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맥주엔 ‘숨은 그림’이 있다
기린맥주엔 ‘숨은 그림’이 있다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19.10.22 17: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 브랜드 네이밍 이야기: 기린 맥주)

기린(麒麟)은 상상 속 동물이다. 머리에는 뿔이 나있고, 모습은 사슴과 비슷하고, 얼굴은 용을 닮았다. 천년이라는 긴 세월을 사는 기린은 온순하고 부드러운 성스러운 동물로 여겨진다. 기린의 ‘기’(麒)는 수컷, ‘린’(麟)은 암컷을 뜻한다.

상상의 동물 기린은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목이 긴 기린과는 한자가 다르다. 동물원 기린(騏驎)의 한자엔 말마(馬)변이 들어가 있고, 상상 속 동물 기린(麒麟)의 한자엔 사슴녹(鹿)변이 붙는다. 말을 닮은 기린(동물원 기린), 사슴을 닮은 기린(상상 속 기린)이 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윌리엄 코플랜드의 ‘스프링 밸리 브루어리’가 모태

일본 맥주 브랜드 기린맥주에는 동물원 기린이 아닌 상상 속 기린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일본어로 키린(キリン)이라고 읽는데, 영어 표기(KIRIN)가 더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일본 브랜드 네이밍 이야기 7편은 맥주회사다. 아사히, 산토리에 이어 기린맥주와 관련된 브랜드 네이밍 스토리를 살펴봤다.

기린맥주의 모태는 ‘스프링 밸리 브루어리’(Spring Valley Brewery)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맥주를 양조, 판매한 외국인은 노르웨이 태생 미국인 윌리엄 코플랜드(William Copeland: 1834~1902)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세운 회사가 ‘스프링 밸리 브루어리’(Spring Valley Brewer)다.

경영난에 빠진 이 회사는 1885년 미츠비시(三菱)와 외국자본이 참여하면서 ‘재팬 브루어리’(Japan Brewery)로 변모했다. 이후 1907년 미츠비시 산하의 기린맥주주식회사가 탄생했다.

기린이라는 브랜드의 유래는 재팬 브루어리 탄생에 참여한 미츠비시의 거두(巨頭) 쇼다헤이고로(荘田平五郎:1847~1922)와 관련이 깊다. 재팬 브루어리가 맥주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1888년 처음으로 기린 마크가 들어간 상품을 출시했다.

당시 서양에서 수입된 맥주 라벨에는 동물 무늬가 많이 사용됐다. 쇼다헤이고로는 이를 모방해 ‘동양의 성스러운 기린을 상표로 하자’고 했다. 일본의 국제특허상품사무소 관련 자료에는 이런 글이 올라와 있다.

<(기린 이름은) 쇼다헤이고로가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기린의 도안을 전면에 등장시키자고 제안한 이는 메이지유신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영국인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다. 글로버는 당시 기린의 전신인 재팬 양조장의 중역을 맡고 있었다.>

1990년 출시된 '이치방 시보리' 히트

기린맥주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 건 1990년이다. 시장 점유율 1위를 놓고 다투던 아사히맥주의 ‘수퍼드라이’에 대적하기 위해 ‘이치방 시보리’(一番搾り)를 출시한 것이다. 일본 광고학계의 권위자인 야스타 테루오(安田輝男)는 “기린맥주는 오랫동안 라거 비어를 주요 상품으로 판매 전략을 전개했지만 맥주 업계에서의 브랜드 차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유니크한 일본풍 네이밍 상품으로 ‘이치방 시보리’를 출시하게 된다”고 했다.

보통 맥주는 당화(糖化)된 맥즙을 여과하는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쓴 맛이 별로 없는 ‘첫 번째(一番) 맥즙’과 그후 쓴 맛과 떫은 맛이 나는 ‘두 번째(二番) 맥즙’을 섞어서 발효시켜 만든다.

이치방 시보리는 ‘두 번째 맥즙’을 전혀 쓰지 않고 ‘처음(이치방:一番) 짜낸(시보리:搾り) 맥즙’만으로 순수한 보리 맛을 최대한 살린 맥주다.

출시된 지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치방 시보리는 여전히 기린맥주의 효자상품 역할을 하고 있다. 재밌는 것 하나. 기린맥주의 라벨을 잘 살펴보면 기린(キ,リ,ン)의 일본어 세 낱개 글자가 털(갈기) 속에 하나씩 숨어 있다. ‘숨은 그림 찾기’ 삼아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에디터 이재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