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선구자들⑬/ 야쿠르트의 아버지
일본의 선구자들⑬/ 야쿠르트의 아버지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19.11.14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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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쿠르트 이끈 윤덕병...현재도 일본회사가 지분

한국에 처음으로 야쿠르트(Yakult)를 보급한 ㈜한국야쿠르트의 윤덕병 회장이 별세한 건 올해 6월 26일이다. 92세를 일기로 타계한 윤 회장은 90세를 넘기고도 매일 출근하는 ‘강골의 기업인’이었다.

그가 이끌던 한국야쿠르트는 1969년 11월 일본야쿠르트(야쿠르트혼샤)로부터 유산균 발효 기술을 들여와 설립된 외국인 투자기업이다. 설립 당시 일본야쿠르트가 지분 38.3%를 가진 최대주주였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한국야쿠르트의 일본 지분에는 변동이 없지만 지금 최대주주는 40.83%를 소유한 ㈜팔도다. 팔도는 1991년 한국야쿠르트의 라면, 음료사업부를 분리시켜 만든 회사다. 현재, 윤덕병 회장의 외아들인 윤호중 부회장이 이 회사의 지분 100%를 갖고 있다.

한국야쿠르트가 로얄티 지급 방식으로 일본야쿠르트와 합작사업을 체결한 건 1970년. 이듬해인 1971년 8월 10일 국내 시장에 처음으로 야쿠르트라는 생소한 유산균 음료가 등장했다.

‘야쿠르트 아줌마’에서 ‘프레시 매니저’로

지금은 전동카트를 이용하지만, 당시는 여성들이 노란 옷에 챙 모자, 가방을 메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상품을 팔기 시작했다. 일명 ‘야쿠르트 아줌마’들이다. 47명의 배달사원으로 출발해 지금은 1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올해 3월 한국야쿠르트는 이런 야쿠르트 아줌마의 호칭을 48년 만에 바꿨다. 신선함을 뜻하는 ‘프레시’와 관리자를 뜻하는 ‘매니저’를 합친 ‘프레시 매니저’다. 시대 변화에 맞게 전문직 여성의 호칭을 붙인 것이다.

초창기 윤덕병 회장이 한국에 없던 유산균 음료를 시장에 판매하기가 어려웠듯이, 그가 유산균을 들여온 일본시장도 처음엔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우리가 매일 먹는 유산균 음료는 다양하다. 그 출발은 ‘야쿠르트의 아버지’ 시로타 미노루(代田稔) 박사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의 선구자들' 13회는 일본야쿠르트 회장을 지낸 시로타 미노루로 정했다.

유산균 음료 야쿠르트 만든 시로타 미노루

나가노현 출신인 ‘야쿠르트의 창시자’ 시로타 미노루(1899~1982)의 아버지는 의사였다. 시로타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교토제국대학(현재의 교토대학) 의학부에 들어간 건 좀 늦은 나이인 22세 때였다. 의학부에서 공부하던 시로타가 관심을 둔 곳은 미생물 분야였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가난했던 일본인들의 위생과 건강 상태는 극히 나빴다. 의대생 시로타는 병에 걸리고 나서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예방의학’에 뜻을 두고 미생물 연구의 길로 들어섰다. 연구를 하던 중 특히 장 건강이 나빠 감염을 일으켜 목숨을 잃는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건장장수’(健腸長寿)를 기업이념으로

1930년 ‘의학박사 시로타’는 장 속의 나쁜 균을 퇴치하고 유익한 작용을 하는 유산균을 발견 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이름을 따 시로타 주(株)라고 명명됐다. 정식 이름은 ‘락토 바실러스 카제이 시로타’(Lactobacillus casei strain Shirota). 균 배양에 성공한 시로타는 ‘장이 건강해야 오래 살 수 있다’는 ‘건장장수’(健腸長寿)라는 말을 만들어 보급하기 시작했다. 이 건장장수는 그가 설립한 회사 일본야쿠르트의 기업 이념이기도 하다.

1938년 ‘야쿠르트’를 상표 등록

시로타는 유산균이 살아서 장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음료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야쿠르트였다. 에스페란토어로 요구르트(yogurt)를 의미하는 ‘야후루토’를 패러디해서 ‘야쿠르트’(Yakult)라는 이름의 제품이 세상에 나왔다.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에 시로타보호균연구소(代田保護菌研究所)를 설립, 음료 제조에 나선 시로타는 1938년 ‘야쿠르트’를 상표 등록했다.

‘야쿠르트 아줌마’의 전신인 ‘레이디 제도’

문제는 판매였다. 시로타는 ‘시로타보호균보급회’를 만들어 유산균을 전국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당시 음료를 병에 넣어 판매했기 때문에, 병을 회수하는 비용도 만만찮았다고 한다. 지금과 같은 슈퍼마켓 같은 유통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던 1940년대 전시 상황이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전쟁터로 나갔기 때문에 배달사원을 여성으로 채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본격적인 여성 배달 시스템인 ‘야쿠르트 레이디 제도’가 도입됐다. 한국의 ‘야쿠르트 아줌마’도 이런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1955년 야쿠르트혼샤(ヤクルト本社: 현재의 일본야쿠르트) 회장에 취임한 시로타 미노루는 1969년 홍콩야쿠르트, 1971년엔 한국야쿠르트와 유산균 합작사업을 체결했다. 그렇게 유산균 야쿠르트는 일본을 넘어 해외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에디터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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