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선구자들⑤/ 도쿄 디벨로퍼
일본의 선구자들⑤/ 도쿄 디벨로퍼
  • 에디터 김재현
  • 승인 2019.10.01 1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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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토교통성은 매년 3월 하순 일본 전역의 땅값(공시지가)을 발표한다. 도쿄, 오사카, 나고야 3대 권역 등 2만1500 곳이 그 대상이다. 일본에서 가장 비싼 땅은 도쿄의 긴자(銀座)에 있는 야마노악기(山野楽器) 긴자본점이다. 이곳의 지가(地價)는 매년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도쿄 가장 비싼 땅값...엽서 크기 한 장에 950만원
국토교통성이 발표한 올해 자료에 따르면, 야마노악기의 땅값은 사상 최고가인 1㎡당 5720만엔(6억3500만원, 지난해는 5550만엔)을 기록했다. 이를 평으로 환산하면 1평당 1억 9000만엔(21억 1000만원)이다. 이를 손바닥 크기로 쪼개보면 어떨까.

일본시사매체 주간겐다이는 “엽서 1장 크기의 땅값이 85만엔(944만원)이라니 놀랍다”(ハガキ1枚の大きさで約85万円というから驚きだ)고 했다.

매년 치솟는 땅값만큼, 도쿄의 스카이라인도 해마다 바뀌고 있다. 이런 변화를 만들어 가는 그 뒤에는 일본 부동산 개발업체 모리빌딩그룹이 있다. 일본의 선구자 시리즈 5편은 부동산 디벨로퍼(개발자) 모리 미노루(森稔: 1934~2012)이다.

도쿄 스카이라인 바꾼 디벨로퍼 모리 미노루 회장
‘모리빌딩’이라는 회사를 세운 건 아버지 모리 다이키치로(森泰吉郎:1904~1993)지만, 실질적인 창업주는 그의 차남 모리 미노루였다. 모리 미노루는 2012년 3월, 심부전증으로 사망(당시 77세)했다. 닛케이비즈니스는 당시 “도쿄를 만든 남자, 모리빌딩의 모리 미노루 회장이 사망했다”(東京 を作った男 森ビル・森稔会長死去)는 제목을 달았다.

1959년 도쿄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버지 회사에 이사로 입사한 모리 미노루는 상무(1964년), 전무(1969년), 사장(아버지가 사망하던 해인 1993년)직에 올랐다. 그는 도쿄의 과밀화 해결책으로 고층빌딩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빈 토지를 사들여 공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그의 생각은 도쿄 롯폰기힐즈 (Roppongi Hills) 단지 개발로 이어졌다. 도쿄의 스카이라인을 바꾼 것이다. 이후 일본을 넘어 101층의 중국 상하이국제금융센터(Shanghai World Financial Center)를 건립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모리가(家)의 재산 불리기가 시작된 그의 아버지 모리 다이키치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도쿄 미나토 구에서 태어난 다이키치로의 집은 쌀 도매상을 했다. 대학(히토츠바시 대학)을 졸업하고 고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는 태평양전쟁 후부터 본격적인 투자업에 나섰다. 예를 들면, 미나토 구의 토지를 사들여 빌딩 사업에 진출한 것. 소유 부동산을 담보로 은행에 대출을 받았고, 그 돈으로 새로운 부동산을 사는 방식으로 사업을 늘려갔다.

쌀도매상에서 일본 최고의 부동산 개발 업체로
그러다 1949년에는 요코하마 시립대 상학부의 교수를 맡게 되었다. 2가지 일(사업, 교수)을 병행하던 다이키치로는 1955년 모리빌딩의 전신인 모리부동산을, 다음해에는 모리 트러스트‧홀딩스의 전신인 ‘태성’(泰成)을 설립했다. 그가 대학을 떠나게 된 건 1950년대 말이다. 1957년 학장선거에 출마했다가 ‘학자와 기업인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2년 후인 1959년 학교를 사직했다.

부동산 사업의 지나친 확장은 우려도 낳았다. 1970년 경에는 자본금 7500만 엔에 차입금이 58억 엔까지 치솟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물경기가 도와줬다. 버블 경기 등 고도 경제성장기와 맞물리면서 도시에 오피스 기능이 집중됐던 것. 사업은 확대일로를 걸었다. 포브스에 따르면, 다이키치로는 1991년(순자산 150억 달러)과 1992년(순자산 130억 달러) 전 세계 부호 1위에 올랐다.

모리빌딩그룹을 일군 모리 다이키치로는 1993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약정한대로, 재산의 일부인 30억 엔을 게이오대학에 기부했다. 그런 다이키치로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게이오대 교수이던 장남은 그보다 3년 먼저인 1990년 사망했다. 대학 기부도 그런 장남을 위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이키치로 사망 당시, 차남인 모리 미노루(森稔)와 3남 모리 아키라(森章)는 모리빌딩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었다. 차남과 3남은 그렇게 아버지의 부동산 제국을 물려받았다.

모리빌딩그룹은 모리 다이키치로 사망으로, 모리빌딩과 모리빌딩개발로 분리됐다. 차남 모리 미노루가 전무에서 ‘모리빌딩’의 사장으로 취임했고, 상무였던 3남 모리 아키라는 ‘모리빌딩개발’의 사장직을 맡았다. 5년 동안 분할통합을 거쳐 모리빌딩개발은 다른 회사가 되었다. 이 회사는 이후 ‘모리 트러스트’로 이름을 변경했다. 참고로 모리 미노루  전 회장은 아내와 함께 롯본기의 명물 모리미술관을 운영했다. <에디터 김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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