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선구자들④/ 위스키의 아버지
일본의 선구자들④/ 위스키의 아버지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19.09.27 1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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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유학 다케쓰루 마사타카(竹鶴政孝)
일본 토종 양조 장인 도리이 신지로(鳥井信治郎)
1929년 일본 최초 위스키 산토리 시로후다 생산

#1.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여행
오래전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위스키의 본고장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로 ‘위스키 순례여행’을 떠났다. 그가 방문한 스코틀랜드의 마을은 아일레이(Islay)라는 섬. 스코틀랜드의 서쪽 귀퉁이에 붙은 이 마을에서 하루키는 싱글 몰트 위스키를 제대로 맛보았다.

하루키는 여행을 다녀와서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もし僕らのことばがウィスキーであったなら)이라는 얇은 책을 내놓았다. 사진은 그의 아내가 찍었다. 하루키는 아일레이 섬에서 맛본 위스키의 감상을 이렇게 적었다.

<아일레이 섬의 작은 펍 카운터, 7개 증류소에서 만든 위스키를 일렬로 세우고 맛을 서로 비교해보던 날. 그날은 기분 좋게 갠 6월의 어느 오후 1시였다.>

원문:
アイラ島の小さなパブのカウンターに、7つの蒸留所のウィスキーを並べテイスティングした日。それは、気持ちよく晴れた六月の、午後の一時。

하루키 문체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하루키는 “또 아이가 태어나면 사람들은 위스키로 축배를 든다. 그리고 누군가 죽으면,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위스키 잔을 비운다. 그게 아일레이 섬”라고 적었다.

#2. ‘도라지 위스키’는 이렇게 생겨났다
그런 하루키가 만약 이 위스키를 맛봤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한국의 ‘도라지 위스키’다. 이젠 어느 가수의 노래 가사에서만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추억의 술. 이 도라지 위스키엔 스카치 원액이 한 방울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물론 도라지도 없었다. 60~70년대 이 술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원래 부산의 한 양조장이 일본 위스키인 토리스(torys) 유사 상품을 제조, 상표를 ‘도리스 위스키’로 했다고 한다. 상표 위조 혐의로 구속됐다 풀려난 양조장 사장은 이후 이름을 ‘도리스 위스키의 자매품’이라는 문구를 내세운 ‘도라지 위스키’를 내놓았다고 한다.(한국학중앙연구원 주영하 민속학 교수)

토리스 위스키가 도리스 위스키로, 다시 정체불명의 도라지 위스키가 된 것이다. 도라지 위스키를 태어나게 한 토리스는 일본 주류회사 산토리(Suntory)가 1946년 출시한 위스키다.

1950년대 이후 일본 고도 성장기가 시작되면서 토리스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가게(bar)들이 속속 생겨나게 되었다. 토리스를 만든 산토리 위스키의 역사는 192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로 불리는 다케쓰루 마사타카와 그의 아내 리타. 오른쪽은 '도라지 위스키' 탄생 배경이 된 산토리의 '토리스 위스키'.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로 불리는 다케쓰루 마사타카와 그의 아내 리타. 오른쪽은 '도라지 위스키' 탄생 배경이 된 산토리의 '토리스 위스키'.

#3.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 다케쓰루 마사타카
<사람들이여 깨어나라! 이미 수입품 맹신의 시대는 가버렸으니, 취하지 않는 사람들이여. 우리에게 국산 최고의 맛있는 술 산토리 위스키가 있다!>(醒めよ人! すでに舶来盲信の時代は去れり 酔わずや人 我に國産至高の美酒 サントリーウヰスキーはあり!)

1929년 4월 출시된 일본 최초의 위스키 ‘산토리 시로후다’(白札)의 신문 카피 내용이다. 희망적으로 출시 했음에도 불구하고 “맛이 강하고 마시기 어렵다”는 평판이 대부분이었다. 반품이 이어졌다고 한다. 위스키의 스타일을 두고 시로후다를 만든 두 장인은 서로 결별하게 된다.

한 사람은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로 불리는 다케쓰루 마사타카(竹鶴政孝:1894~1979), 또 한 사람은 그를 초빙한 고토부키야(寿屋: 현 산토리)의 창업자 도리이 신지로(鳥井信治郎:1879~1962 ).

양조장을 운영하던 집에서 태어난 다케쓰루 마사타카는 양조회사에 다니다 1918년 스코틀랜드로 양조유학을 떠났다. 캠벨타운(하루키가 위스키 순례한 바로 아랫동네)이라는 곳에서 실습을 하게 된 그는 만년필을 들고 다니며 증류소의 노하우를 일일이 노트에 적었다고 한다. 1920년 현지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 같은 해 귀국했다.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는 국제결혼이었다.

재정적 어려움으로 위스키 제조를 포기하고 중학교 교사 생활을 하던 다케쓰루 마사타카를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도리이 신지로였다. 하지만 둘은 공장 입지를 두고 이견을 보였다.

다케쓰루 마사타카는 “스코틀랜드 풍토에 가장 가까운 홋카이도로 하자”고 주장했지만, 도리이는 “홋카이도는 오사카에서 너무 멀다”고 반대했다. 다케쓰루가 기온, 습도, 토양 등을 고려한 반면, 도리이 신지로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결국 오사카 평야와 도쿄 분지 접점인 안개가 많고 양질의 물이 솟아나는 야마자키(山崎)를 부지로 택했다. 1924년 11월 도리이 신지로는 야마자키 증류소를 건설하고 위스키 연구소 소장으로 다케쓰루 마사타카를 초빙했다. 그렇게 내놓은 첫 제품이 위에서 언급한 산토리 시로후다였다.

첫 제품의 실패는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줬다. 다케쓰루 마사타카는 유학 경험을 살려 정통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재현하려 했고, 도리이 신지로는 일본인의 입에 맞는 일본산 위스키를 추구했다.

도리이 신지로의 곁을 떠난 다케쓰루 마사타카는 홋카이도 요이치(余市)에 증류소를 세웠고 닛카(日果) 위스키라는 별도의 회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정통 위스키를 추구하다 경영에 어려움을 겪게 된 닛카는 결국 1954년 아사히 맥주의 산하로 흡수됐다. 하지만 닛카 위스키는 여전히 정통 위스키를 사랑하는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상대적으로 재정이 넉넉했던 도리이 신지로의 산토리는 국내를 넘어 대규모 M&A를 성공, 세계 최고의 위스키 회사로 올라섰다.

일본이 위스키 강국인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버금가는 기술력을 보유한 데는 이런 산토리, 닛카 두 회사의 경쟁 구도가 크게 한몫 했다.<에디터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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