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㉔/ 전후 황금기2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㉔/ 전후 황금기2
  • 이훈구 작가
  • 승인 2019.10.1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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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 최초의 키스 장면이 등장하는 '스무살의 청춘'. 1946년 5월 23일 개봉됐는데, 일본에선 이날을 '키스 데이'로 기념하고 있다.
일본 영화 최초의 키스 장면이 등장하는 '스무살의 청춘'. 1946년 5월 23일 개봉됐는데, 일본에선 이날을 '키스 데이'로 기념하고 있다.

전후 황금기에 있어서 주목할 점은 역기능이 있으면 순기능도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의 7080 가요가 사랑 받는 것은 어쩌면 역설적이지만 강한 검열과 제약이 따랐기 때문에 주옥 같은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 그리고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이 만들어졌다. 팍팍한 현대인들에게 스테디셀러로 사랑받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어떠한 영화라도 GHQ가 금지할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고 심지어 전쟁 이전의 영화들까지 검열하여 엄격하게 심사하고 부적절한 부분은 가차 없이 삭제하기도 했다. 따라서 ‘지다이 게키’(時代劇, じだいげき, 시대극)를 제작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검열을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칼을 뽑지 않는 시대극’을 만들어야 했는데 이미 무성 영화 시절부터 칼싸움 영화에 심취되어 있던 일본 영화 대중들에게는 결코 지지를 얻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분위기 때문에 도덕적 신념, 민주주의, 휴머니즘, 풍자극, 코미디, 멜러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로 이전 되었고 시대극의 다이내믹한 장면 전환이나 비장미는 없지만 아기자기한 영화들이 제작 되었다.

왕년의 칼잡이 영화의 스타들 역시 자연스럽게 ‘겐다이 게키’(現代劇, げんだいげき , 현대극)에 출연하게 되었다. 당연히 이들에게는 연기 변신이 뒤따랐다. 게다가 시대적으로 미군정은 일본영화의 검열만 실시한 것이 아니라 일본 국민들의 군국주의적 정신을 다시 미국식 민주주의로 계몽, 고취 시켜야 하는 의무가 뒤따랐기 때문에 이러한 정신에 부합하는 ‘아이디어 영화’ 제작을 장려하였다. 이나가키 히로시(稻垣浩), 이토 다이스케(伊藤大介) 등이 이 시절 칼 싸움 영화의 거장에서 현대극의 거장으로 거듭난 사례다.

특히 이나가키 히로시는 이 시기를 통해 현대극의 걸작들을 남겼음은 물론 훗날 세계 속에 일본 영화를 전파하는 지대한 공헌을 했는데 ‘손을 잡는 아이들’(手をつなぐ子等, Children Hand in Hand, 1948)을 이토 다이스케는 ‘왕장’(王將, 1948) 등 현대극의 걸작을 남겼는데 부러운 것은 이 영화들이 지금도 DVD로 출시 되어 있다 는 점이다.

이중 ‘손을 잡는 아이들’은 일본 뉴웨이브의 거장 스스무 하니(羽仁 進) 감독이 1963년에 리메이크하여 더 유명해진 영화로, 학습장애가 있는 소도시 소년을 중심으로 이들의 우정과 갈등 그리고 극복  과정을 그려나가고 있다. 이나가키 히로시는 이후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 1954)를 통해 1955년 제28회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수상을, ‘무호마츠의 일생’(無法松の一生, 1958)으로 1958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하는 등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반면 이토 다이스케는 1924년 첫 영화를 시작한 이후에 1970년까지 꾸준히 활동한 감독으로서 1920년대 말과 30년대 초에 걸쳐 관객과 비평가들로부터 일본 최고 혁신적 연출 스타일의 감독으로 주목을 받았다. 덕분에 유성영화 시대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비운의 감독이다.

사실 이토 다이스케의 무성영화 시절 영화들은 사무라이 영화가 주를 이뤘지만 낭만주의, 감상주의, 허무주의, 권력에 대한 절망적 저항의 정신 등이 녹아 있었고 현란한 카메라와 스토리텔링이 특기였다. ‘왕장’(王將)은 호죠수지(北條秀司)가 1947년에 발표한 희곡을 영화화한 것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장기왕(将棋王) ‘사카타 미요시’(阪田三吉)를 모델로 하고 있다.

요사이 한국에서도 바둑이나 장기에 관한 영화가 만들어지고는 했지만 당시에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간사이(関西)지방의 쇼기(将棋) 기사(棋士)인 사카타 미요시가 아사히 신문 장기대회에서 여러 프로 게이머들을 제치며 ‘왕’(王)이 되어간다는 경쾌한 스토리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가난한 주인공이 장기에 몰두하며 가사를 돌보지 않고 이에 아내가 가출을 하려고 한다든가, 주인공이 신문사 참가비 때문에 고민하고 우여곡절 끝에 장기 대회에 나가 회심의 대회를 치루며 극은 절정에 달해 비록 장기왕으로서 등극은 할 수 있었지만 아내는 그 사이 숨을 거둔다는 신파적 요소까지 가미했다. 그는 시나리오 작가로서도 명성이 높았는데 이 때문에 근대 영화와 사무라이 영화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일본영화사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발맞추다 보니 배우들은 연기의 폭이 넓어지고 시대극의 거장들이 현대극의 ‘걸작’을 남기는 순기능이 생겨 나게 되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전범재판을 통해 1000여명의 영화인들이 일시적으로 퇴출 되었고 미군정은 소재의 자유화를 표방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나 필름 수입이 안 될 염려도 없었다.

물론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럽은 영화시설들과 장비들이 막대한 손상을 입었고 미국 할리우드를 제외한 모든 영화제작 환경들은 그 후유증을 겪고 있었지만 일본은 미군정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부로부터 군국주의를 고무하는 작품 제작을 명령 받던 감독들이 이제는 미군정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예찬하는 작품을 제작 하도록 하는 이른바 ‘아이디어 영화’를 통해 새로운 일본의 건설을 위해 노력하자는 영화를 통해 다시 재기를 모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결국 전쟁 책임 문제에 대해서 문학, 연극, 음악, 영화계 전반에 걸쳐서 고의적으로 거론을 회피 하거나 언급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 오늘날까지 한국에서는 논란거리를 만들고 말았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전범이란 일본의 군부이며 국민은 이들에게 속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 직면하여 과거를 잊자는 것이다.

속인 쪽은 나쁘고 속는 쪽은 선하다는 단순한 공식에서 탈피하여 속는 것도 악하기 때문에 아무도 전범을 고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논리는 미군정을 설득하여 수많은 억울한 영화인들이 일을 강요당했다는 상황 논리 덕분에 전범으로 몰렸던 영화인들이 1947년에 추방 당했다가 1950년에 해제되어 다시 전쟁 전처럼 영화계의 보스로 군림하기도 했다.

그 틈새를 파고 든 것이 ‘정치’였다. 하나의 절대적 권력이 무너지면 바로 그 틈새를 정치가 파고 들어 세력 확장의 도구로 쓴다. 이 과정에서 문화, 예술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게 마련이다. 일본 역시 이러한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적 편향성을 반대하는 배우와 감독들이 1947년 독립제작사 ‘신도호’(新東宝)를 설립하기까지 한다.

이 회사는 1961년 파산 신고를 낸 짧은 운명이었지만 14년간 800편 이상의 영화를 만들었다. 초기에는 문예영화를 강조하여 미조구치 겐지의 걸작 ‘오하루의 일생’(西鶴一代女, The Life Of Oharu, 1952)으로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본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지만 후기에는 이른바 ‘에로구로’(エログロ)로 대표 되는 철저한 오락영화에 전념했다.

그 사이 도호는 구로사와 아키라, 나루세 미키오, 도요타 시로 같은 능력 있는 감독들과 계약을 맺고 상업적인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 시기 가장 혼란스러웠던 것은 좌우를 떠나 전쟁 협력자의 리스트를 작성하고자 하면 막상 밀고하는 영화인도 없었고 자체적으로 파악하다 보면 리스트 작성자가 오히려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속출했다.

어쩌면 이는 예고된 상황으로 이미 1945년 연말에 코미디 감독의 대가 사이토 도라지로(斎藤 寅次郎)의 도타바타(どたばた: 소란스럽게 떠들고 발소리를 크게 내며 크게 허풍을 떠는)희극인 ‘도쿄 다섯 사나이’(東京五人男, 1945)의 흥행에서도 예견되어 있었다. 전쟁 후의 고통을 힘차게 웃으며 훌훌 털어버리자는 테마로 관객에게 호소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노시타 게이스게(木下惠介)감독처럼 ‘오소네가의 아침’(大曾根家の朝, 1946)을 통해 전쟁 중의 군인의 비열함을 폭로한 작품도 있기는 했다.

1945년부터 1952년까지 7년간 일본 영화는 최초로 외국기관에 의해 통제, 관리를 받았다. 물론 이 시기 영화의 논조를 바꾸고자 했던 미군정의 시도는 시대극이 허용되는 1952년에 이르러 단순한 ‘레드퍼지’(red purge: 적색 분자 추방) 혹은 할리우드식 스타일의 영화제작 외에는 별다른 소득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일본 영화가 분명한 현대화의 흐름을 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전쟁 기간 중의 서구지역이나 할리우드의 영화들과 단절을 가져왔던 까닭에 보수적 흐름에 멈춰 있었고 이 때문에 CIE의 과장 데이비드 콘티는 일본의 영화사들이 미국인처럼 키스하는 장면이 있는 영화를 제작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보수적 일본 배우들은 매우 비통해 했다고 하는데 사사키 야스시(佐佐木康) 감독의 ‘스무살의 청춘’(はたちの青春, 1946)이 대표적 작품이다. 일본 영화 사상 최초의 키스 신을 배우들이 연기했는데 이 영화가 일본열도를 뒤흔들어 놓고 말았다. 지금도 매년 5월 23일이 일본의 ‘키스 데이’(KISS DAY)로 기념하고 있다.

일본어에서는 ‘세뿐’(Seppun, 接吻)이라고 하며 글자 그대로 입술이 입술에 와 닿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 5월 23일이 일본 영화산업에서 첫 키스 장면이 등장 하는 ‘스무살의 청춘’이 개봉 하는 날이었고 당시 일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 이후로 매년 5워 23일을 ‘키스 데이’로 기념하고 있는데 일본의 영화평론가들이나 사회학자들은 1946년이라는 시기가 막 전후 복귀의 시기이고 미군정이 새로운 문화를 유입시키려는 움직임이 매우 활발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에서는 드문 키스를 통해 일본열도를 새롭게 바꾸 놓았다는 주장을 한다.

그렇지만 오즈 야스지로 같은 영화인들은 전쟁 전과 같은 ‘유머러스한 달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고 2500여개에 달하던 상영관 수도 전후 800여개로 줄어들어 있었을 정도로 일본영화 산업은 열악한 환경에서 몸부림 치고 있었다.<미국 LA=이훈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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