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는 일본영화의 과도기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시기이기도 하지만 일본은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경계에서 점차 국가에 순응하는 형식을 취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1930년대는 일제 식민지 영화에 대한 지배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진 시기이기도 하다.
그 시기 영화는 대중예술의 총아로서 상품처럼 국경을 넘어 소비되고 만들어졌다. 역설적이게도 일본이 식민지 정책을 펼쳐나가면서 조선, 대만, 만주를 지배함에 있어 일체(一體)를 지향했던 까닭에 일본 본토의 영화사들과 식민지 지배하의 영화사들간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본래 영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창작이라기보다는 자본과 기술에 영향을 받는다. 하여 일본은 이들 3곳의 식민지에 영화산업의 기초를 닦아주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전쟁 이후 영화산업을 이어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왜냐하면 일본영화산업과 식민지 토착영화자본의 형성은 필연적이었고 국책영화들을 통해 근대 대중문화의 형성은 물론 보다 더 효율적인 문화적 지배도 가능할 것이라고 일본 스스로가 믿었기 때문이다.
‘만주사변’(1931)이후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벌이고 도쿄·나치독일연맹조약(1936)에 서약을 하면서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경계에서 극단적 민족주의가 지식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면서 기존 친마르크스주의 예술가와 작가, 예술가들이 연행되고 검열이 강화되던 시기였다.
그중 가장 대표적 인물인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 1903~1933)는 일본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대표 작가이다. 그는 암살되었고 그의 대표 서적인 ‘게공선’(1929)의 경우에는 대표적인 일본의 노동문학으로서 ‘게잡이 공선’의 잔혹한 노동과 학대에 대하여 폭로하는데, 두 번째 파업으로 비로소 어부들은 ‘동물’에서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주의적 작품이다.
이 작품은 훗날 감독 겸 배우인 야마무라 소(山村聰)에 의해서 우여곡절 끝에 각색되어 ‘해공선’(1953)으로 다시 2009년에 ‘게어선(Kanikosen, 蟹工船)’으로 사부(SaBu)감독에 의해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절 일본영화는 민족주의 정치를 위해 헌신하는 영화인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때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영화사가 바로 ‘도호(東寶)’다. 1932년 8월 12일 주식회사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으로 시작한 도호의 역사는 처음에는 영화와 연극배급회사로 출발했는데 제3의 대형 영화사이면서, 현재는 한큐한신홀딩스(한큐 전철, 한신 전기철도), H2O 리테일링과 함께 한큐한신도호그룹의 핵심 기업으로 우리에게는 ‘도라에몽 시리즈’나 ‘짱구는 못말려’시리즈 등으로 친숙하다.
도에이, 쇼치쿠와 함께 일본 3대 영화 배급사 중 하나로 아직도 활발하며 도쿄도 치요다구 유라쿠쵸에 본사가 위치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공공질서와 미풍양속을 해치는 소재를 다루지 않고 보수주의로 유명한 이 회사는 1930년에 설립한 토키연구소인 PCL(사진 화학 연구소, Photo ChemicalLaboratory, 통칭 : PCL, 후에 소니 PCL이 됨)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여기 출신이 바로 세계적인 명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와 그의 평생 지기이자 ‘고질라’ 시리즈로 유명한 혼다 이시로(本多猪四郎)이다.
PCL은 일본 최초로 프로듀서 시스템을 채택해 가족적, 봉건적, 인맥 위주의 영화제작을 일체 거부하고 자유롭고 현대적인 경영방침을 정했다. 때문에 암울한 시대가 시작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미술이론가 다키구치 슈조(瀧口修造, 1903-1979)부터 훗날 SONY를 일으킨 이부카 마사루(いぶかまさる) 등 다양한 부류들이 모여들었는데, 좌익이나 전위예술운동에 관한 청년들의 치외법권적 대피소의 양상까지 보인다.
PCL은 에노모토 겐이치(榎本健一)의 희극에서부터 지다이게키(현대극)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만들어낸다. 도호는 사내에 영화기획, 제작을 담당하는 부서를 뒀다. 사원 프로듀서는 기본적으로 유명한 원작을 대상으로 기획을 했으며 원작에 대한 정보는 베스트셀러가 되기 전부터 각 출판사와의 네트워크를 통해 정기적으로 정보제공을 받는다.
이렇게 작성된 기획안은 사내에서의 기획 회의를 거쳐 승인을 받게 되고 기획개발에 들어간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작가를 정하고 섭외하고 진행하는 것 또한 기획을 한 사원 프로듀서가 맡는다.
PCL은 전용 배급 영화관이 없이 출발하여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1937년 간사이(關西) 사설 철도의 대주주이자 다카라즈카(寶塚) 가극단의 소녀 가극 경영자인 고바야시 이치조(小林 一三) 의 산하에 있으면서 도호(東寶)로 개명, 흥행의 어려움을 단번에 해소했다.
이후 SONY PCL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지만 그 뿌리는 같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 군부(軍部)와 적극적으로 유대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사업상 우위에 서게 된다. 게다가 특성상 도피처 역할을 한 까닭에 만주영화협회(약칭 滿映)가 만주국의 수도 신경(新京 : 지금의 長春)에 설립되어 국책영화에 착수하게 될 때 시류적 면에서나 인맥이 모두 도호에 의존하고 있을 정도로 많은 인력을 파견했으며 활발한 공동제작을 했다.
일본에서 활동하기 부자연스러워진 좌익, 우익, 군인 출신들이 기회의 땅이라는 만주로 찾아와 계몽영화와 오락영화를 제작했으며 전후에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八路軍)이 공산당 최초의 스튜디오로 삼아 중공(중국공산당)영화의 기초를 닦는 계기가 된다. 물론 이들이 귀국하여 ‘도에이(東映)’의 기초를 만들었기 때문에 도호의 역할은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경계에서 한 축을 담당한다.
다시 PCL로 돌아가서, 맨 처음 두각을 드러낸 것은 기무라 소토지(木村莊十二)로 훗날 조선 경성촬영소의 이규환 감독과 함께 춘향전을 같이 함으로써 우리 영화사에도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한데, 군국주의가 뒤덮기 전 최후의 경향주의 영화인 ‘강 건너의 청춘(1933)’, ‘남매(1936)’등을 발표하게 된다.
다른 한 사람은 바로 나루세 미키오(なるせみきお)로, 쇼치쿠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한 사람이면 족하다’는 다소 황당한 이유로 해고 당하자 이적하여 기량을 펼쳐 나가게 되는데 걸작 중에 걸작인 ‘아내여, 장미처럼(妻よ薔薇のやうに, Wife! Be Like A Rose!, 1935)’을 연출하여 뉴욕에서 일반에게 최초로 공개된 일본영화의 기록을 남긴다.
또 한 사람인 이시다 다미조(石田民三)는 ‘꽃은 져 버리고(1936)’를 통해 막부 말기 교토의 유흥거리를 무대로 활동하는 게이샤의 관점으로 외부의 정치적 변동을 그려내기도 했다.
그러나 앞서 기술하였듯 도피처 역할을 담당한 만큼 좌익 계열의 영화인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었기 때문에 훗날 노동쟁의로 심각한 인력난을 겪는가 하면 1948년부터는 영화제작을 중단하고 1947년부터 이 회사의 재정지원을 받아온 신도호(新東寶 )영화사에서 만든 영화를 배급하는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193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조선인 영화제작자본과 일본인 자본과의 연관성에 있어서도 도호는 중요하다. 1935년 조선인 영화업자들이 세운 고려영화협회(高麗映畵協會)와 조선영화주식회사(朝鮮映畵株式會社)는 30년대 후반의 조선영화제작을 이끈 주요한 영화제작회사로 이 중 고려영화협회는 일본의 영화배급회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며, 이들 회사의 도움으로 제작한 영화를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설립도 일본영화산업과의 연관성을 가지고 살펴보게 되면 중요인물인 이재명(李載明)이 도호의 전신인 PCL에서 근무한 바 있었다. 도호는 조선 영화사와 일본 영화사에 동시에 기록되는 영화사인 셈이다.<이훈구 시나리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