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뽀로맥주와 태양족
전후 황금기를 빛낸 스타들을 소개하겠다. 뮤즈들의 얘기가 아니라 남자배우들이다. 황금기의 여자배우들이 점차 전형적인 일본 여성상을 탈피하는 방향으로 갔다면, 남자배우들의 경우는 ‘지다이게키(時代劇)’의 최대 수혜자들 혹은 전후 일본 남성상에 부합하거나 정반대의 인물들이 두각을 드러냈다.
일본인들은 이따금 여성들에게 남자배우들에 대한 인기투표 같은 것을 빈번하게 하는데 심지어 ‘악한 역할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도 범주에 넣을 정도로 ‘마초’스타일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어차피 사무라이 영화들을 볼 때 ‘악역’ 캐릭터들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공포나 스릴러 장르 혹은 야쿠자 스토리가 발달 되어 있는 일본 영화계의 특성상 조각 같은 꽃미남 캐릭터를 굳이 선호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일본 최고의 여배우중 하나인 ‘아오이 유우(蒼井優)’의 최근 결혼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청순 여배우의 대명사인 그녀가 선택한 남자는 개그맨인 ‘야마사토 료타(山里亮太)’였기에 일본 열도가 충격을 받았다. 불과 2개월 만의 연애 끝에 초스피드 결혼을 했는데 평소 아오이 유우의 잘생긴 남자 선호 연애 스캔들이 워낙 화제가 되었기 때문인지 신혼 초부터 ‘불화설’에 휩싸인 바 있다.
아오이 유우의 결혼 결심이 ‘얼굴 포기하고 소울메이트’라는 얘기이고 보면 한국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이토 히데아키(伊藤英明)가 일본 여성들에게 악역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남자배우 1위에 꼽힌 것도 ‘노골적 악역보다 온화함을 가장한 악역’에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후네 도시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히어로
이 시기 아무래도 가장 먼저 언급할 배우라면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郎)일 것이다. 그는 1961년 제 2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감독의 ‘요짐보(用心棒, 1961)’로 남우주연상을, 1965년 제 26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역시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붉은 수염(赤ひげ, 1965)’으로 남우주연상 수상을 했다.
그는 베니스국제영화제의 단골 손님이기도 했다. 1950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게 대상을 안긴 ‘라쇼몽(羅生門, 1950)’의 산적 역으로 강한 인상을 심어준 그는 사무라이 보다는 ‘마초’에 가까웠다. 그는 1982년 ‘라쇼몽’이 베니스국제영화제 역대 대상 가운데 최고 작품으로 선정되면서 다시 한번 재조명되기도 했는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 중 무려 16편에 등장했다.
전기에는 지다이게키의 스타였으나 후기에는 남성적인 오락 영화에서도 강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으며 할리우드에도 진출하여 명성을 얻었는데 잭 스마이트의 ‘미드웨이(Midway, 1976)’에서 찰튼 헤스턴(Charlton Heston), 헨리 폰다(Henry Fonda), 로버트 미첨(Robert Mitchum), 제임스 코번(James Coburn) 등과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쳤다.
그의 남성 다운 이미지 덕분에 삿뽀로 맥주의 모델로도 활약했는데 “남자라면 닥치고 삿뽀로맥주”라는 인상 깊은 포스터는 지금도 기억하는 이가 많을 정도다. 전후 패배주의에 빠진 일본 남성들의 자존감 같은 멘트였다고 한다. 2014년 ‘키네마준보(キネマ旬報)’가 발표한 ‘올 타임 베스트 일본영화 배우’ 1위에 선정되기도 했는데 그가 자유로운 영혼이었음을 드러내는 일화가 있다. 도호(東宝)에 촬영부 면접을 보러갔으나 서류가 잘못 전달되어 배우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 성격대로 원하지 않는 오디션이었기에 불성실하고 반항적인 태도로 일관했는데 이를 본 구로사와 아키라는 오히려 “이렇게 솔직하게 감정을 나타내는 인간이라면 배우의 역할도 열심히 연기할 것이다.”라며 합격시켰다고 한다. 이것이 구로사와 아키라와의 인연이다.
모리 마사유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히어로
모리 마사유키(森雅之)는 주로 문학작품을 영화화한 문예영화에 출연했다. 그의 마스크는 점잖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슬픔을 간직하고 있을 때 우수에 찬 표정 연기로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서는 나루세 미키오(成瀬 巳喜男)의 ‘부운(浮雲, 1955)’을 통해 잘 알려졌지만 ‘라쇼몽’에서 부인을 빼앗기고 의문을 죽음을 당한 무사역이 바로 그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백치(白痴, 1951)에서는 하라 세츠코(原 節子)와 ‘부운(浮雲, 1955)’에서는 타카미네 히데코(高峰秀子)와 함께 했는데 최대한 과장하지 않고 오버하지 않는 연기로 인기를 얻었으며 알듯 말듯한 감정 연기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애간장을 녹인다. 물론 현대극에 잘 어울리는 배우이면서 여러 거장의 영화들에 두루 출연하였지만 그가 가장 잘 어울리는 감독은 나루세 미키오였다.
‘뭇 남성들의 추앙을 받지만 정작 내 남자는 없는 여자 캐릭터’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 등장하는데 원칙과 자존심을 지키려고 노력하다가도 처한 환경이 워낙 나빠서 결국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을 지며 무너지는 그 여인들에게 ‘정’을 줄듯 말듯 하는 그의 진지한 표정 연기는 가히 일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女が階段を上る時, 1960)’는 영화 속 대사처럼 ‘져서는 안 되는 전투를 치르듯 삶을 살아’가는 여성 게이코(타카미네 히데코 분)의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남성 캐릭터 역이나 도스토예프스키 원작의 ‘백치(白痴, 1951)에서 전범으로 총살 직전에 구출 된 쇼크로 전간성 백치가 된 인물을 무리 없이 소화해 낸다.
류 치슈: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히어로
류 치슈(笠 智衆)는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와 가장 케미스트리가 잘 맞는 배우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유고작까지 총 52편에 출연하였고 외모나 체구가 비슷하여 떼려야 땔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했던 온화한 인상으로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세계에 그대로 동화되었다. 그의 배우 인생 자체가 곧 오즈라는 공식이 성립될 수 있는 명품 배우였다.
이 두 사람의 인연은 ‘학생 로망스 젊은 날’(學生ロマンス 若き日, 1929)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의 스튜디오 시스템(도제 시스템)하에서 감독들은 셀러리맨과 다름없는 생활을 해야 했고 배우들이 조·단역 배우들이 주연급으로 올라서기란 아주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꾸준히 오즈의 작품과 함께 했고 마침내 1930년 ‘낙제는 했지만’(落第はしたけれど, 1930)을 통해 비중 있는 역을 맡으면서 주연급으로 성장했다.
그는 한국의 최불암과도 같은 존재였다. 오즈의 첫 발성영화인 ‘외아들(一人息子, 1936)’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이후 아버지역은 늘 그의 몫이었다. 또한 연기 도중 제스처 하나 하나까지 미리 구상하고 자기식대로 지도하는 오즈의 완벽주의 스타일을 오히려 무척 좋아했고 오즈 역시 그에게는 리허설 시간을 충분히 허락할 정도로 교감을 나누는 사이이기도 했다. 한 살 터울인 두 사람은 영화작업 이후에 술도 마시고 등산도 하며 기탄없이 어울렸는데 이러한 오즈와의 교감으로 인해 일본영화에서 ‘아버지’하면 류 치슈가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한가지 오즈 야스지로와의 일화 한가지가 있는데 ‘외아들’을 찍을 당시 그는 32세였는데 ‘아버지’역 분장이 매우 어색하여 직접 분장을 고쳐주었고 순식간에 온화한 노인의 모습으로 변모했는데 이후 이 모습은 고정되었다고 한다.
이시하라 유지로: 태양족을 탄생시킨 스타
한 때 ‘일본인이 가장 사랑한 남자’로 불렸던 이시하라 유지로(石原裕次郎)는 친형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 후광을 등에 엎고 배우로 데뷔했지만 특유의 터프가이 이미지로 ‘일본의 아이돌’ 혹은 ‘일본의 제임스 딘’, 단명했다고 해서 ‘일본의 엘비스 프레슬리’, 선 굵은 연기로 ‘일본의 말론 블란도’라는 찬사를 받으며 청춘스타로서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그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른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라고 불리던 닛카쓰(日活)의 ‘타이요조쿠(太陽族)’영화 덕분이다. 아쿠타가와상(芥川龍之介賞) 수상작인 ‘태양의 계절(太陽の季節, 1956)’을 원작으로 타쿠미 후루카와(古川卓巳)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는데 권투선수인 학생 다쓰야를 주인공으로 도덕에 얽매인 전후 세대와의 갈등과 이성관계를 묘사한 작품이다.
사실 다른 메이저 제작사들의 제재로 1954년 제작 재개 후 난관에 봉착했던 닛카쓰가 과감한 신인발굴과 소재 발굴을 하며 세상에 내놓은 것이 바로 ‘타이요조쿠(太陽族)’영화였다. 궤도가 없는 젊은이의 청춘, 반항적인 젊은이들을 가감없이 묘사하여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이 영화의 주연이 바로 이시하라 유지로였다.
그 후 그는 일본 최고의 청춘스타로 태양족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당시 일본에서는 술과 재즈, 춤 등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였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청년문화를 싹틔우면서 ‘태양족(太陽族)’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이 중심에 이시하라 유지로가 있었다. 태양족은 즉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청년문화를 나타낸다. 60년대 젊은 감독들은 수많은 청춘영화를 만들었고 기존의 멜러 드라마들은 낡은 기성세대의 것으로 치부했다. 영화 속 태양족의 행동은 말 그대로 이유 없는 반항이었으며 그들은 기성사회의 질서에 동조하지 않고 자신의 순수한 욕망을 쫓았을 뿐만 아니라 반항과 무질서를 동경했다.
나카히라 코우(中平康)감독의 미친 과실(狂った果實: Crazed Fruit, 1956)은 유지로에 의한 유지로를 위한 유지로의 영화였다. ‘태양족’이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이 영화는 전·후 무기력에 빠진 젊은이들의 일탈을 그린 영화로 남편이 있는 여자를 둘러싼 형과 동생의 갈등을 그렸다. “방향을 잃었다”는 대사를 뱉으며 ‘미친 과실’이라는 제목처럼 모든 것(형, 사랑하는 여자)을 잃고 파멸을 향해 돌진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그려냈는데 이 영화는 프랑스에서 개봉되어 프랑수와 트뤼포(Francois Truffaut)감독의 누벨바그(Nouvelle Vague)운동에 영향을 줬다.
‘이시하라 유지로 매력’(魅力)’ 절정은 구라하라 고레요시(蔵原惟繕) 감독의 ‘치사한 놈’(憎いあンちくしょう: I Hate But Love, 1962)으로 매우 순화된 한글 제목일 뿐 원래 일본어 대로라면 ‘미운 저 (빌어먹을)새끼!’정도로 험악한 제목이다. “일본(日本) 종단(縱斷) 로케(ロケ) 감행(敢行)!”이라는 카피처럼 일본영화사(日本映畫史)에서 최초의 ‘로드무비’로 기록되어 있다. 미친 과실에서 모터 보트를 타고 질주하던 유지로는 이번에는 고물 지프를 몰며 “사랑이란 건, 만드는 게 아니라, 믿는 거야”를 외친다.
이시하라 유지와 ‘타이요조쿠’영화 때문에 1956년 12월, 일본은 마침내 새로운 영화윤리관리위원회를 발족시키게 되었다. 그만큼 반향은 컸고 이시하라 유지로는 배우로서나 가수로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였고 약 1조 엔에 달할 정도로 티켓 파워를 자랑했다. 말년에는 한국에서도 인기 있었던 애니메이션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わが青春のアルカディア, 1982)’에 하록선장의 목소리로 등장하는데 52세의 나이에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1999년 그의 13주기 추도식에 17만 명의 팬이 참석했으며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 일본영화계에서 이시하라는 왕이었다”는 전설을 남겼다.<미국 LA=이훈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