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 군국주의 시대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 군국주의 시대
  • 이훈구 작가
  • 승인 2019.06.17 13: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팬올에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을 연재 중인 이훈구 시나리오 작가의 거주지는 미국입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활동 중이었던 작가는 최근 미국(LA)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훈구 작가는 “미국에서도 연재는 계속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군국주의 시대’ 이야기는 그가 미국에서 보내온 첫 글입니다. <편집자주>

일본이 1931년 중국 동북부를 침략(만주사변)하면서 1932년 만주국이 세워지고 1937년부터 중국과 전면전에 들어가게 된다.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경계에서 일본의 지식인들은 협소해져 간다.

영화인들에게는 더욱 그 입지가 좁아지는 계기가 되는데 군국주의적 성격을 지닌 정부는 문부성을 통해 ‘새 민족적 천황정치’를 확립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윽고 1939년 10월, 영화산업은 직접적인 정부 통제를 받게 되고 정부 입장에서는 원활한 통제를 위해 영화사의 수를 축소하자는 의견이 대두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통제가 어떤 영화인들에게는 기회가 되는 역설을 낳는다. 쇼치쿠의 전성기도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이기 때문이다.

쇼치쿠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 가운데 기도 시로(城戶四郞)라는 제작자가 있는데, 그는 이 암흑기에도 수많은 영화인들을 발굴해 냈다. 오시마 나기사(大島渚)의 재능을 알아보고 파격적으로 감독 데뷔를 시켜놓는가 하면 나루세 미키오를 “쇼치쿠에 2명의 오즈는 필요 없다”며 방출한 이도 그다.

역설적으로 그는 20∼30년대 쇼치쿠를 지휘하면서 감독 중심의 스튜디오를 확립하는가 하면 정부의 통제에 유연하게 대처한다. 신파극과 가부키의 묵은 유산을 털고 내용과 스타일 양면에서 ‘모던한’ 영화들을 제작하고자 했으며 쇼치쿠의 감독들과 조감독들은 기도 앞에서 토론할 기회를 가졌고 외국영화들을 보면서 콘티를 그려가며 연구를 했다. 1941년부터 1945년 사이, 4년간의 상황을 제외하고는 쇼치쿠는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영화제작을 했다.

그러나 1939년 10월, 일본의 영화산업은 직접적인 정부 통제를 받게 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는데 ‘대형 영화사’의 수를 2개로 축소하기로 하는가 하면 영화검열을 강화해 나갔다. 1934년에 제정된 영화법은 영화제작을 완전히 국가의 관리와 통제 아래 두기로 하는데 예전의 검열보다 더 혹독했으며 감독과 배우는 모두 면허 등록제가 되고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검열을 받았다.

물론 독창적 발상은 아니었다. 나치독일의 영화통제정책을 역시 ‘일본화’하였다. 이와사키 아키라(岩崎昶)같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영화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확보와 새로운 경쟁자 제거를 위해 오히려 찬성하는 경향을 보였다.

심지어 1936년에는 나치 독일의 산악영화 감독인 아놀드 팽크(Arnold Fank)가 방일, 일본의 산악 풍경을 중심으로 한 ‘사무라이의 딸’을 제작하여 독일에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는데 이 때도 일본은 ‘일본화’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공동감독으로 선발된 이타미 만사쿠(伊丹万作)의 경우, 아놀드 팽크가 설명하는 낭만파적 숭고미학을 이해하기 보다는 자신의 특기인 풍자적 유머의 영화를 만들고야 말았다. 바로 ‘새로운 땅’이 그것인데 이 스토리는 문화 내셔널리즘 성격이 매우 강한 영화였다.

고스기 이사무(小杉勇)가 연기하는 주인공 야마토 테루오는 6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독일인 약혼자 게르다 슈톰을 데려오는데 이미 일본인 약혼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독일인 여성과 결혼하겠다는 말에 야마토의 가정은 뒤집어지지만 게르다 슈톰은 오히려 “일본인의 전통과 가치를 지켜야 한다”며 “가족의 말을 들으라”고 야마토를 설득한다.

게르다 슈톰 역시 일본 여성의 아름다움과 총명함에 이끌려 약혼자 미치코와 화해하고 결혼을 하게 되는데 만주국에 정착하여 일본 병사의 보호를 받으며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데 정열을 불태운다는 이야기이다.

다분히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영화이지만 독일과 일본 양국에서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였다. 독일 관객에게는 일본인의 문화적 순수성, 인종적 순수성을 본받으라고 선전하고, 일본 관객들에게는 ‘신천지’만주로 떠나라는 선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놀드 팽크가 선택한 하라 세쓰코(原節子)는 서양인의 체구와 용모의 여배우이자 동양인으로서 그의 의도에 맞게 ‘전형적인 일본 여성’을 연기한다. 그녀는 전쟁 기간 내내 활약을 했으며 이후에도 일본의 대표적인 여배우가 되는 모순을 낳기도 하였다.

그녀는 오즈 야스지로(小津 安二郎) 감독이 연출한 영화 ‘만춘’, ‘동경 이야기’ 등에 출연했는데 그녀의 경력이 오즈 감독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로 나눌 만큼 큰 영향을 줬다. 그는 오즈 감독 영화에서 착한 딸과 며느리 같은 이미지 덕분에 ‘영원한 처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라는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감독과 나루세 미키오(成瀬巳喜男) 감독 영화에도 출연해 ‘일본 영화의 황금시대’를 이끈 배우로 평가받았지만 한편에서는 국민여배우 이전에 ‘파시스트 미소녀’로 불리기도 했음을 상기시킨다.

형부인 구마가이 히사토라(熊谷久虎) 감독의 권유로 배우가 되었고 그의 영향에 의해 흥행 여배우가 될 수 있었다. 반면 이타미 만사쿠는 일생동안 ‘새로운 땅’의 실패와 좌절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고 반전영화를 통해 참회하였고 아들 이타미 주조(伊丹 十三)를 통해 블랙코미디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 나가게 된다.

영화계는 국가의 에누리 없는 통제에 질식하기 시작하고 쇼치쿠, 도호, 닛카쓰 등 대형영화사의 수를 2개로 축소하기로 결정하지만 당시 신코(新興)키네마의 사장이었던 나가타 마사이치(永田雅一)는 오히려 정부를 설득하여 ‘민족(民族)’이라는 제3의 영화사를 설립하는데 성공한다.

이 영화사는 훗날 전후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일본 최초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의 ‘지고쿠몬’(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등을 제작해 나가타 마사이치를 ‘영화계의 아버지’로 불리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전후 연합군 최고사령부로부터 공직 추방 조치를 받기까지 하는데 막강한 정계 인맥 덕분에 일명 ‘픽서(fixer·해결사)’로 불리며 심지어 일본 프로야구단 ‘도쿄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의 구단주가 되기도 한다.

이 영화사는 다시 ‘다이니혼에이가(大日本映畵)’로 개명하게 되었고 오늘날 ‘다이에이(大映)’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불행하게도 전시영화가 제작되던 시절 재정난에 시달리던 닛카쓰는 다이에이에 흡수되게 된다.

1937년 중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사사키 야스씨(佐々木康), 구마가이 히사토라(熊谷久虎), 야마모토 가지로(山本嘉次郞), 아베 유타카(阿部豊), 다자카 도모타카(田坂具隆)등의 감독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다른 영화인들이 저항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베 유타카는 남방으로, 우치다 도무(內田吐夢)는 협조 대신에 만주로 떠났다. 오즈 야스지로는 군복무를 두 번이나 했으며 미조구치 겐지는 외지로 파견 되었는데 장교 대우를 해주지 않자 국가주의에 호응하는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다.

이마이 다다시(今井正)와 도요타 시로(豊田四郞)는 조선으로 건너와 영화제작을 이어갔으며 그 제작 기반은 조선영화인과 일본영화인의 협업으로 영화를 만들던 경성촬영소였다. 당시 경성촬영소에는 일본 쇼치쿠 출신의 야마자키 후지에가 감독으로 입사해 조선 이름 김소봉(金蘇峰)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중 가장 주목 받는 이는 다자카 도모타카로 ‘5인의 척후병’(1938)에서 호전적 영웅주의를 부정하고 전장에서의 고생과 신뢰 그리고 전우애를 그려내 베니스 영화제에 입상한데 이어 1939년에는 ‘땅과 병사’를 연출하는데 이 작품은 낙오자가 속출함에도 아무런 이유 없이 행군하는 병사들을 그려낸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적군이 등장하지 않는다. 고통을 참고 자기 희생을 피할 수 없는 무영의 일본인들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다만 이 작품적 경향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덩케르크 (Dunkirk, 2017)’에서도 재현되는데 역시 적은 등장하지 않고 고통을 참으며 자기 희생을 피할 수 없지만 묵묵히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는 무명의 영웅들을 그려낸다.

도덕주의를 강조한 일본의 전시 하의 영화들은 따라서 전투의 비참함과 병사들의 고통을 강조하게 되면서 오히려 반전영화로 받아들여지는 역설을 낳게 된다. <미국 LA=이훈구 시나리오 작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