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어록/ 사업과 정직은 서로 ‘깍지 낀 손’
CEO 어록/ 사업과 정직은 서로 ‘깍지 낀 손’
  • 에디터 이재우
  • 승인 2020.07.10 16: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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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리나가 다이치로(森永太一郎)
▶경력: 모리나가제과(森永製菓) 창업주
▶평가: 동양의 제과왕
▶태생: 사가현
▶생몰연도: 1865~1937년
▶원문: 「商売は正直でなければ栄えません」


일본 거대 과자회사 '모리나가제과'의 출발
‘정직’은 비단 한 개인의 심성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장사나 사업(비즈니스)에서 정직은 더없이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고객이나 거래처 등에 대한 정직은 ‘신뢰’를 낳고, 더 나아가 그 신뢰는 자신과 회사에 ‘성과’로 되돌아 오기 마련이다. 

일본 창업주 중 이런 정직을 중요시했던 대표적인 이가 거대 과자회사 모리나가제과(森永製菓)를 세운 모리나가 다이치로다. 모리나가 다이치로(森永太一郎: 1865~1937)가 도쿄에 ‘모리나가 서양과자 제조소’(森永西洋菓子製造所)를 창업한 건 1899년이다. 

모리나가 다이치로는 사가현 이마리(伊万里)시에서 아리타(有田) 도자기 도매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삼촌의 도자기 사업을 돕기 위해 그는 24세 때인 1888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큰 돈은 고사하고 거액의 빚만 지게 됐다. 귀국할 돈조차 없던 어느날, 그는 공원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60세 정도 돼 보이는 한 미국 여성이 다가와 말을 걸며 핸드백에서 뭔가를 건넸다고 한다. 

‘캔디 하나’가 인생을 바꿔 놓았다
사람의 운명은 아무도 모른다. 이 여성이 내민 ‘작은 뭔가’가 다이치로의 인생을 바꿀 줄이야. 여성이 건넨 건 이쁜 포장지에 싸인 캔디 사탕이었다. 다이치로는 포장지를 벗기고 입에 털어 넣었다. 단맛이 입안에 퍼지면서 “와! 맛있다”고 외쳤다. 이런 과자는 일본에 없었을뿐더러 먹어본 적도 없었다. 

그 순간 다이치로는 “맞아, 과자 장인이 되어보자. 양과자 제조 기술을 익혀 일본에서 이 분야의 선구자가 되겠어”라고 결심했다. 미국에서 10년 넘게 서양 과자 제조법을 배우고 1899년 귀국해 도쿄에 2평짜리 매장을 열었다. 모리나가제과의 전신인 ‘모리나가 서양과자 제조소’(森永西洋菓子製造所)다. 당시 나이 35세. “영양가 있는 맛있는 과자를 일본 어린이들에게 먹이고 싶다”(栄養のあるおいしいお菓子を日本の子どもたちに食べてもらいたい)라는 생각이 회사 설립 취지였다. 

사업과 공익은 함께 가야 한다”
1914년 ‘모리나가 밀크 카라멜’을 시장에 내놓으면서 다이치로는 ‘동양의 제과왕’이라고 불리게 됐다. 1935년 사장직에서 물러난 그는 기독교 포교 활동에 전념하다 2년 뒤인 1937년 세상을 떠났다.(72세) 

캔디 하나로 인생을 바꾼 모리나가 다이치로는 상인(경영인)으로서의 도덕을 강조하면서 “장사(사업)는 정직하지 않으면 번창할 수 없다”(商売は正直でなければ栄えません)는 말을 남겼다. 장사와 정직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면서, 서로 ‘깍지 낀 손’이라는 의미다. 그는 또 “사업과 공익은 함께 가야 한다”고도 했다. 

아베 총리의 부인 아키에가 증손녀
모리나가 다이치로는 ‘일본 퍼스트레이디’와 혈연 관계다. 아베 신조 총리의 부인 아키에(昭恵) 여사가 다이치로의 증손녀인 것. 정확히는 다이치로가 아키에의 외증조부다. 모리나가 다이치로의 아들 모리나가 타헤이(森永太平: 3대 사장)에겐 에미코(恵美子)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마쓰자키 아키오(松崎昭雄)라는 남자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아키에 여사다. 아키에의 아버지 마쓰자키 아키오는 모리나가제과의 사장을 지냈다. 이런 가문의 배경으로 아키에는 정치 지망생 아베 신조와 결혼, 아베가(家)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에디터 이재우(대표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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