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 토키(Talkie)시대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 토키(Talkie)시대
  • 재팬올(japanoll)
  • 승인 2019.04.2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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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도산위기에 직면한 미국의 워너브라더스사가 사운을 걸고 도박의 ‘마지막 배팅’을 하는 심정으로 내놓은 작품이 바로 최초의 토키(Talkie:유성, 발성) 영화 재즈싱어(Jazz Singer)다.

이 영화의 주연배우인 앨 존슨(사실 일류 가수들의 스케줄과 개런티 문제로 대타 캐스팅)은 ‘My Mammy’, ‘Blue Sky’등 7곡의 노래를 불러 '영화 역사상 최초의 주제가' 기록을 남겼다. 물론 부분적인 유성영화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토키영화의 등장은 영화음악이 본격화 되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보다 한해 전 ‘돈 주앙(Don Juan, 1926)’이라는 음악과 효과음이 녹음된 첫 사운드 영화를 만들기는 했다. 음악과 음향을 더빙한 최초의 사운드 필름이기는 했지만 짧은 영상 안에 연주자 로이 스멕(Roy Smeck)의 우쿨렐레 연주 장면을 ‘His Pastime’이란 제목으로 삽입했는데 역설적이게도 영화보다는 이 삽입장면이 인기를 끌었고 덩달아 로이 스멕만 유명인사가 되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상대적으로 소규모 영화사였던 워너 브라더스는 메이저 영화사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1925년 바이타그라프사(社)를 인수, ‘바이타폰 시스템(Vitaphone System, 영상과 발성이 일치되도록 만든 디스크 방식)’을 통한 영화를 제작했다. 그중 첫 번째 작품이 ‘돈 주앙’ 네 번째 작품이 ‘재즈싱어’로 몇 번의 도전 끝에 비로소 대흥행을 거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대다수 유럽의 국가들과 달리 일본의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전환은 더뎠다. 그 이유는 자체적인 기술로 토키영화를 완성하고자 했고 벤시의 파동도 겪었으며 무엇보다도 현장 영화인들이 육중한 기계장치와 불완전한 기술로 무성영화의 예술성을 파괴한다는 거부감도 강했다. 게다가 소리의 질도 조악했고 새로운 설비투자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일본에서 영상에 음성을 결합하려는 시도는 영화제작이 시작된 직후인 1902년부터 꾸준히 있어왔다. 1902년 요시자와 상점의 가와우라 겐이치(河浦謙一)는 레코드와 필름을 동시에 회전시켜 토키 실험을 했으며 1910년대 내내 디스크식 토키에 의한 ‘발성활동사진’에 관한 연구를 거듭했지만 실패했다.

물론 1925년 무역상 미나가와 요시조(皆河芳造)가 미국의 데포레스트로사(社)로부터 토키 기술권을 사서 1927년에 수정, ‘미나토키’를 고안하여 쇼와키네마라는 회사를 세워 야마다 고사쿠(山田耕作)가 음악을 담당한 단편 ‘여명’을 제작했다. 그해 10월에 ‘재즈싱어’의 시사회가 열렸고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낮다고 판단하여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이후 미나토키에서 공개한 첫 작품은 오치아이 나미오(落合浪雄)의 ‘대위의 딸’(1929)이며 도조 마사오(東條政生)가 디스크 방식의 이스트폰 토키로 ‘돌아오는 다리’등을 제작했지만 곧 소멸 되었다. 1930년에는 닛카쓰에서 미조구치 겐지가 오페라 가수인 후지와라 요시에(藤原義江)를 주인공으로 ‘고향’을 만들었지만 자막과 음성을 병용한 불완전한 토키영화였다.

‘뉴욕의 불빛’(Lights of New York, 1928)과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Steamboat Willie, 1928)가 대사까지 완벽하게 녹음하게 되면서 토키 영화의 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에 더하여 프랑스는 1930년 르네 클레르(Rene Clair) 감독의 ‘빠리의 지붕 밑(Sous Les Toits De Paris)’을 최초의 토키 영화로 내 놓는다.

프랑스의 토키 영화는 미국의 영화들이 토키의 특징을 강조한 나머지 불필요한 대사와 음악이 남용되고 있음을 비판하며 스토리의 단순화와 대사 생략에 철저했고 세련된 영상예술로 승부를 보았으며 주제가의 존재를 클로즈업 시켰다.

이러한 기술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미나토키를 통한 독자적 발전에 더 방점을 두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필름과 레코드를 동시에 돌려 상영하는 초기 디스크 방식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미국과 같이 동시녹음 방식이나 방음 칸막이로부터 카메라를 떼어내는 ‘외부음향 차단장치(Blimp)’같은 신기술이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

이 때 등장하는 인물이 조선인 ‘이필우’다. 그는 애초 미나토키의 디스크 구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자금이 오지 않아 난관에 봉착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 사장을 찾아간다.

당시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의 사장은 독일에서 손기정씨가 마라톤을 할 때 그 전송사진을 보내기 위해서 처음으로 기계장치를 했던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쓰치하시(土橋)를 소개해 줬다. 쓰치하시는 무성영화 때 상설관 악사(바이올리니스트)로 자신의 집에 기계를 들여놓고 토키를 연구 중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계는 매우 조잡했기 때문에 기술자인 나카가와(中川)를 소개받기에 이른다. 세 사람은 곧 의기투합을 한다. 쓰치하시와 나까가와는 앰프를 맡기로 하고 이필우는 레코더를 맡는다.

이필우는 상하이로 건너가 20세기 폭스사의 뉴스팀을 통해 그 원리를 터득하게 되고 쓰지하시와 나카가와가 만든 장비에 자신이 관찰한 바를 더해 토키를 완성하여 이른바 ‘쓰지하시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개발하기에 이른다.

이윽고 1931년 쇼치쿠에서 ‘쓰시하시 시스템’으로 고쇼 헤이노스케(五所平之助)가 연출한 ‘마담과 아내’가 일본 최초의 유성영화로 역사에 기록된다. 이 영화는 교외의 주택가에 사는 한 작가가 글이 써지지 않아 고민하던 중 옆 집 청년들이 연주하는 재즈가 시끄러워 항의 하러 갔다가 마담의 매력에 홀딱 빠진다는 이야기이다.

작가는 재즈에 흠뻑 빠지면서 고민하던 작품도 잘 써내려 가게 되는데 일본 아내도 좋지만 미국적 분위기의 마담도 떨쳐 버리기 아깝다고 생각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영화는 일본의 전통과 서양의 모더니즘을 모두 인정하는 영화로 최신 유행 시스템인 토키와 어울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반하여 10년 전 영화개혁 운동에도 뒤쳐졌던 닛카쓰는 토키영화도 뒤쳐졌는데 이들은 ‘쓰시하시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 웨스턴 일렉트릭 방식으로 1933년에 이르러서야 이토 다이스케(伊藤大輔)에 의해 ‘단게사젠’을 연출하게 했다.

하지만 1930년대 내내 무성영화와 토키영화는 공존했다. 특히 최신 유행을 즐겨 찾았던 미조구치 겐지와 달리 오즈 야스지로는 무성영화에 애착을 갖고 있었고 훗날 숱한 영화들에도 무성영화 시대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나는 작품들을 연출하게 된다.

그러나 그 역시 촬영기사 모바라 히데오의 음향시스템을 포함하여 여러 시스템을 실험해 보고 나서야 비로소 1936년에 ‘외아들(The Only Son, 一人息子)’을 연출하면서 무성영화와 완전 결별한다. 물론 그는 이미 1935년 ‘도쿄의 여인숙’을 언급하면서 “무성영화를 만들 방도가 이젠 더 이상 없다. 왜냐하면 분위기가 완전히 유성영화 쪽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성영화인 이 영화를 유성영화처럼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한다.

일본에서의 토키영화는 1930년대 초 모더니즘 문화를 자유롭게 누리게 되는 계기가 되지만 1937년 문화 내셔널리즘의 대두로 서양이 배격 대상이 되고 1942년에는 모더니즘을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세계 최초로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을 둘러싼 논쟁이 교토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또한 지다이 게키(시대극)의 스타들이 설립한 독립 프로덕션들은 연이어 토키 영화 회사에 흡수된다. 제작규모가 작은 독립 프로덕션에서 새로운 설비투자를 하기가 곤란했기에 1938년까지는 무성영화가 간간이 선을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훈구 시나오리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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