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㉗/ 전후 황금기5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㉗/ 전후 황금기5
  • 이훈구 작가
  • 승인 2019.12.0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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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오카다 마리코(岡田 茉莉子)>

전후황금기를 논할 때 감독들이나 제작사 못지 않게 주목할 것이 이 시기를 빛낸 배우들이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출품하는 작품들마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세계의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영화들을 보면 작품성과 감독의 연출력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 이렇게 삼박자가 맞아야 하는 경우를 본다.

요사이 한국영화가 침체되는 주요 원인 역시 ‘배우 돌려막기’라는 견해가 많은데 현장 영화인들의 의견으로는 ‘흥행 되는 배우’를 캐스팅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백화점 쇼윈도에 전시된 옷을 자기가 구입한다고 광고에 등장하는 모델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없는 것처럼 이 과정에서 몸에 맞지 않는 배역을 맡아 기계적으로 연기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닛카쓰가 신인 발굴에 앞장선 것처럼 작금의 한국 영화계 역시 과감한 캐스팅 그리고 돌려막기의 유혹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물론 감독들의 ‘뮤즈’ 혹은 ‘페르소나’가 있다. 그러나 그건 다작이 가능한 거장들의 얘기다.

일본의 황금기는 정말 많은 영화들을 만들었지만 배우들을 돌려막기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서 더욱 가치가 빛났다. 그 시기에 일본 역시 꼼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의 상업적 성공을 전제로 해외 영화제에 출품하는 경향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흥행에 성공한 영화의 경우 같은 배우를 캐스팅하여 모방 작품을 다시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갑작스럽게 일본 영화가 ‘수입자’의 입장에서 ‘수출자’의 입장이 되어 보니 더욱 그러한 유혹에 노출되기 십상이었다. 어쩌면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의 수준으로 일본이 올라가고자 하는 바람은 모든 일본인들의 염원이기도 했다.

덕분에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배우가 탄생하는 일도 있었다. 하라 세츠코가 일본 본토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배우였다면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여배우는 단연 ‘교 마치코(京 マチコ)’다. 그녀는 올해 5월 12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랑프리의 여왕’으로 불렸다. 다이에이(大映)의 간판스타였던 그녀는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감독의 ‘단십랑 삼대(團十郞三代, 1944)’로 데뷔한 이후 육체파 여배우로 명성이 높았다.

다이에이의 간판답게 동 스튜디오의 작품들인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라쇼몽’(羅生門,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1950),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지옥문’(地獄門, 감독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1953),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 ‘우게츠 이야기’(雨月物語, 감독 미조구치 겐지, 1953)에 출연하며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배우로서도 모범적이어서 82세까지 총 97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전후 황금기를 빛낸 가장 위대한 배우였음에 틀림없다. 출연작마다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한 경력도 대단하지만 그녀의 연기에 대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한 작품에서 여러 가지 캐릭터를 소화해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였다.

라쇼몽(羅生門, 1950)은 살인사건이 주제였기 때문에 인간은 각자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주관적으로 사고하고 합리화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살해당한 사무라이와 그의 부인, 체포당한 사무라이 세명이 관아에 들어가서 당시의 일을 회상하는 플래시백 구성으로 인해 쿄 마치코에게는 4개의 캐릭터를 소화해 내야 하는 어려운 영화였지만 결국 해냈다.

<사진= 오카다 마리코(岡田 茉莉子)>

영화계에 처음 입문할 때 ‘짙은 눈썹이 사극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고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 영화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눈썹을 밀어 버리고 ‘라쇼몽’에 출연한 일화는 유명하며 국제영화제마다 기모노를 즐겨 입고 등장했다. 숙녀와 악녀를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명품 배우였다.

그 시절 일본 전후 황금기를 빛낸 여배우 몇몇을 소개한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거장 감독들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은 지금 봐도 ‘아우라’(Aura)가 있다.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의 뮤즈였던 하라 세츠코(原 節子)는 이미 언급하였고 다른 여배우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오카다 마리코(岡田 茉莉子)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발랄하고 쾌활한 캐릭터를 잘 소화해 내는 배우다. 나루세 미키오(成瀬 巳喜男, なるせみきお)의 ‘부운(浮雲)’에서는 남자주인공 토미오카(모리 마사유키, 森雅之)와 사랑에 빠져서 유키코(다카미네 히데코, 高峰秀子)를 가슴 아프게 만든다.

오즈 야스지로의 ‘가을 햇살(秋日和, Late Autumn, 1960)’에서는 하라 세츠코와 함께 출연했는데 딸이 결혼을 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 친구인 스시집 딸 역으로 발랄한 캐릭터를 무리 없이 소화했는데 미소가 일품이란 평가를 받는다. 역시 오즈의 ‘꽁치의 맛(秋刀魚の味, 1962)’에서는 바가지를 잘 긁어주는 부인 역으로 사다 케이지와 부부 역할을 맡기도 했다.

키네마준보 베스트10 여우주연상을 받은 그녀는 시노다 마사히로(篠田正浩), 오시마 나기사(大島渚)와 함께 일본 쇼지쿠 누벨바그의 기수로 명성이 높은 ‘요시다 기주(吉田喜重)’의 뮤즈로 명성을 쌓았다. ‘아키츠 온천(秋津温泉, 1962)’은 전후 일본 사회의 병폐와 인간 소외를 미학으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오카다 마리코가 직접 기획을 한데다가 당시 신인감독이었던 요시다 기주를 직접 지명하여 화제가 되었다.

덕분에 요시다 기주의 초기 대표작으로 불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온천여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남녀의 사랑을 그리면서 물이 지닌 관능성을 빼어나게 보여주고 있다. 오카다 마리코에게는 이 작품이 100회 출연 기념작일 만큼 당시 인기 여배우였음에도 신인감독인 요시다 기주를 지명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2년 후에 결혼까지 한다. 이후 그의 작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다.

<사진= ‘아키츠 온천(秋津温泉, 1962)’>

‘여걸(女傑)’이라는 별칭을 얻은 타카미네 히데코(高峰秀子) 역시 이 시절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여배우다. 한국에서는 나루세 미키오(成瀬 巳喜男, なるせみきお)의 ‘부운(浮雲)’을 통해 잘 알려졌지만 사실 그녀의 대표작들은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惠介)의 영화들속에서 발견된다.

스물네 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 1954)’와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カルメン故鄕に歸る, 1951)’이다. ‘스물 네 개의 눈동자’는 사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표절된 스토리다. 1928년, 가난한 섬의 쇼도지마 분교에 젊은 여선생이 부임한다. 서양복을 입고 자전거로 통근을 하는 오이시 선생의 모습은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만 점점 섬의 생활에 융화되며 12명에 불과한 학생들은 선생님께 애정을 표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나고 오이시 선생의 남편과 여러 제자들마저 전사를 하게 되고 딸마저 나무에서 떨어져 죽게 되는데 훗날 다시 분교로 부임하게 되고 제자들의 아이들이 기다린다.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는 약간 덜 떨어진 스트리퍼가 동료를 데리고 고향에 데려와 소동을 일으키는 코미디인데 일본 최초 칼러영화인데다가 흥행에도 성공하여 속편 ‘카르멘 사랑에 빠지다(カルメン純情す, 1952)’가 제작된다.

전후 사회의 정치와 위선(재무장, 민족주의, 서구화)에 대해 가차 없이 풍자한 코미디로 영화사(映畫社)에 길이 남을 명연기를 펼쳐 보였다. 놀라운 감정이입과 재치 그리고 슬랩스틱 코미디에서나 볼 수 있는 과장된 연기로 영화에서 주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위선에 대한 비판)를 제대로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녀는 나루세 미키오의 뮤즈로도 유명했는데 ‘부운’ 뿐만 아니라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女が階段を上る時, 1960)’를 통해 절정의 연기력을 과시했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게이코는 긴자의 고급 바에서 얼굴마담으로 밝은 미래를 꿈꾸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절망에 빠지지만 손님을 맞아야 하는 여인의 숙명을 그렸다.

<사진= ‘버스 차장 히데코(秀子の車掌さん, 1941)’>

직접 의상을 담당해 화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훗날 ‘선택의 여지 없이 홀로 험난한 삶을 살아가는 한 여인의 인생을 들여다 본 잔혹하리만치 아름다운 걸작(2011년 시네마테크부산 -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나루세 미키오의 걸작 중 걸작인 ‘버스 차장 히데코(秀子の車掌さん, 1941)’는 그래서 화제였다. 나루세 미키오의 뮤즈 신화의 출발답게 주인공 이름이 ‘히데코’로 다. 군국주의 시대인 1941년도 작품이라고는 믿겨 지지 않는 시골 차장의 얘기를 경쾌하게 풀어가는 이 영화 이후로 15편의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 출연한다.

마지막으로 감독이자 배우였던 다나카 키누요(田中絹代)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무사시노 부인(武藏野夫人, 1951), ‘오하루의 일생(西鶴一代女, 1952)’과 ‘우게츠 이야기(雨月物語, 1953)’, ‘산쇼다유(山椒大夫, 1954)’ 등 주로 미조구치 겐지의 걸작 영화들에 출연하여 일본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를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기노시타 게이스케 감독의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 1958)’를 통해 키네마준보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쿠마이 케이(熊井 啓)감독의 ‘산다칸 8번 창관(サンダカン八番娼館 望鄕, 1974)’으로 1975년 제2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 여자연기자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의외로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다.

<사진= ‘스물네 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 1954)’>

‘일본 오욕의 역사를 관통하는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을 이야기 하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 여성 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삼아 화제가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창관(娼館)’은 위안소다. 풀어 쓰자면 ‘위안소 8번 방’이라는 뜻이 된다. 소녀 오사키가 12살이 되던 해에 삼촌의 꼬드김으로 보르네오령의 산다칸에 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점점 불구가 되어가는 오빠의 다리를 수술하기 위해 비용을 벌 목적이다. 그러나 그곳은 해군 위안소였고 그곳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기구한 여인 오사키를 동네는 물론 가족마저도 외면하는 스토리는 낯설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를 취재한 인류학자 게이코가 마침내 산다칸에 찾아갔을 때 ‘창관’에서 죽어간위안부들의 묘들이 모두 다 고향 일본을 등지고 있어 충격을 받는다. 다나카 기누요는 1964년 제 14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이마무라 쇼헤이(今村 昌平)감독의 ‘일본곤충기(일본 곤충기, にっぽん昆蟲記, 1963)’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히다리 사치코(左 幸子)’이후 두 번째 수상으로 말년에 받은 것이어서 더욱 화제였다.

특히 그녀는 일본 최초의 여류감독인 타즈코 사카네(坂根田鶴子)에 이어 두 번째로 감독으로 입봉하게 되는데 청혼을 거절당한 나루세 미키오의 집요한 방해 끝에 이뤄낸 쾌거였다. 그녀는 특히 첫 연출작인 후미오 니와(丹羽 文雄)의 원작소설 ‘연문(戀文, Love Letter, 1953, 기노시타 게이스케 각본)’으로 1954년 칸 영화제에 초청 받는 한편 1953-1962년 사이에 5편의 작품을 더 연출한다. <미국 LA=이훈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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