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 쇼치쿠와 닛카쓰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 쇼치쿠와 닛카쓰
  • 재팬올(japanoll)
  • 승인 2019.05.07 15: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초창기 일본영화계는 쇼치쿠(松竹)와 닛카쓰(日活) 양대산맥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개혁을 하면서 발전시켜 나갔음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우후죽순격으로 영화사들이 난립하고 그중에는 가내수공업적인 영화사들과 배우 혹은 감독 1인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프로덕션의 성격이 많았다.

당시 영화계는 야쿠자(ヤクザ, やくざ)의 보호를 받거나 착취를 당해야 흥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의 영화계가 야쿠자와 결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영화가 차지하는 지위가 한동안 낮았던 데다가 야쿠자의 역사와도 연관이 깊다.

야쿠자는 헤이안 시대부터 존재해 왔고, 에도시대에는 절과 신사의 경내 등에서 도박판을 벌여 수입을 얻기도 했으나 1884년의 ‘오카리코미(大刈込み)’ 도박범 처분 규칙에 의해 도박꾼들은 재판 없이 10년의 징역을 강제로 받게 하면서 주업종을 바꿨다. 이후 도박 집단의 대부분은 토목건축 청부의 간판을 들고 ‘구미(組, 전통적으로 건축업체 명칭에 사용)’라는 이름을 달아 세력을 유지했는데 그들에게 영화는 매우 좋은 신사업이었다.

야쿠자들은 때로 영화에 자금을 대기도 하면서 영화에 담겨진 (야쿠자)자신들의 모습을 본보기로 삼아 남자다움을 단련하거나 배급 등에도 관여했다. 이러한 현상은 전 세계 영화계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야쿠자들이 무조건 나쁜건 아니었다. 막 유신이라는 근대화에 접어들었고 서양 신문화와 발전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 가지 사상이 유입되기 시작한 일본사회에서 야쿠자 역시 그 변화에 민감했다.

거장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를 발굴한 나카타 마사이치(永田雅一)는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진 야쿠자 조직 지모토구미(千本組)의 청년부 출신이었을 정도다. 조숙했던 일본의 영화산업(수공업과 개인적 재능에 의존해 있던 시기~기반이 다져가던 시기)에서 전후 혼란기의 대도시 야쿠자 조직들은 흥행사와 연계하여 싸구려 흥행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사실 그들은 ‘영화’라는 신문화가 유입되기 전에도 ‘가부키’ 공연의 흥행을 좌지우지 하는 경우가 많았고 표를 강매하는 것은 다반사였으며 사주를 받아 다른 극단을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했었던 것이다.

쇼치쿠와 닛카쓰의 출범은 이러한 난립 된 일본 영화계가 비로소 영화산업으로 발전되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중 닛카쓰(日活)는 최초의 ‘대형’ 영화사이면서 영화관을 직접 관장하거나 배급계약을 체결하고 스튜디오 시스템을 도입한 영화사다.

닛카쓰는 1912년 일본 영화의 여명기에 설립된 ‘일본활동사진 주식회사’를 줄여 부른 말이다. 1912년은 대제(大帝)라고 불린 메이지 일왕(천황)이 사망한 해이다. 그는 매우 특이한 왕이었다고 전해진다. 유럽의 왕들이 영상을 복제하기 위해 자신을 모습을 영상, 사진, 화폐, 우표 등으로 남긴 데 반해, 그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이 해에 4개의 영화사를 합병하여 발족시켰다. 흔히 초창기 라이벌이었던 쇼치쿠(松竹)를 ‘도시파’로 닛카쓰를 ‘토착파’로 보는 견해(요모타 이누히코, 四方田犬彦)가 있는데 종래의 가내수공업적인 제작사가 아닌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영화사다.

물론 닛카쓰는 경영난으로 1942년 제작 설비를 다이에이(大映)에 넘겨주고 배급만 하다가 1954년부터 다시 영화제작을 재개하기도 했지만 일본 영화의 제1황금기에 있어서 나루세 미키오 같은 거장들의 데뷔 무대가 바로 닛카쓰였다.

닛카쓰하면 스튜디오를 통한 분업화가 잘 이뤄진 영화사로 알려지게 되는데 도쿄와 교토에 각각 스튜디오를 세우고 도쿄에서는 신파(新派), 교토에서는 구극(舊劇)을 제작했다. 이로 인하여 반세기 이상에 걸쳐 두 도시간 영화대립이 이뤄지게 되는 단초를 제공했지만 신파는 겐다이게키(현대극)로 구극은 지다이게키(시대극)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이마무라 쇼헤이 같은 감독들이 착실하게 실력을 쌓으며 100년 이상의 역사를 유지해 온 닛카쓰는 다른 메이저 영화사들에 비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여배우 기용 등 영화개혁운동에도 뒤졌으며 본격화된 토키시대도 뒤졌지만 한편으로는 도쿄의 스튜디오를 고수한 터줏대감이다.

현대영화가 반드시 도쿄어(東京語)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물론 훗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등 새로운 미디어 매체가 등장하여 영화계가 어려움에 처 할 때 놀랍게도 닛카쓰는 이시하라 유지로(いしはらゆうじろう)를 앞세운 새로운 청춘영화나 무국적풍 액션 영화는 물론 이른바 로망 포르노(Roman Porno)영화를 통해 긴 역사를 이어가게 된다. 이른바 ‘닛카쓰 로망 포르노’인 셈인데 1971년부터 1988년까지 1133편이 제작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일본 영화시장의 40%를 점유 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반면 쇼치쿠는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를 떠올리게 할 만큼 감독 중심주의를 지켜왔는데 일본최초의 토키영화 ‘마담과 아내’(1931), 최초의 칼러 극영화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1951)등 ‘최초’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닐 만큼 개혁에 민감했다.

한편으로는 오즈 야스지로라는 거장 덕분에 때로 사회의 모순 보다는 인간 존재의 밑바탕에 깔린 비애와 달관을 그려냈다. 오즈가 표현해내는 일본인은 정치적 무관심 속에서 국가에 협력하지도 않지만 전체적인 위기에서는 무력하게 순종하는 인간형으로 그려졌다.

이로 인하여 군국주의 하의 일본 영화계에서 군부와 적극적으로 결탁한 도호(東宝)나 군부와 결탁을 하기 보다는 다이에이(大一)에 흡수된 닛카쓰에 비해 다소 애매한 자세로 살아남았다. 그 시절 영화인들은 군에 입대하거나 만주의 영화사인 만에이(滿映)로 옮기게 되는데 인재들이 모여든 만큼 빠져나가는 이도 많은 영화사로 유명했다.

나루세 미키오에 대해 기도 시로(成戶四郞)사장이 “쇼치쿠에 두 명의 오즈는 필요 없다”고 말하여 닛카쓰의 주요감독이 된 일화나 독립영화계의 아버지 신도 가네토(新藤兼人), 일본 사회의 본질을 파헤친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스즈키 세이준(鈴木清順), 로망 포르노의 거장 구마시로 다쓰미(神代辰巳), 일본 영화계의 이단아 가와시마 유조(川島雄三) 등이 쇼치쿠 출신이다. 1954년을 전후로 닛카쓰가 제작을 재개하며 사람을 가장 많이 뺏긴 쇼치쿠가 급히 영화인들을 수급한 사건도 있다.

마지막까지 쇼치쿠를 지킨 감독으로는 오즈 야스지로, 서민극의 대가인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惠介), 추리극의 대가 노무라 요시타로(野村芳太郎), 천부적 재능을 가졌다고 평가 받은 야마다 요지(山田洋次) 정도다. 이러한 회사의 분위기 탓인지 즉흥성이 강한 영화를 만들었고 세트 촬영보다는 로케이션을 중시했으며 등장인물 역시 완전한 아마추어나 어린이들을 많이 출연시켰다. 꼼꼼하기로 소문난 닛카쓰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연출이 시도됐다.

그 덕분에 신화적인 대스타를 보유한 닛카쓰와 달리 현대적 개성을 지닌 배우진들을 확보했다. 즉 내성적이지만 의지할 수 있는 청년 역의 사노 슈지(佐野周二), 부드러우면서도 씩씩한 청년 역의 우에 하라 겐(上原謙), 무뚝뚝하고 성실한 청년 역의 사부리 신(佐分利信)을 배출해냈다. 또한 다나카기누요(田中絹代)는 가련하고 서민적인 여성 역을 구와노 미치코(桑野通子)는 현대적이면서 명랑한 여성 역, 다카미네 미에코(高峰三枝子)는 기품 있는 여성 역을 주로 맡았다. <이훈구 시나리오 작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