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⑧ / 여장남자배우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⑧ / 여장남자배우
  • 재팬올(japanoll)
  • 승인 2019.03.26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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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구 시나리오 작가가 일본영화의 역사를 밀도 있게 그려가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지식과 용어들을 동원해 시대적 배경을 꼼꼼하게 짚어주고 있습니다. 일본영화를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독자들, 그리고 전문적인 ‘덕후’들에게 좋은 길라잡이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번 회는 쇼치쿠(松竹) 영화사의 여배우 기용으로 촉발된 온나가타(女形: 가부키의 여장 남자배우)의 저항에 대한 내용입니다. <편집자주>

1920년, 교토극장에서 과자를 팔면서 가부키와 신파단을 소유하고 있던 시라이 마쓰지로(白井松次郞)·오타니 다케지로(大谷竹次郞) 형제가 자신들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영화사인 쇼치쿠(松竹) 영화사를 설립하면서 일본영화계에도 스튜디오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가마타(薄田)에 스튜디오를 여러 개 세우고 대형영화사로 키워 나갔는데 쇼치쿠를 일본영화 근대화의 시작이요 중심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쇼치쿠는 스타 시스템을 도입한 영화사이기도 하면서 감독 중심의 영화로 흐름을 바꾼 회사이기도 하다.

무성 영화 시대의 위세 당당한 미남 배우로 여성들의 우상으로 불렸으며 할리우드 최초의 아시아 배우로 유명했던 하야카와 셋슈(Sessue Hayakawa)를 불러들인 곳이 쇼치쿠다. 또한 할리우드에서 카메라맨으로 활약한 헨리 고타니(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부모와 함께 하와이로 이주했던)를 데려와서 영화에 대한 선진 기술들을 전수 받는 등 일본 영화산업의 기초 확립에 힘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파격적인 것은 ‘여배우’들을 처음으로 기용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일본 최초의 여배우는 사다 얏코(Sada Yattko, 貞奴)다. 물론 그녀는 영화배우는 아니다. 일본의 예술가로 신파극의 창시자인 가와카미 오토지로(川上音二郎)의 부인이자 배우로서 남편의 정극(正劇) 운동을 도우면서 미국과 유럽순회 공연을 통해 명성을 날렸다.

하야카와 셋슈는 일본제국극단을 창립하고 1913년에 미국 순회공연을 하다가 그곳에서 제작자 토머스 H. 아인스의 눈에 띄어 영화 출연을 제안 받은 후 ‘태풍’(1914)과 세실 B. 드밀의 ‘협잡’(1915)등 몇 편의 무성 장편영화에 출연하면서 스타가 된 케이스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다 얏코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후 1908년에 제국여우양성소(帝国女優養成所)를 설립하는 등 여배우 양성에만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여배우가 영화에 등장한 것은 1920년대 초반이다. 그나마 가부키를 모방했다는 한계성 때문에 여자 역할을 하는 남자배우 즉 ‘온나가타(女形)’가 여자 배역을 대신 했는데, 이 유리벽을 깬 것이 쇼치쿠다.

참고로 가부키에서 여장 배역은 이미 세분화 되어 있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온나가타·오야마(女形) : 여자 역할을 하는 남자 배우.

△타테 오야마(立女形) : 최고위의 여자 연기 배우.

△케에세에(傾城) : 격이 높은 창녀 역할.

△와카 오야마(若女形) : 젊은 여인 역할을 하는 배우. 후케오 야마(老女形:노파)의 대역

△세와 오야마(世話お山) : 빈곤한 집안 출신으로 몸을 팔거나 병고에 시달리거나 이별 장면 등에 등장하는 여인 역할(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중요한 건, 여장배우들이라 할지라도 전문분야가 각각 있었다는 점이다.

초창기 일본 영화에서는 여주인공을 가부키의 온나가타(女形)라는 여장남자배우가 연기할 수 밖에 없는 ‘탄탄한 배경’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교류는 자연스럽게 일본 영화의 배우들이 가부키적 특징을 보이도록 만들어 버렸다.

가부키에 등장하는 남자 배우들이 다치야쿠(立役)와 니마이메(二枚目), 삼마이메(三枚目)등 세 분류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온나가타는 매우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배역을 정해 놓고 있었던 셈이다.

다치야쿠는 꽃미남 캐릭터인 니마이메와 개성 있는 외모이지만 유머스런 삼마이메와 비교하여 상남자 주인공을 의미하는데, 일본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사무라이 영화나 야쿠자 영화의 주인공들에 해당된다. 또한 다치야쿠는 충성과 의리에는 충실하지만 여성에게는 관심이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사실, 쇼치쿠가 여배우들을 기용하게 된 배경에는 19세기 말부터 일어난 가부키 개혁운동의 영향이 컸다. 또한 신파와 서양 연극의 도입으로 인해 생겨난 신극(新劇), 신국극(新國劇)은 영화에 여배우를 기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개혁운동과 신파의 보급은 극이 좀 더 세련되어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장르적으로 신파는 ᐅ멜로드라마가 주로 인기를 끌었고 ᐅ신분을 넘어 선 사랑 ᐅ남자의 입신출세를 하기 위한 여자의 희생 ᐅ생이별 가족과의 재회 ᐅ출생의 비밀 등을 빈번하게 다루었다. 이런 주제들은 오늘날도 아시아권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의 구조다.

일본영화가 독자적인 멜로드라마로 성장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20세기 전반에 걸쳐 성공을 거둔 대중연극들이 주로 화류계와 계급 갈등을 다루는 소설들을 연극화하고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를 통해서 시작한 다카라즈카가극단(宝塚歌劇団)으로 대표되는 소녀가극은 오늘날 영화나 뮤지컬에 가까운 공연물로서 여배우의 공급원으로 부각 되었다.

게다가 1909년에는 요시자와 상점에서 최초의 영화 잡지인 ‘활동사진계(活動寫眞界)’가 발행되어 영화 내용은 물론 비평가와 분류법, 비평 집필 방법까지 소개 되었다. 당시 영화비평의 인기는 폭발적이어서 191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동인지를 만들고 1919년에 이르러서는 동인지 ‘키네마순보’가 창간되었다.

그러나 너나 할 것 없이 서양 영화는 칭찬하면서 일본 영화는 본질적으로 충분치 못하다는 비판을 가차 없이 실었다. 그중 대표적 비평가인 가에리야마 노리사마는 1917년 ‘활동사진극 창작과 촬영법’에서 무대 각본이 아닌 시나리오를 쓰고 온나가타가 아닌 진짜 여배우를 기용하며 변사가 아닌 자막을 쓸 것을 주장한다.

이 때 이미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도쿄에 지국을 설치해 자국 영화를 공급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객들의 눈높이가 높았고 이에 부응하여 ‘자연스럽게’ 여배우가 등장하게 된다. 또한 쇼치쿠는 배우 양성소를 통해 여배우들을 키우면서 철저한 준비과정을 거쳤다.

이 때문에 1900년대 여자연극(女芝居: 여자가 주인공인 비극적 연극)이 영화화 되고, 1910년대엔 연쇄극에 나온 신파 여배우가 있기는 했지만 “쇼치쿠의 여배우는 다르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 때 기용된 배우들이 바로 구리시마 스미코(栗島すみ子), 하나부사 유리코(英百合子) 등이다. 이중 구리시마 스미코는 명랑하면서도 가련한 모습으로 그 때까지 요염하게만 그려진 신파 여배우들과는 확연히 다른 연기로 스타 여배우로 등극한다.

그녀는 훗날 나루세 미키오(なるせみきお )의 ‘매일 밤 꾸는 꿈’(1933) 등을 통해 ‘영화의 연인’, ‘일본의 연인’이라 불리면서 ‘미국의 연인’이라 불렸던 메리 픽포드 (Mary Pickford)와 버금가는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일본영화사에는 당시 구리시마 스미코의 브로마이드가 하루에 1000장 이상 팔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주로 시어머니에게 구박 받거나 여성으로서의 제약을 받아 자살을 하는 배역을 맡아 수많은 여성팬들을 확보하기도 했다.

하나부사 유리코는 신파에 어울리는 역할들을 잘 소화해 냈으며, 또 다른 배우 하야마 미치코(葉山三千子)는 수영복 미인으로 평판이 높았다. 때마침 순영화극운동(純映畵劇運動)이 일어나면서 온나가타 배우로 대체된 영화는 외면 받게 된다.

이윽고 온나가타들의 반발과 집단행동이 뒤를 이었다. 이중 기누가사 테이노스케(衣笠貞之助: 1954년 ‘지옥문<地獄門>으로 칸느영화제 그랑프리)는 가장 유명한 온나가타로서, 1922년 닛카쓰의 여배우 기용에 반발하여 여성 역의 남자배우들과 탈퇴를 했으며 ‘온나가타 저항’ 운동을 펼쳐나갔다.

이는 동시대 ‘벤시(辯士)’라는 무성영화의 대중 설명사들의 횡포와 함께 당시 일본영화계를 혼란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쇼치쿠의 이러한 파격은 곧 일본영화의 해외 수출과 영화인들의 할리우드행을 가능케 하여 하야카와 셋슈는 물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요나라(Sayonara, 1957)의 여주인공 미코 타카(高美以子, Taka Miiko), 1981년 쇼군(Shogun)으로 골든글로브를 수상한 시마다 요코(島田陽) 등 숱한 스타를 발굴해 낸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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