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⑰/ 전시체제2) 문화선전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⑰/ 전시체제2) 문화선전
  • 재팬올(japanoll)
  • 승인 2019.07.0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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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전시체제라는 특수한 상황이었지만 영화인들의 저항은 매우 수동적이었으며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거나 위장으로 협력 혹은 식민지 각처로 흩어지는 방식으로 그 시기를 맞았는데 개인적인 예술표현이 상대적으로 제한되고 힘들었던 상황에서 그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으로는 서구영화와 단절되고 일종의 식민지 지배의 용이함이나 문화선전도구로서 영화를 제작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펼치고자 하는 영화세계란 묻혀버려야 했기 때문에 차라리 지식인들 가운데서는 서양의 근대문화에 회의를 느끼느니 일본의 미학적 전통으로 회귀하자는 움직임도 일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의 전시체제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게 되는데 일본의 ‘숭고한 정신’이야 말로 이미 퇴보한 유럽문화나 물질문명의 잔재에 지나지 않는 신대륙 미국문화에 비하면 우월하다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서양문화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풍토가 아니었고 나치 독일에 의해 프랑스 파리가 점령되었다는 보고는 그들에게도 자극제가 되었다. 이들은 식민지배나 통치야 말로 일본의 숭고한 문화와 정신세계를 전파하고 동화시키면서 퇴락한 유럽문화나 미국문화로부터 동양의 사상을 지켜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심지어 1942년에는 교토의 철학자를 중심으로 ‘근대(近代)의 초극(超克)’심포지엄이 개최되어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이른 시기에 포스트 모더니즘이 논의될 정도였다.

일본이 이러한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게 된 계기는 역사적 유래가 깊다. 섬나라라는 특성상 외부 문화의 유입이 컸던 것이 사실이고, 고대 일본의 경우 주로 한반도와 중국 등에서 수용된 문화와 종교가 일본의 기초를 쌓은 반면 중세시대 이후에는 아무리 통치세력들이 ‘쇄국’을 논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교역과 문화교류의 창구를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이들에게는 외부 문화를 수용하는데 있어서 몇 가지 원칙이 적용되었는데 ▲종교를 식민지 침투의 수단으로 삼거나 ▲내정간섭 ▲사상의 전파 같은 것들은 철저하게 제약 받았으며 심지어 개항이나 무역이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다 할지라도 이들을 위해 인공섬(데지마, 出島)을 만들어서라도 외국인들을 철저하게 외부와 격리시켰다.

다만 일본은 종교 같은 서양문명을 거부하는 대신 그 안에서 필요한 것들을 발췌하여 이질적인 것이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이른바 ‘이화(異化)’정책을 펼쳐나가게 되는데 이를 통해서 생활양식이나 음식, 물건, 의복 등은 도입하지만 정신세계만큼은 일본의 고유적인 것들을 지켜나가는 전략을 썼다.

그러므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경쟁적으로 일본에 선교와 무역을 병행하려 했을 때에도 예수회의 신부들은 스스로 육식을 거두고 의식주를 일본풍으로 바꾸는가 하면 초라한 복장을 선호하지 않는 일본인의 특징을 받아들여 수도회의 원칙에 어긋나는 실크옷을 입어 사제로서의 품위를 지키기도 했다. 때문에 포교원칙도 ‘일본인에게 순응하는 것’이 최우선일 정도였다.

따라서 일본은 포르투갈로 스페인(이들이 가톨릭을 앞세워 남미를 정복한 사실을 안 후)을 먼저 견제한 후 다시 가톨릭을 탄압하면서 포르투갈인을 국외로 추방 한 후 프로테스탄트인 네덜란드를 통해 포르투갈을 견제하는 한편 교역을 포기하기에 앞서 거래처를 바꾸는 치밀함을 보였다.

심지어 1600년에 네덜란드 판델하밴 회사 소속 선박인 리푸데호가 오이타현(大分県) 우스키(臼杵駅) 북부 지역에 표착하자 당시 집권자인 센고쿠 시대 최후의 승리자이며 에도 막부 시대 초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이 배에 타고 있던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를 오사카로 소환한 후 외교고문으로 중용한 후 1609년 네덜란드, 1613년에는 영국과도 통상을 개시하였다.

이를 통해 이에야스는 자신이 일본의 외교권을 가지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선포하고 네덜란드와 일본을 통해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견제했는데 이 때에도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남만인(南蠻人)’, 네덜란드와 영국을 ‘홍모인(紅毛人)’으로 구별하여 불렀다.

이때에도 일본 특유의 동화정책이 시행되어 윌리엄 애덤스는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이라는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였고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함께 표착한 네덜란드인과 함께 80톤, 120톤의 유럽식 범선을 설계하여 만드는 한편 네덜란드로 하여금 무역허가를 얻게 하여 히라도(平戶)에 외국인이 경영하는 상점인 상관(商館)을 설치했다.

이러한 정책은 메이지 유신이 있기 전까지 막부시대에도 외부와 교역을 통해 쇄국만은 막았고 네덜란드를 통해 얻은 지식은 ‘난학(蘭學)’이라는 학문으로 정립되었다. 이중 의학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무엇보다도 서양문명 중에 물건에 잡착하였고 이를 일본화 하는 과정에서 ‘남만’이나 ‘홍모’가 아닌 ‘란(蘭)’이라는 새로운 가치기준을 만들어 서양에서 수입한 사상이나 물건에 대한 일본적 해석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갖게 했다.

또한 나가사키는 비즈니스센터의 역할 뿐 아니라 서양의 서적, 의학, 식물학, 물리학, 천문학 등 서양의 첨단 과학기술이 들어오는 창구가 되어 주었다. 따라서 입항하는 네덜란드 선박은 반드시 유럽과 아시아의 최신정보 보고서를 에도막부에 제출하도록 의무화하였는데 이를 ‘네덜란드 풍설서’라고 불렀다.

다만 쇄국과 기독교 금교령은 유효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지식인들은 ‘나가사키’로 유학을 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설탕, 별사탕, 카스텔라, 단팥빵, 카레라이스, 돈가스로 이어지는 서양문화의 수용과 일본화, 오랫동안 육류 섭취를 법으로 금지했었고 이 때문에 ‘소고기’를 문명개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일 정도였던 일본의 서양문화 수용이 훗날 식민지 지배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대략 짐작이 갈 것이다,

또한 중국대륙으로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문물을 받아들인 것과 별개로 초기 포르투갈인으로 대표되는 일명 ‘별사탕로드’를 통해서 들여 온 비누, 안경, 유리, 망원경, 카르타, 시계, 인쇄기술, 서양의학, 서양음악, 서양회화와 신대륙에서 발견된 새로운 식물들은 일본에 생활혁명을 가져왔던 것이다.

특히 ‘카르타’의 경우 서양의 트럼프에 해당하는 것인데 화려한 색채의 유럽풍으로 그려진 총 48장의 카드를 일본화 하여 카르타(カルタ)가 만들어졌다. 그 중 4계절과 12개월의 꽃을 정하여 4장씩 만든 카드를 ‘꽃 카르타(花カルタ)’라고 불리게 되고 오늘날 화투(花鬪)가 되어 일본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들 서민들의 오락수단이 되었다는 것만 해도 그들의 일본화와 식민지 지배전략이 얼마나 치밀한가를 알 수 있다.

신대륙을 발명한 컬럼버스가 후추라고 생각한 ‘고추’ 나 토마토, 감자, 고구마, 옥수수, 가지, 시금치, 호박을 한반도로 유입시킨 것도 알고 보면 ‘별사탕로드’를 통해 일본에 들여 와 다시 식민지로 전파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가 음식, 의복을 비롯 생활을 바꾸고 서양문화의 수용을 통해 이질적 문화를 일본화 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문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듯이 ‘문화통치’를 통해 식민지배를 하고 이를 통해 토착화 한 사례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오랜 기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은 여러 형태로 일본이 그 흔적을 남겼고 대만 등은 기본적으로 이 흔적을 부정하지 않는 자세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일본은 제목 자체만으로도 전의를 고조시키고 하나의 강령(綱領)인 영화들을 제작하는 한편 식민지 곳곳에 일본영화를 이식시키는 작업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병행되었다. 이 흔적은 오래도록 남아 지금까지 유지 되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미국 LA= 이훈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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