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⑭/ 프로키노와 경향영화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⑭/ 프로키노와 경향영화
  • 재팬올(japanoll)
  • 승인 2019.05.28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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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처음부터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광풍 한 가운데에 내몰린 것은 아니었다. 물론 1936년에 불발되기는 했지만 극단적 민족주의 장교들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이후 군국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내각이 들어서면서 ‘새 민족적 천황정치’를 확립하고 문부성에서 ‘민족적 정수의 기본 원칙들’을 발행하면서 비로소 영화계는 검열이 강화되고 친마르크스주의자로 알려진 예술가와 작가들이 연행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일본영화는 시대극에 허무주의를 도입하고 거기에 사회 모순을 둘러싼 현실비판 정신과 리얼리즘을 가미한 영화들 혹은 전국시대 영웅들을 재해석한 경쾌한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때만 해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나 ‘주신구라’의 주역인 오이시 구라노스케 (大石内蔵助)는 자유롭고 소탈한 서민형 인물로 묘사되기 까지 했다.

이러한 경향은 비록 새로운 체제 하에서 통제 되면서 잠시 주춤했지만 오늘날 그 전통은 일본영화계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오다 노부나가의 경우 유쾌한 해석으로 기회만 있으면 마츠리(축제)에 흥겨워 하는 서민의 존재로서 그려나가고 있으며 심지어 최근에는 타임루프에 ‘별사탕’의 유래까지 가미된 영화 ‘혼노지 호텔’(本能寺ホテル, 2017)까지 개봉하는 등 그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이 영화에서 ‘별사탕’은 아주 특별한 존재다. 오다 노부나가의 애용간식이면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모티브이기도 한데, 원래 별사탕은 포르투칼어로 '콘페이토(confeito)'라 불렸으며,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별사탕은 한자로 '금평당(金平糖)'이라고 쓴다.

이 콘페이토는 16세기 당시 아메리카 대륙 일대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만든 포르투갈인들이 개발한 상품으로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가 1569년, 나고야 성주였던 오다 노부나가와 교섭하면서 선물로 바치면서 포교 허락은 물론 카스테라와 함께 포르투갈이 원조이면서 일본에 현지화 된 음식으로 평가 받게 된다.

일본이 군국주의 혹은 민족주의로 흐르기에 앞서 짚고 넘어 갈 것은 바로 ‘프로키노’ 즉 경향영화(傾向映畫)다. 이 영화들의 조선의 카프문학 등 여러 가지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 받는데 유신을 거친 근대 일본의 지식층들이 1920년대 후반부터 점차 공산주의 붐에 휩싸이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섬나라의 특성상 외부의 유행에 워낙 민감했기 때문에 소련과 독일에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이 간행되고 도쿄의 카페에는 러시아풍 남자 상의를 입은 청년들로 넘쳐났다고 한다. 이때 좌익진영과 영화계가 의기투합하게 되는데 1928년에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NAPF)과 여기에 호응하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영화동맹(NCPE)의 조직이 바로 그것이다.

사사 겐주(佐佐元十)와 이와사키 아키라(岩崎昶)가 중심이 되어 9.5밀리 혹은 16밀리 필름으로 메이데이 행진과 노동쟁의를 촬영하여 전국 순회 상영을 1932년 국가의 탄압과 상영중지 시기까지 계속 전개해 나갔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상업 목적의 영화 상영과 동원 목적의 영화 상영이라는 두 축으로 서서히 영화는 갈라지기 시작하는데 영화 관람 체험은 이른바 ‘노는 영화’와 ‘주시하는 방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묘사되면서 아시아의 지식인들과 교류를 통해 공통의 체험을 공유한다.

당시 일본유학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중국 역시 일본 경향영화의 영향을 받은 운동들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중요 인물은 루쉰(魯迅)이다 그는 노예만도 못한 중국인의 삶에 대한 좌절과 분노, 그리고 ‘민족성 개조’에 대한 지식인의 소명의식으로 ‘아Q정전’을 집필한 바 있는데 일찍이 일본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바 있었다.

작가가 안 되었더라면 의사가 되었을 그는 일본에서 영향을 받아 1930년 3월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을 결성하는데 이때 인용한 것이 바로 이와사키 아키라(岩崎昶)의 저서 ‘영화와 자본주의’(映畵と資本主義, 1931)다.

그는 더 나아가 ‘선전 선동 수단으로서의 영화’라는 대목에 주목하고 주석을 달아 서구 자본주의의 영화들은 그 목적이 단순한 돈벌이에 있기에 중국인들을 어리석은 방향으로 교화시킨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 때문에 중국현실주의영화가 태동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자본과 국가에 의한 영화 통제를 비판하는 이와사키 아키라의 견해에 동조했다.

물론 프로키노와 이에 자극을 받은 상업영화계의 ‘경향영화’는 닮은꼴이면서도 달랐다. 고이시 에이이치(小石栄一)의 ‘도전’(挑戦, 1930)의 경우 노동쟁의와 스트라이크가 활발했던 시국에 알맞은 영화였다.

또한 스즈키 시게요시(鈴木重義)의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했는가’(1930)의 경우, 고아원의  소녀가 서커스단에 팔리면서 남자들의 놀이감이 되고 부르주아의 위선과 프롤레타리아의 비참함을 알고 나서 여자 소년원에 수용되지만 이 역시 위선적이라 방화범으로 연행된다는 스토리인데 이들은 사회참여는 하되 흥행도 고려하는 이중적 고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진보적 행보는 식민지 조선의 영화인들과의 합작을 가능케 한 측면도 있었다. ‘임자 없는 나룻배’(1932)를 만든 이규환 감독의 경우 교토의 데이코쿠키네마(帝国キネマ) 우즈마사(太秦)촬영소에서 도요타 시로(豊田四郎)와 스즈키 시게요시(鈴木重吉)의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이를 계기로 합작영화를 만들어 낸다. ‘나그네’(1937)가 그것으로 일본 개봉명이 ‘다비지(旅路)’였던 이 영화는 조선의 향토색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그네’는 기획 단계부터 일본 개봉까지 고려해 조선 영화사와 일본 영화사가 합작한 첫 번째 사례로, 각각 성봉영화원(聖峯映畵園)과 신코키네마(新興キネマ)가 나섰는데 조선이 각본, 감독, 배우, 로케 비용을 부담하고, 일본은 카메라 제공 및 촬영, 현상, 녹음 등 기술 지원을 맡아 조선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관객 동원에 성공했으며 일본 수출의 쾌거를 이뤄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들도 일본인의 기본 성향으로 인해 일시적인 것에 머물렀다. 일본인은 어느 이데올로기(기독교, 톨스토이주의, 마르크스주의)에서도 결정적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일본이 현재까지도 이슬람이 포교를 포기하고 이데올로기가 유행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며 내셔널리즘을 수용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성향 때문이라고 본다. 게다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싫증도 자주 느꼈기 때문에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만주국이 성립되자 민족주의 정치를 위해 헌신하는 영화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는 연극 배우들의 전기물을 만드는데 몰두하다가도 만주국의 성립을 알고 즉시 <満蒙建国の黎明>(1932)을 만들었고, 경향영화인인 스즈키 시게요시 역시 ‘동양평화의 길’(東洋平和の道, 東亜平和之路, 1938)을 제작했다.

정치 이데올로기가 한 때의 유행에 불과했기 때문에 1930년대에는 최루성 영화라 불리는 여성 멜로드라마가 대유행하기도 했는데 영화 포스터에 ‘3배로 울려 드리겠습니다.’라는 문구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영화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 때 일본의 영화산업은 정리가 필요하다는 기본인식이 팽배했는데 기존의 메이저 영화사들은 국가가 통제하더라도 신규 영화사와 자격미달의 영화사들을 정리해주길 바랬고 배우들의 경우 등록제를 도입해서라도 신인배우의 등장을 어렵게 하길 기대했다.

기존 영화인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이데올로기는 허울에 불과했던 것이며 나치독일과의 합작영화를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내셔널리즘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훈구 시나리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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