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㉘/ 전후 황금기6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㉘/ 전후 황금기6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0.01.0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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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 영화 최고의 프로듀서로 평가받는 나가타 마사이치(永田雅一). 영화사 다이에이(大映)를 설립한 그는 일본 '영화계의 아버지'(映画界の父)로 불리는데, 특이하게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 리그’의 초대 총재를 지내기도 했다.

1950년 이후 영화 제작 편수 급격한 증가

이 시기 일본영화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절정기를 이루게 된 배경을 짚어 보도록 하겠다. 메이저 영화사들이 체제를 정비하고 독립영화사들 역시 밑그림을 그리게 된 그 시기 아직 TV는경쟁력이 없었다. 전후 일본인들에게 영화보다 더 좋은 오락거리는 없었고 극장은 전쟁의 폐허와 패배감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위로의 장소가 된다.

그 결과로 1946년 불과 69편에 불과했던 제작 편수가 1950년에는 무려 215편으로, 1953년에는 302편으로 증가하였다. 1960년에는 무려 555편의 영화가 제작 되어 절정에 달하는데 이 작품들이 모두 걸작들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전쟁 전 여기저기 흩어져 경험을 축적해 온 영화인들에게는 자신의 기량을 선보일 기회가 비교적 많았다.

일본도 다작을 한 사례가 많으나 적어도 A급 영화와 B급 영화를 구분하던 시기이니만큼 ‘A급 영화’로 인정받기 위한 감독들의 노력은 대단했고 제작자들은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의 구분을 ‘흥행수입’<영화사 도호(東宝)의 사장 시미즈 마사오(清水将夫)의 발언>으로 보던 당시 풍토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가속되었다. 어쩌면 이러한 경쟁 구도가 영화제 출품을 앞다퉈 하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영화가 많이 제작되는 시기일수록 개봉할 기회가 줄어들고 한번 실패한 감독이 다시 재기하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로 제작 편수는 계속 감소했고 입장료는 증가했다.

풍속영화(風俗映画) 통해 유럽시장 공략

이 시기 분명히 일본영화는 세계적으로 주목받았을 뿐 아니라 작품성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이미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유럽,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본의 회화에 관해서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 또한 이것이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음을 서술한 바 있다. 프랑스 파리에서 일본 전통 판화인 우키요에(浮世絵)가 선풍적 반응을 일으키고 게이샤의 동영상이 ‘오리엔탈리즘 신드롬’(Orientalism syndrome)을 일으킨 바 있었기 때문에 서구의 일본에 관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키기에는 기모노(着物)와 사무라이(侍)만큼 좋은 게 없었다.

우선 일본은 풍속영화(風俗映画)를 통해 먼저 유럽시장을 공략했다. 가장 일본적인 것(지다이게키, 時代劇)을 승부수로 띄웠다는 점이다.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등이 먼저 수상하고 나서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와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惠介)가 훨씬 이후에 세계 영화제에 알려진 것만 해도 특히 유럽은 일본을 통해 ‘오리엔탈리즘’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실상 아시아를 접할 기회가 일본 이외에는 없다는 점도 감안 되었다. 한국은 전쟁 이후 영화산업이 침체되었고 분단을 겪고 있었으며 중국 역시 내전 후 공산화를 거쳤으니 그나마 안정적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일본뿐이었다. 또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영화적 역량은 미비했고 이제 막 독립을 시작하는 단계였으니 말이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도 유럽의 스튜디오들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폐허가 되었으나 본토 침공을 전혀 당하지 않은 미국의 할리우드가 당연히 영화산업으로서 세계 1위로 군림한 것과 동일한 수순이었다.

일본 감독들에게도 ‘작가주의’ 풍조

당시 전후의 유럽은 국제영화제가 많았고 ‘작가주의’ 개념이 확립되던 시기였다. 영화이론이 체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도 이때다. 미장센과 영화 형식의 이론적 분석을 통해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닌 ‘예술’의 한 장르로 승화시켰다. 프랑스의 영화 평론가이자 이론가였던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이 주도한 영화잡지 ‘까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를 통해 공평하게 ‘작가’의 칭호를 부여 받았다.

당시 주요 필진 중에는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 장뤽 고다르(Jean Luc Godard),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Roland Truffaut), 에릭 로메르(Jean Marie Maurice Scherer),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등이 있었고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 감독으로서 ‘누벨 바그’(Nouvelle Vague, 새로운 물결)라는 새롭고 창의적인 흐름을 창조해 낸다.

기성세대의 관습적인 영화를 비판하면서 주제와 기술상의 혁신을 추구했기에 이들은 자연스럽게 ‘리얼리즘(realism)’을 선호했다. 당연히 ‘작가주의’의 풍조를 형성한 까닭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할리우드의 B급 감독들이나 심지어 인디아와 스리랑카의 신인 감독들까지도 공평하게 ‘작가’ 칭호를 부여했다.

그들은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의 ‘네오 레알리즘(neorealism)’에 열광하면서 장 르누와르 (Jean Renoir)를 지지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는 전쟁 후 이탈리아에서 필름 부족과 싸우면서도 현실적인 영화들을 담아냈고 장 르누와르 역시 틀에 박힌 영화가 아니라 야유와 풍자가 난무하는 스타일로 사실적 묘사에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미장센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작품들을 만들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일본 영화는 전쟁 기간 동안의 단절도 있었지만 특히 독자적이고 세련된 스타일의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는 이미 뛰어난 경지와 수준에 도달한 감독으로 인식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들은 ‘서양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주제와 이야기를 선택하여 제작했다. 다이에이(大映)의 나가타 마사이치(永田雅一)가 특히 그러했다. 작심하고 국제 영화제 수상을 목표로 했다. 당시 도쿄에는 이탈리아 영화사의 지사가 있었고 도쿄 지사장인 줄리아나 스트라미졸리가 ‘라쇼몽’을 비롯 베니스영화제에 열렬히 추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훗날 출품회사의 대표들이 스스로에게 공을 돌릴 지언정 일단 출품용 작품들을 만드는데 주력했다.

게다가 대만, 홍콩 등 과거 전쟁 시절 쌓은 인맥을 중심으로 합작영화를 많이 제작하기도 했다. 나가타 마사이치는 ‘지옥문(地獄門, 1953)’을 기획하여 크게 성공하였는데 그 노력은 열매를 맺게 되어 1954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표범상, 1954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휩쓰는 쾌거를 이뤘다. 그는 국제 영화제 공략에만 신경을 쓴게 아니고 이후 동남아시아 시장 공략을 위한 합작영화를 제작하게 되는데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가 감독한 ‘양귀비’(楊貴妃, The Empress Yang Kwei Fei, 1955)가 그 주인공이다.

홍콩과의 합작을 통해 제작한 이 영화의 주연배우들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캐스팅을 자랑한다. 여주인공이 라쇼몽의 히로인 ‘교 마치코’(京マチコ)였고 남자 주연은 오늘날에도 키네마 준보에서 1, 2위를 다투는 모리 마사유키(森雅之)였으니 캐스팅에서는 단연 최고였지만 미조구치의 첫 칼러 영화였기에 완성도는 다른 영화들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로지 황제와 양귀비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선에만 치중하는 바람에 많은 것을 놓쳤다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홍콩의 첫 영화 공동제작이 멜로드라마 ‘이국정원’(異國情鴛 , Love with an Alien, 1958)이었고 그나마 홍콩, 일본, 한국 세 나라의 감독인 와사나기 미츠오(若杉光夫, 일본), 도광계(Kuang-chi Tu 屠光啟, 홍콩), 전창근(한국)이 연출한데다가 배우들도 김진규, 김삼화 등 한국인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 것을 볼 때 나가타 마사이치의 행보는 보다 더 발전된 형태였고 합작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영화계의 아버지’ 나가타 마사이치

나가타 마사이치는 최고의 프로듀서였다. 그의 기획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의 이력을 잠시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그는 일본 최초로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와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영화 ‘라쇼몽(羅城門, 1950)’을 제작해 ‘영화계의 아버지’로 불렸다.

닛카쓰에서 영화를 시작하여 신흥 키네마 교토 촬영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반 준자부로’(伴 淳三郎) 같은 희극계의 대배우를 발굴해 내기도 했다. 그는 다이에이(大映)에서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1년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미조구치 겐치의 우게츠 이야기’(1953년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의 ‘지옥문’(1954년 칸영화제 그랑프리와 1955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차례로 성공시키며 존재를 확고하게 각인시켰는데 이중 지옥문은 컬러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는 숱한 걸작들을 프로듀싱 했는데 미조구치 겐지의 ‘산쇼다유’(山椒太夫, 1954)를 비롯 이치가와 곤(市川崑) 감독의 반전영화 ‘들불’(野火, 1959) 등 숱한 작품들을 기획했다. 자신감이 충만한 인물로서 별명은 두 가지였는데 군국주의 시절 부역 혐의로 전쟁 후 재야로 물러났지만 미군정과도 친해져 곧바로 해결사로 나서서 ‘FIXER’(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해결한다는 뜻)라는 별명이 붙었고 이후에도 호언장담하는 말투로 인해 ‘나가타 라빠’(나가타 나팔(永田ラッパ)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의 수완은 특이한 이력에서도 나타나는데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 리그’(パシフィック・リーグ)의 초대 총재를 지내기도 했다. 그의 수완은 대단해서 도쿄 오리온스(東京 オリオンズ)의 구단주를 겸하기도 했는데 적자에 시달려 롯데 그룹의 신격호회장에게 매각되었을 때도 여전히 유임 되었을 정도였다.

그는 특히 이스트만 필름을 선호했으며 이를 통해 화려한 색조의 일본 사극을 만들었다. 이스트만(코닥) 필름은 대체로 인물과 배경의 묘사에는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다소 차분한 분위기와 흑백시대의 질감이 살아 있는 아그파필름을 선호한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와는 다른 감각을 가졌으며 지금도 다이에이 스튜디오의 전설로 남아 있다.<미국 LA=이훈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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