿄로 천도한 1869년까지 1000년이 넘게 일본의 수도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승리로 막부시대(幕府時代)에 접어 들면서 자연스럽게 덴노(天皇)가 머무는 교토와 쇼군(將軍)이 머무는 도쿄(에도)는 서로 라이벌 관계에 놓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수도를 옮기기는 했지만 덴노가 머무는 교토의 상징성 때문에 정신적 수도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도쿄로 수도가 천도 되면서 자연스럽게 교토의 오랜 건물들과 유적들은 정신적 재산으로 남았다. 오늘날까지도 헤이안 시대~가마쿠라 시대의 문화유산들은 수많은 시대극(時代劇, 지다이게키)의 배경이 되고 있다.

특히 후루카와마치(東古川町)의 경우, 시대극 뿐만 아니라 현대극(現代劇, 겐다이게키)에도 자주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전통문화의 보존성이라는 가치 때문에 교토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영화 촬영 면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게다가 1923년의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도쿄의 영화 관련 시설과 필름 등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제작의 중심이 자연스럽게 교토에 치중되기도 했던 것이다.

막부시대 초기 교토와 도쿄(에도)에서 남장을 하는 등 격식을 벗어난 행동을 하거나 매우 화려한 의상을 입는 것이 유행했고, 가부키의 태동이 이뤄졌다.

뿐만 아니라 도쿄와 교토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다이내믹한 전개를 구사하기 위해 회전무대를 고안해 냈고, 그렇게 가부키가 자리를 잡았다. 서민문화이자 일본의 한 문화로 자부심도 대단했다. 또 극장도 많았기 때문에 훗날 영화가 자연스럽게 도쿄와 교토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 극장은 무대 위에 카펫이 늘 깔려 있었고, 배우들은 땅을 밟지 않고 연기를 했다. 반면 맨땅을 밟으며 연기를 하는 영화인들을 도로시바이(泥芝居)라고 비아냥했다. 두 도시가 수도이면서 문화의 중심이었지만 서민문화 역시 이 두 도시를 거점으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중 영화의 대부분은 도쿄와 교토를 중심으로 한 가부키의 ‘끝없이 넓은 영역’을 뿌리로 하고 있다.

그러나 교토가 항상 우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토는 시대극을 특기로 하고, 도쿄는 현대극을 전문으로 했기에 두 도시의 대조적인 작품은 주도권을 잡기 보다는 서로 대항하고 견제하면서 일본영화의 두 얼굴을 만들어 냈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영화 촬영(1898년)이 이뤄진 것도 도쿄였고, 1897년에 간다(神田)에 신축된 극장 가와카마좌(川上座)에서 영화가 상영되었으며 그해 4월에는 극단 시에비칸(濟美館)이 신파 작품 속에 활동사진을 편입시키는 실험극을 시도해 호평을 받았다.

1903년에 요시자와(吉澤)상점이 아사쿠사(浅草)에 처음으로 영화 전문관을 연 것을 볼 때, 관동대지진이 아니었다면 격차가 크지 않았을 수 있었다. ‘아사쿠사’는 물의 거리다. 떠들썩한 상점가 ‘나카미세 거리’, 일본의 전통 예능을 보여주는 극장 ‘아사쿠사 연예 홀’ 등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특히나 도쿄의 화류계는 멋진 촬영지이면서 동시에 배우들을 발굴해내는 곳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세계 영화사에서 한 나라의 두 도시가 서로 다른 장르를 앞세워 앞 다투어 영화산업을 발전시켜 나간 곳은 일본이 유일하다.

외국과 비교한다면, 미국은 뉴욕에서 할리우드로 옮겨갔다. 중국은 베이징에서 영화를 만들지 않았고 상하이가 영화 중심이었다. 거기에 홍콩은 일종의 하청업자로 치부됐다.

그렇다면 도쿄와 교토, 일본 영화의 양대 산맥은 어떻게 균형발전을 하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쇼치쿠(松竹) 닛카쓰(日活)의 역할이 컸다. 쇼치쿠의 역사는 이미 짚어 봤으므로 닛카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904년부터 소규모 촬영소가 도쿄와 교토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가내수공업적인 제작형태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던 일본 영화계가 생태계를 바꾸게 된다. 

이윽고 1912년 4개의 영화사가 기업합병을 단행하게 되는데, 이로써 일본 최초의 메이저 영화사인 닛카쓰(日活 : 日本活動寫眞株式會社)가 탄생하게 된다. 여기서 1912년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이 해에 대제(大帝)라고 불리던 메이지 천황이 사망한다. 또 닛카쓰의 탄생 연도는 미국 할리우드의 20세기 폭스(1915년에 윌리엄 폭스가 설립)사와 워너 브라더스(1918년 4명의 워너 형제인 잭 워너, 해리 워너, 앨버트 워너, 샘 워너가 설립)보다 앞선다.

미국은 1913년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사용권 관련 특허 분쟁을 피해 서부로 이동하여 로스앤젤레스에 할리우드로 통칭되는 대규모 영화제작 스튜디오를 짓기 시작했다. 일본의 경우는 키네토스코프를 개량한 투사방식의 ‘비타스코프(vitascope)’가 보편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자적 발전이 가능하기도 했다.

특히 닛카쓰는 일본 영화의 ‘산업기초’를 확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쇼치쿠가 가부키를 거의 독점적인 위치에 두고 영화산업을 일궈 나갔다면, 닛카쓰는 최초의 ‘대형’영화사이면서 배급까지 눈을 뜬 메이저 영화사였다.

닛카쓰는 도쿄의 무코지마(向島)와 교토의 니조성(二條城) 서쪽에 촬영소를 세웠다. 도쿄에서는 신파(新派)를, 교토에서는 구극(舊劇)을 제작했다. 신파(新派)란 말은 원래 일본에서 처음 쓴 신극 용어의 하나로, 일본의 구파극(舊派劇)인 가부키(歌舞伎) 연극에 대립하는 칭호로 사용됐다.

한편, 쇼치쿠와 닛카쓰는 도쿄와 교토의 특징을 살리면서 두 도시의 대조적인 작풍을 반영하면서 일본 영화의 발전을 일궈 나갔다. 이러한 경향은 훗날 일본 영화의 1차 황금기를 가져오는 씨앗이 되었다.

1930년대 쇼치쿠가 도쿄에서 소시민들을 중심으로 한 현대극들을 통해 스타 여배우들을 배출시켰다면, 닛카쓰는 교토에서 시대극의 황금시대를 펼치며 카리스마가 넘쳐나는 남자 배우들을 배출해 나갔다.

닛카쓰가 일본 영화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하다. 1928년에 이미 30여 곳의 영화관을 직접 운영하였고, 1천여 곳의 영화관과 배급계약을 체결한 것으로만 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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