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 전시체제1) 검열과 재편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 전시체제1) 검열과 재편
  • 이훈구 작가
  • 승인 2019.06.27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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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팬올에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을 연재 중인 이훈구 시나리오 작가의 거주지는 미국입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활동 중이었던 작가는 최근 미국(LA)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훈구 작가는 “미국에서도 연재는 계속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군국주의 시대’에 이어 ‘전시체제1)’ 이야기 원고를 미국에서 보내왔습니다. <편집자주>

 

일본이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영화계는 검열과 위기 그리고 새로운 기회라는 아주 상반된 일들이 일어났다. 일본은 적어도 2차 세계대전 이전만 해도 미국 다음으로 ‘영화대국’으로 불렸으나 전쟁은 일본영화계를 지각변동으로 몰고 갔다.

연간 500편 가까운 작품을 생산해 내던 일본영화계는 종전(終戰) 시에는 고작 26편 정도의 영화제작에 머물러야 했는데, 그 이유는 강화된 검열 외에도 연합국 측의 경제제재로 인해 주로 미국에서 수입하던 이스트먼(Eastman) 필름의 수급문제도 있었다.

또한 가장 큰 문제는 1934년 제정된 영화법의 영향이 컸다. 영화제작을 완전히 국가의 관리 아래 두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제작과 배급이 허가제로 바뀌었고, 그러면서 수많은 영화인들이 또다른 기회를 찾아 일본 본토를 떠나게 되는 경향도 있었다.

일본의 영화인들은 입대를 선택하거나 만주, 조선, 대만 등 일본의 식민지 치하의 영화계로 자리를 옮겼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일부는 ‘국가’라는 큰 틀 안에서 입대 하거나 또는 영화통제정책을 통해 전시 정책에 헌신하면서 명분상으로는 저속한 영화를 몰아낸다는 논리 하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새로운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전쟁을 이용한 측면도 있었다.

감독과 배우가 모두 면허 등록제가 되고 작품들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당시 만들어진 영화들에 대해서도 호불호가 엇갈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테면 ‘전시체제이기 때문에 작품다운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견해와 ‘해외 영화의 영향을 벗어난 독자적 발전으로 순수한 양식이 완성(영화 이론가 노엘 버치)되었다’는 그래서, 양식의 해체기라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

만주사변 이후, 전시체제하의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통한 아시아 전체의 단결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영화’는 이러한 식민지정책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했다. 일본의 영화 정책과 영화의 성격은 전쟁 이전과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만주, 조선, 대만과 같은 식민지와 점령지였던 동남아 일부 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영화 정책을 펴나갔는데 이는 나치독일의 정책을 모방한 것이었다. 물론 일본 본토와 식민지 영화 정책은 유사한 듯 보이면서도 각각의 차이점은 존재했다.

그러나 필자가 종전의 견해와 달리 보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일본의 영화법이 수많은 영화인들로 하여금 식민지로 건너가 어떤 형식으로든 영화발전에 이바지한 측면도 있었다는 점이다. 지금도 장춘이 중국 내에서 상하이와 더불어 ‘2대 영화산업단지’가 된 점이라든가 심지어 전시, 전후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영화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전시 체제 하 일본영화인들은 방랑 혹은 입대나 몰락 등 다양한 길을 걸어갔다.

아시아 전역 영화계의 씨앗이 역설적이게도 이 때 일본 출신의 영화인들을 통해 뿌려졌으며 오늘날까지 그 명맥이 이어져 온다는 것이 이채롭다. 비록 야만적 식민통치는 온 인류에게 상처를 안겨주었지만 1938년 국민총동원령과 1939년 영화법 제정 이후부터 45년 종전까지 일본의 영화인들은 곳곳에서 그들만의 스타일로 합작 혹은 영화를 만들어 나갔다.

여기에서 특징적으로 살펴 볼 문제는 진영논리와 일본의 관계다. 흔히 한국적 시각으로 일본의 극우, 좌익 등 이분법적 시각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그건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있을 법한 얘기이다.

적어도 전시 체제 하의 일본은 이와사키 아키라(岩崎昶)처럼 투옥된 극소수의 영화인들을 제외 하고는 대부분 진영논리를 떠나 ‘반미(反美)’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고 이러한 특성 때문에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국가주의에 호응하는 경향을 영화 속에 녹아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일본의 ‘전체주의’적 국민성에도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국가나 천황이 자신들보다 우위에 있고 국익에 있어서는 단일대오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국책영화를 만든다는 큰 틀 안에서 자신들의 예술세계나 영화철학을 녹여나가기도 했다. 

한국의 대다수 영화평론가들은 일본의 영화들이 태생적으로 극우적 경향을 보인다고 주장하고 이 영화들이 ‘반전영화’로 포장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우지 못한다. 하지만 전후(戰後)의 일본영화 속에서 그들은 ‘왜 일본은 패망하였는가?’에 관한 깊은 탄식을 하고 이따금 이에 대한 반성을 하기도 하면서 그 시절을 회상하는 영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또한 대만의 경우는 후에 살펴 볼 일이지만 워낙 일본 식민지 정책이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바람에 오히려 지금도 합작영화들을 양산해 내기도 했다. 특히 마지상(馬志翔) 감독의 대만, 일본 합작영화인 ‘카노(KANO, 2014)’의 경우 나가세 마사토시(永瀬正敏), 오오사와 타카오(大沢たかお), 사카이 마키(坂井真紀) 등 일본의 유명배우들이 총출동한 영화로 일본 식민지 시절의 한 고등학교 야구부를 배경으로 일본의 헌신적인 교사가 대만인과 일본인이 혼성된 팀을 이끌고 고시엔(甲子園)대회에서 준우승을 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 도중 고시엔의 개막식 장면에서 만주, 경성 등 당시 식민지 야구부가 등장하고 일본에 의해 수로가 정비되는 등의 어찌 보면 식민지 시대 국책영화 같은 분위기의 영화이지만 대만인들에게는 향수를 불러 일으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의 90%가 중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나오고 자막처리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대만인들은 전혀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끼친 영향 탓이기도 한데 조선이 ‘이왕직(李王職: 일제가 이씨 왕가의 업무를 맡기 위해 계승한 부서)을 지킨다’는 조건 하에 강제 합병이 이뤄지고 만주 역시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부의’를 데려다가 꼭두각시 괴뢰국을 세운데 반하여 대만은 51년간 이라는 시간 동안 근대화의 기틀을 닦는데 있어서 일본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대만인들에게는 일종의 ‘계몽영화’로 인식된 경향이 크다.

대만이 일본의 훗카이도 이후 두 번째 식민지였다는 점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본국의 영화 환경의 야만성을 피해 건너 간 대다수 일본 출신 영화인들의 영향도 컸다. 이들은 국책영화나 선전 선동영화를 지향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각 식민지 영화인들이나 관객의 구미에 맞는 영화들을 선택하기도 하여 흥행성은 물론 자신들이 본토에서 만들 수 없는 장르와 소재의 작품들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봤다.

하여 수많은 영화인들이 외유의 길을 나섰고 각각의 식민지에서 영화사들을 설립하게 된다. 닛카쓰가 주로 제작을 담당한 대만을 제외하고는 조선에서는 ‘조선영화사’(일명 朝映), 만주에서는 ‘만주영화사’(일명 滿映)을 설립하여 합작영화 혹은 직접 제작을 통해 각각의 영화산업에 대한 명맥을 이어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러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활발하게 제작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국산필름 마저도 군수품으로 지정되어 민간인이 사용하기란 불가능했고 필름 확보가 영화사들에게는 회사의 운명을 거머 쥔 문제였다.

그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영화사들의 재편작업이 이뤄졌다는 점과 군부의 기록영화 요청에 의하여 항공촬영기술과 미니어처 제작 등 기술혁신은 물론 서구영화를 수입할 수 없는 식민지 영화계의 영화들을 수입하거나 시장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이 종이연극(이하 가미바사이: 紙芝居)과 영화를 식민지 국가들의 주요 교육선전 수단으로 삼았는데 이중 가미바사이는 종전 후 급속히 사라지고 영화만 살아남은 것은 나름대로 토착 영화인들과의 합작을 통해 현지에 뿌리내린 측면도 있다.

가미바시이의 목적이 국어(일본어) 보급이었기 때문에 이 경우 각본을 공모, 우수작을 제작하고 일본어를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모두에게 활용하기 편리하도록 양국어를 병기하기도 했으나 워낙 성격이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내포하는데다가 강요된 매체이면서 전쟁선전의 수단으로 인식되었던 탓에 태생적 한계가 분명했다.

반면 영화의 경우 패전 후 기자재가 연합국 측에 몰수 되고 영화인들이 억류되어 현지의 영화인들과의 협업이 한동안 이뤄졌기 때문에 그 영향이 오래도록 남았다.

한국의 경우에도 20세기 내내 영화계 현장에서는 일본식 용어들과 교재들이 넘쳐났고 일본영화 수입이 오래도록 금지되어 있었지만 이미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수입금지 조치 덕분에 그들의 컨텐츠를 모방하거나 카피한 작품들이 종종 흥행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심지어 수입 이후에는 오히려 일본이 한국의 영화를 카피했다고 주장하는 일들도 생겨날 정도였다. <미국 LA= 이훈구 시나리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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