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브랜드 네이밍 이야기: 삿포로 맥주)
나카가와 세이베이 유학 후 양조 기사로 채용
“어, 당신은 일본인이 아니오. 왜 이런 곳에 있소?”
“예, 일본인입니다. 사실은……”
1872년 어느 날, 독일에 맥주 양조 유학을 온 스물네 살의 청년 나카가와 세이베이(中川淸兵衛)가 머무는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훗날 주독일 공사(1874)와 외무대신(1889)이 되는 아오키 슈조(青木周蔵:1844~1914)였다. 아오키는 우연히 독일 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그곳에서 나카가와를 만난 것이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눠본 아오키는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나카가와가 해외 도항(渡航)을 감행할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챘다. 나카가와는 영어와 독일어가 가능했다. 아오키는 묻혀두기엔 아까운 인재라고 생각했다. 집안도 변변치 않고, 돈도 없는 나카가와를 도와줄 방법을 강구했다.
나카가와는 아오키의 지원을 받아 1873년 베를린 맥주양조 회사의 공장에서 수업을 받는 기회를 얻었다. 이후 아오키는 물심양면으로 나카가와를 지원했다. (니가타현 나가오카시 홈페이지 자료)
나가오카시(長岡市) 출신으로 영국을 거쳐 독일로 온 나카가와는 그렇게 선진국의 맥주 양조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2년 뒤인 1875년 5월, 그는 맥주 양조 수료증을 손에 쥐었다. 일본 최초의 국산 맥주 양조 기술자의 탄생 순간이었다. 나카가와가 당시 받은 수료증은 현재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나카가와가 맥주 유학을 하던 무렵, 일본은 대변혁기를 맞고 있었다. 막부시대가 무너지고 메이지유신 시대로 접어들었다. 메이지 신정부는 홋카이도 개척을 위해 지방 관리인 가이다쿠시(개척사:開拓使)를 파견했다.
1870년 홋카이도에 개척사로 부임한 인물이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였다. 그는 상업을 통해 부흥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 정책의 하나로 국영기업인 ‘개척사 맥주양조소’(開拓使麦酒醸造所)가 설립됐다.
독일에서 귀국한 나카가와 세이베이는 맥주양조 주임기사로 특별 채용됐다. 개척사 맥주양조소는 1876년 삿포로 맥주양조소로 이름을 바꿨고, 1877년 삿포로맥주가 처음 출시됐다. 이후 1886년 민영화된 삿포로 맥주주식회사가 탄생했다.
1900년대 들어서 일본 열도의 맥주 핵심 3사인 오사카맥주(현 아사히 맥주), 일본맥주(현 에비스), 삿포로맥주가 합병해 ‘대일본맥주주식회사’가 설립(1906년)됐다. 태평양전쟁 후인 1949년 ‘대일본맥주주식회사’는 아사히맥주와 삿포로맥주를 만드는 두 회사로 분리됐다.
라벨의 '붉은 별'은 홋카이도 개척시대 상징
삿포로맥주는 아사히, 산토리, 기린과는 달리 지역명(삿포로)을 브랜드에 넣었다. 네이밍 작업 과정에 스토리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삿포로맥주에는 ‘상징’과는 같은 것이 있다. 초창기 블랙라벨에 그려진 ‘빨간 별’이다. 북극성을 의미하는 이 별은 개척사(開拓使)를 상징한다. 붉은 별 라벨 맥주는 아카보시(赤星:あかぼし)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교육 사업(무지개어학원)과 무역업(주식회사 시나브로)을 하는 임문택(45) 대표는 붉은 별의 의미에 대해 재팬올에 이렇게 말했다.
“삿포로를 개척할 때 메이지정부 관할의 개척자들이 깃발 마크로 사용했던 것이 북극성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맥주를 처음 만들 때 도쿄에 시설을 지으려고 했지만, 맛있게 보존하기 위해 홋카이도에 최초로 공장을 세웠습니다. 그 시기가 홋카이도 개척 시기였기에 마크를 ‘개척의 심벌’인 북극성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임 대표는 “하지만 지금 현지인 중에 붉은 별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라고 했다. 교토외국어대에서 공부한 임 대표는 20여 년 넘게 일본에서 살고 있다.
브랜드 전문가 순 위(Soon Yu)와 데이브 버스(Dave Birss)는 ‘끌리는 브랜드의 법칙’(2019, 한경출판)이라는 공저의 책에서 “상징적 언어를 가진 브랜드는 쉽게 눈에 띈다”며 “이런 브랜드들은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오래 지속되면서 새로움과 연관성을 유지한다”(206쪽 인용)고 했다. ‘붉은 별’이라는 상징적 언어를 가진 삿포로맥주가 딱 그렇다. <에디터 김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