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⑱/ 전시체제3) 만주영화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⑱/ 전시체제3) 만주영화
  • 이훈구 작가
  • 승인 2019.07.25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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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에이(滿映)의 아이돌'로 평가받았던 이향란(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 2014년 9월 7일 사망을 알리는 호외(왼쪽)와 자서전(오른쪽)
‘만에이(滿映)의 아이돌'로 평가받았던 이향란(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 2014년 9월 7일 사망을 알리는 호외(왼쪽)와 자서전(오른쪽)

만주영화, 즉 ‘만에이(滿映)’에 대해서는 분명한 '공과 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일본 영화의 경제학’에 대해서 바라보자는 것이고, 역사적 평가와 야만성은 역사학자들에게 미루고 싶다. 경제전문 매체에서 역사적 평가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필자는 이 만주영화가 어떻게 경제학적으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녹아 들어갔는지에 대한 부분과 그 이후의 파장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다.

사실 대만, 만주와 달리 한국은 일본과 이왕직에 의해 ‘강점’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대만의 경우는 오히려 근대적 발전을 가져오고 만주의 경우 역시 황량한 벌판에서 중공업단지로 변모했다는 경제적 측면이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에 역사적 평가를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대만은 장제스가 대륙에서 후퇴할 당시 일본 민간인들의 안전 귀국을 보장하면서 구 관동군 장교들을 영입, 국민당군의 대만 방어 작전을 수립하기도 하였고 만주는 일본이 영구적으로 지배할 목적으로 중공업 육성 및 기반시설(댐 등) 건설을 해 놓아 국민당, 공산당 모두에게 빼앗길 수 없는 지역으로 평가 받았다.

역사적 사실로도 종전 이후 중국주재 미국 대사의 중재로 장제스와 마오쩌뚱이 만나 만주는 공산당이 지배하고 나머지는 장제스의 국민당이 지배하는 안을 내놓았지만 우리가 만주웨스턴에서 만나던 그 ‘만주가 아닌 다른 만주’의 가치 때문에 국공내전이 다시 시작된 계기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만에이’의 경제학적 측면을 살펴보고 만에이가 이후 아시아에 뿌린 영화인들과 시스템 등은 충분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그들이 오락영화와 계몽영화를 번갈아 만들고 정작 만주지역에서는 외면을 받았으며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친일 아이돌’을 양산해 내었는지는 몰라도 일본영화의 경제학적 측면에서 1942년 이후 이미 본토에서 필름이 바닥났다는 이유 등으로 위축된 제작환경에서 영화인들에게 만주는 기회의 땅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만주를 지배하고 더 나아가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하는 수단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척박한 동북3성에서 중국 2대 스튜디오(장춘)가 건립되고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중국에서조차 이어오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당시 만주는 이따금 제작되는 ‘만주 웨스턴’영화들에서 보듯이 수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흘러들어와 있었다. 중국인, 만주인, 일본인, 조선인은 물론 한탕을 노리고 들어 온 각국의 사람들과 러시아 혁명 후 공산화를 피해 도망쳐 온 백러시아계 이주민들까지 그야말로 글로벌한 지역이 만주였기 때문에 그 어떤 영화를 만들더라도 배우를 수급하는 문제 만큼은 여유가 있었다.

만에이의 본래 목적은 현지인을 위로하고 계몽하는 문화선전영화와 일반 극영화를 제작하는 것이었고 1941년에는 연간 30여 편의 오락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일본에서나 만주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일본인이 만주인의 생활풍습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국적 정서를 주기 위해 기획되었다 할지라도 만주인 배우가 중국어로 연기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주인들 역시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비록 조선인들처럼 ‘항일의지’가 불타는 일은 없었지만 엄연히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영화에 대하여 회의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

항일의지와 관련, 첨언하자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중국 공산당, 즉 팔로군은 항일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민당 군에 쫓겨 조직이 궤멸상태였고 동북3성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열 항일투쟁은 대부분 조선인들이었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 1호 대회도 중국 화룡에서 열렸는데 주축은 조선인들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현재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화룡의 공산당 1호 대회를 마치 중국 공산당의 찬란한 출발로 자랑하고 있는데 사실은 조선인 계열 팔로군들의 출정식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근자에 들어 북간도에서 있었던 팔로군과의 싸움 역시 중국인은 거의 없고 조선인대 조선인의 싸움이 대부분이었다. 팔로군이 된 조선인과 만주군이거나 국민당 군에 복무하던 조선인이 그것이다. 이들 대부분 일제 말기 광복군에 편입되기 전 까지는 엄연한 현실이었고 이들은 당시 6.26전쟁으로 인해 국군과 연안파 인민군으로 바뀌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맛보게 된다.)

더 나아가서 만주인들은 일본인들의 사과 표현인 ’고멘나사이(ごめんなさい: 용서하십시오)의 중국어에 해당하는 ‘뚜이부치(对不起) : 마주 대할 수 없다,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빗대어 만주영화를 ’뚜이부치영화‘라고 불렀다. 즉 마주 대할 가치조차 없는, 볼거리가 없는 형편없는 영화라는 험담인 것이다.

그러나 만에이에도 이른바 ‘만에이 아이돌’은 있었다. 리밍(李明), 이향란(李香蘭: 중국 발음 리샹란)이라는 스타가 바로 그들인데, 이중 리샹란(이향란)의 스토리는 매우 흥미롭다. 리샹란의 본명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 그녀는 1920년대에 펑톈(선양)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아버지의 친구이자 선양은행 총재였던 리지춘(李際春) 장군의 명목상 양녀가 됨으로써 ‘리샹란’이라는 중국식 이름을 얻었다.

당시 중국 상류사회에서 종종 볼 수 있던 풍습이었는데 그녀는 미모뿐만 아니라 뛰어난 어학 실력과 가창력을 갖추었기에 만에이에 스카우트 되었다. 당시 만주국에서 스타는 여성들이 동경하는 대상이었다. 그녀는 만에이의 간판 스타였기에 일본의 도호(東寶)에서 당대의 스타인 하세가와 가즈오(長谷川 一夫)와 공연하기도 했다.

특히 1940년 후시미즈 슈(伏水修)가 연출한 ‘중국의 밤’(支那の夜, 도호영화사) 전후편으로 갱(국제항구, 액션), 순정파, 청순가련형 소녀 등 흥행요소를 두루 갖췄다는 평을 받았다. 당시 대부분 일본인 관객들이 그녀를 중국인으로 믿은 나머지 대동아공영권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회자 되었고 1944년 만에이를 탈퇴한 이후에도 상하이에서 가수로 활동하다가 1946년 2월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녀는 주로 상처 받는 여성상을 연기했는데 1950년대 할리우드로 건너가 ‘샤리 야마구치’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고 귀국 후 정계로 자리를 옮겨 결혼했다. 결혼으로 얻은 이름인 오다카 요시코(大鷹淑子, おおたかよしこ)로 18년간 자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 까지 했는데 1970년대 베이루트에 가서는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아라파트의장과 일본 적군파의 인터뷰 촬영에 성공하여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삶은 ᐅ평생 그녀가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의 논쟁을 불러 왔고, ᐅ뮤지컬로도 만들어져 일본과 중국에서 크게 히트했으며, ᐅ중국을 방문 했을 때에도 국적 논란이 있었다.

아이러니 한 것은 만주일대가 팔로군 계열 항일 빨치산들의 본산이었던 까닭에 북한의 김일성도 일제 때 ‘이향란의 영화’를 보았고 그 인연으로 일본자민당유지의원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한 적(자서전의 중국어판 ‘나의 반생’(我的半生), 吉林文史出版社)도 있다고 하니 영화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일본 가정에서 태어나 중국학교를 다녔고 성악도 배운 그녀의 일생은 일본의 식민통치의 모범사례였을 것이다. 게다가 1943년 제작된 ‘나의 휘파람새’의 경우 러시아어로 제작된 뮤지컬 멜로드라마였으니 그녀는 만주가 국시로 내건 ‘오족협화(五族協和: 조선, 만주, 몽골, 중국, 일본 등 5개 민족이 화합해야 한다는 정책)’에도 부합되는 만주국의 ‘아이돌’이었다.

 1945년 만주국이 몰락하자 점령군인 소련군은 만에이의 기자재와 필름을 몰수했고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게 이 스튜디오를 넘겨줌으로써 중국 공산당 최초의 촬영소가 되었다. 그러나 잔류한 일본인 스탭들에게 기술협력을 구했지만 일본인 스탭들이나 만주인 스탭들 그리고 조선인 스탭들은 동아시아 일대로 흩어졌다.

특히 대다수가 홍콩과 대만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중 카메라맨 니시모토 다다시(西本正)의 경우는 패전 후 일본으로 복귀하여 신도호(新東寶)에서 메이지 천황을 소재로 한 영화를 촬영했는가 하면 1960년대에는 만에이의 인연으로 홍콩으로 건너 가 후진챈(호금전, 胡金銓)과 리샤우룽(이소룡, 李小龍)의 반일영화에서 촬영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만에이는 전쟁 이후에도 반세기 동안 수많은 영화인들이 아시아 곳곳에서 정체성이 불분명한 행보를 보이게 했는데 복잡한 인생행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앞서 강조하였듯이 네기시와 마키노에 의해 도에이(東映)의 기초를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전쟁과 식민지 그리고 전시체제 하의 영화인들이 만들어 낸 아이러니다. <미국 LA=이훈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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