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㉕/ 전후 황금기3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㉕/ 전후 황금기3
  • 이훈구 작가
  • 승인 2019.10.2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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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가네토(新藤兼人)감독의 '벌거벗은 섬'의 장면.

일본 영화와 한국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을 들자면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는 일본영화는 ‘과거와 전통’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리메이크는 물론이거니와 과거의 암울한 시대를 극복한 스토리들을 자주 소재로 삼는다.

예를 들어 ‘올웨이즈-3번가의 석양’(Always 三丁目の夕日: Always-Sunset On Third Street, 2005), ‘플라워즈’(フラワーズ, Flowers, 2010, 기무라 타쿠야의 드라마 ‘남극대륙’(南極大陸, 2011) 같은 전후 극복기 혹은 메이지 유신 시기 등의 영화나 드라마들이 많은 인기를 구가하고 공감한다.

그러나 한국은 이와 반대다.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Ode to My Father, 2014)의 논쟁에서 보듯이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곤 한다. 또한 일본이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동경 이야기’ (東京物語, 1953) 등 수많은 영화들을 리메이크 한 데 반하여 한국은 리메이크에 인색하다. 원작의 출처가 일본인 경우도 많아서 차라리 ‘속편’을 제작하는 것을 더 중요시 여긴다.

게다가 일본영화는 장르의 체계(전통)가 잘 잡혀 있지만 한국은 장르 개념과 전통이 약하다. ‘전통을 이어온다’ 라든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시리즈물’이 드물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 영화사를 판단할 때 ‘업력’으로 평가하지만 애석하게도 한국의 경우는 ‘동아수출공사’ 정도가 남아 있을 뿐 ‘업력’으로 평가받을 만한 영화사가 드물다.

일본이 선·후배 간 멘토와 멘토링 관계로 100년 넘는 영화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면 한국은 너도나도 흥행 감독이 되면 제작사를 차리고 흥행에 실패하면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마련이다. 정치적 상황에 맞춰 끼리끼리 코드에 맞는 영화인들끼리 같은 포맷의 비슷한 배우들을 돌려막기 하며 우후죽순처럼 비슷한 영화들을 양산해 내는 경향이 강하고 정치적 코드에 따라 선·후배 간의 관계도 유지되기 때문에 ‘업력’이 무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들 때문에 ‘일본적 정서’로 세계시장을 두드렸던 일본과 이제서야 ‘한국적 정서’로 영화제를 파고드는 한국 간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일본영화는 일찌감치 스튜디오 시스템을 정착 시켰고 한국은 과거 ‘신필름’을 제외하고는 영세한 시스템을 면치 못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곧 프로듀서의 부재로 연결되어 작품의 질적, 양적 저하를 면치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필름도 보관되지 못했고 흥행영화도 ‘납북’되어 김정일의 창고로 가 있거나 영화제 출품 뒤 분실되었다. 특히나 일본과 한국은 똑같이 ‘검열’을 겪었지만 일본은 이것 마저도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바꿔 나갔지만 한국은 ‘저항만이 살길’이라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다만 일본영화가 황금기와 쇠퇴기를 반복하는 동안 한국의 영화인들은 그들의 황금기 작품이나 쇠퇴기의 극복과정을 무작정 따라한 경향이 컸다.

그러다 보니 이따금 일본의 고전 영화들이나 로망 포르노들을 접하다 보면 ‘어디서 본 듯한’도 아니고 ‘어, 이건 한국영화 아니었나...’하는 착각이 들 만큼 일종의 ‘복제품’ 영화들이 많다. 그 이유는 자명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경험하는 동안 일본어에 익숙해져 있었고 일본문화와 일본영화를 지속적으로 접했고 이후에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강한 영향력을 받고 있었고 심지어 ‘일본문화수입개방’조치가 1990년대 후반에야 이뤄져서 수많은 제작자들이 일본 원작을 무상으로 차용해도 한국 관객들은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요사이 일본과 한국 그리고 중국간 영화나 드라마의 리메이크 교류는 매우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이로 인해서 원작영화와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오리지널’이 어디에서 유래 되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론을 길게 잡아간 것은 일본의 황금기와 쇠퇴기 그리고 이 극복과정에서 영화사들의 눈물겨운 변신과 생존기가 어쩌면 지금 한국영화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단서를 제공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특히나 일본 영화는 원칙적으로 주요 영화제에 소개되거나 거기서 상을 받지 않고서는 프랑스 혹은 미국이나 서구지역에 알려질 가능성이 현저히 낮았다.

그러나 전후 황금기를 거치면서 미군정의 강한 통제를 받았던 일본의 영화계는 전쟁 기간 동안 단절 되었던 할리우드 영화들을 다시 접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서구 지역에서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예술계나 영화계에서 인정 받을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미국과 서구지역에 최초로 일본영화의 바람을 일으킨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감독의 ‘라쇼몽’(羅生門, 1950)만 해도 먼저 1951년 베니스 영화제의 황금사자상을 받은 후 할리우드로 넘어가 1952년 미국 아카데미상 특별상을 수상 했는데 이 영화는 일종의 법정 심리극으로써 제작사인 다이에이(大映)의 사장 나가타 마사카즈(永田正和)조차도 ‘이 영화의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비판했지만 영화제 출품으로 먼저 검증을 받은 경우였다.

이러한 수상은 1956년도 멜버른 올림픽 수영 평형 금메달 리스트인 ‘마사루 후루카’(古川 勝)의 1950년 세계신기록 수립 그리고 1951년 9월 8일 일본과 48개국과 체결한 평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조약’ 등과 맞물려 전후(戰後) 일본인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일본영화계가 눈을 뜨게 되는데 칸, 베니스, 베를린, 로카르노 영화제 등에 소개된 일본영화는 세계 비평계의 주목을 받게 되고 좋은 평을 받게 되면 ‘아르떼’(Arte)T.V 같은 문화 채널의 구입이 성사되어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승리를 거두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는 점도 깨닫게 되었다.

점차 이 공식은 일본영화계에서 정설로 굳어져서 비록 외면받는 ‘좌파적’영화들이라 하더라도 동구권 영화제인 모스크바 영화제, 까를로비바리 영화제 등에 출품 되어 수상을 하면 일반적인 배급자들이 꺼려하는 영화들을 프랑스의 회사들의 중개를 통해 역으로 서구에 알려진다는 사실도 터득했다.

특히 당시 유럽의 영화환경들이 많이 바뀌어 독립영화들을 배급하는 회사들이 늘어나면서 일본영화들은 고전영화, 장르영화, 독립영화 등 가리지 않고 심지어 영화제를 거치지 않더라도 프랑스 영화관에서 상영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신도 가네토(新藤兼人)감독은 이 시절 ‘블루오션’전략을 썼다. 좌파적 성향이 강했고 독립제작사를 선호했던 그의 반골적 기질은 자칫 상업적인 성공이 있어야 자유스런 표현이 확실했던 일본영화계의 관행 속에서 영원히 독립영화 감독으로 남을 뻔했는데 남들이 출품하지 않는 영화제들을 공략한 경우다.

그것도 냉전시대에 서구권이 아닌 동구권 영화제들을 말이다. ‘좌파 계열’이라는 핸디캡을 ‘작가주의 영화’로 성공시킨 사례이기도 했고 또한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일본 독립영화계의 대부로 불린 그는 ‘원폭의 아이’(原爆の子, 1952)를 통해 까를로비바리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벌거벗은 섬’(裸の島, Naked Island, 1960)을 통해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사회파 리얼리즘의 기수’로 탈바꿈했다.

특히 영화 ‘벌거 벗은 섬’의 경우는 영화 내내 아이를 잃고 오열하는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제외하고는 단 한 마디의 대사도 나오지 않는 작품으로, 독립제작사인 ‘근대영화협회’에서 제작했고 100% 로케이션으로 촬영되었으며 부부역을 맡은 두 주연배우(호리모토 마사노리, 후지와라 레이코)를 제외하고는 모든 출연진이 현지 주민들로 구성된 파격적 영화였다.

이 영화의 성공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컸는데 우선 스튜디오 시스템 하에서 정착되지 못한 감독이 ‘제3의 길’을 찾았다는 점과 이후 무려 60여개국에 수출되었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이었다. 주로 고전영화와 장르영화로 주요 영화제를 정복해 나갔던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나루세 미키오(なるせみきお), 이치카와 곤(市川崑), 기노시타 게이스케, 고바야시 마사키(小林正樹)등 만의 황금기가 아님을 상기시켜 주었다.

때문에 세계는 냉전 시대라는 특수성과 맞물려 서구권과 동구권 모두 일본영화에 자연스럽게 열광하게 되었고 훗날 주로 아시아 영화들을 표방 했지만 실상은 일본영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영화제인 낭트 영화제(Nantes Festival Des 3 Continents)가 창설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일본영화의 회고전과 기념전이 열리게 되었으며 프랑스에 개봉되지 않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 등 3대륙의 영화를 소개하는 영화제로 정체성을 굳히면서 손쉽게 일본영화들을 접하고 이해하게 된 까닭에 비서구적인 영화 중에 일본영화가 가장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체제 경쟁이 심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서구 영화제에서 외면받은 작품이 동구권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호재도 많았다. 물론 작품성에서 뛰어난 작품들과 작가주의 작품들이 많았고 ‘사회적 경향’에 눈을 뜨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제의 눈높이에 맞추다 보니 상위장르와 하위장르로 구분할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른다.

물론 일본 영화가 초창기 가부키와 소설 등 탄탄한 원작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것처럼 많은 영화인들이 우수한 ‘원작’을 찾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일본은 영화를 통해 세계의 문을 두드리면서 문학을 동시에 소개하게 되었고 이 결과로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994년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가즈오 이시구로(石黒一雄) 등 무려 3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기에 이른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일본영화는 단순한 ‘이국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닌 예술적 가치를 인정 받는 영화들을 탄생시켰고 일본영화의 주요 유형이었던 ‘지다이게키’(時代劇)와 ‘겐다이게키’(現代劇)외에도 그 사이에 배치 되며 주로 메이지시대와 관련한 영화들을 뜻하는 ‘메이지모노’(明治勿), 오락적 대중영화인 ‘고라쿠에이가’(娛樂映畫)까지 광범위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시네마스코프로 대표되는 새로운 진보와 카메라 기술의 발전 그리고 어느 누구도 모방하지 못할 디테일 한 미장센들과 베테랑과 신인들의 조화는 때로 경쟁하면서 섬세한 미학과 연출력은 다작을 하면서도 ‘장인’이 될 수 있는 기초를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미국 LA=이훈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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