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노운의 '이판사판 산행기'/ 경주 남산
작가 노운의 '이판사판 산행기'/ 경주 남산
  • 노운 작가
  • 승인 2020.07.24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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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운(露雲:필명) 씨가 <작가 노운의 이판사판 산행기>를 연재합니다. 노운 작가는 전국의 명산을 찾아 거기에 얽힌 이야기와 산행담을 풀어 나갑니다. 제목을 '이판사판'으로 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마른 목구멍에 거친 밥을 꾸역꾸역 밀어넣 듯 체력이 달리는 상황에서도 “이판사판 올라가 보자”라는 악다구니 같은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산행기에는 산과 연관된 사찰 이야기가 빠질 수 없기에 이 단어를 빌려왔습니다. 전국의 명산들은 대부분 유서깊은 사찰을 끼고 있는데요. 조선시대 절에서 수행하던 일을 이판(理判), 절의 살림살이나 행정 일을 사판(事判)이라고 했습니다. 이판승과 사판승을 합친 말이 ‘이판사판’(理判事判)입니다. 조선 이후 이 말은 의미가 변질되어 ‘막다른 상황’ 등을 이를 때 사용하고 있죠. 노운 작가의 산행기 첫 회는 천년사직 고도 경주의 남산(南山)입니다. <편집자주>

경주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 정상.

‘신라의 달밤’ 노래 속 명산 경주 남산(금오산)
#1. 턱관절을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며 신기에 가까운 바이브레이션 창법을 구사했던 가수 현인(1919~2002) 선생. 그의 대표곡은 국민 애창곡 ‘신라의 달밤’. 한 소절 읊어본다.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온다/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고요한 달빛 아래 금오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노래를.>

이 노래의 작사가 유호(1921~2009) 선생은 “금오산은 현인의 독특한 창법으로 인해 ‘금옥산’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유튜브 등엔 금오산이 ‘금옥산’으로 둔갑해 있다. 고 유호 선생은 '님은 먼 곳에', ‘이별의 부산 정거장’, ‘전선야곡’, ‘진짜 사나이’ 등을 작사했는데, 드라마 작가(한국방송작가협회장 역임)로 더 유명했던 분이다. 경주 불국사 가는 쪽에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있다. 산행 시리즈의 1편으로, 노랫말 속에 등장하는 경주 금오산(金鰲山)을 찾아갔다. 쇠 금(金)에 자라 오(鰲)자를 쓰는 금오산은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의 한 봉우리다. 

시간을 아껴야 했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잡았다. 60대 후반의 택시 운전사는 “신라궁궐이 있던 월성에서 바라보면 자라 머리가 월성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형국”이라며 금오산의 이름에 얽힌 얘기를 문화해설사처럼 들려줬다. 금오산(468m)과 이웃 봉우리 고위산(高位山:494m)을 합쳐 통칭 남산(南山)이라고 한다. 고위산이 좀 더 높지만 ‘역사적인 무게감’ 탓에 금오산을 남산의 주봉으로 친다. 남산은 남북 8km, 동서 4km 규모로, 서라벌 남쪽에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오래전 이곳은 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지였다. 

탑들이 기러기 대열 날아가듯 많았다는데...
#2. ‘경주 남산을 보지 않고 경주를 안다고 하지마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는 ‘영원한 신라인’으로 불리는 향토사학자 고청(古靑) 윤경렬(尹京烈:1916~1999) 선생이 했던 말(“남산을 보지 않고서는 신라를 안다고 할 수 없다”)에서 비롯됐다. 

남산은 천년사직 고도 경주의 불심이 총집결된 곳이다. 산 골마다 골마다 불상과 석탑 등이 산재해 있다. 국보와 보물이 무려 700여 점 가까이 숨어 있다.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이라는 말이 이를 증명한다. 옛 신라 시절, 남산의 절들은 별처럼 길게 뿌려져 있었고 탑들은 기러기 대열처럼 날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택시 운전사는 “남산은 사계절마다 한번 씩 와 봐야 더 잘 알지요. 산 전체가 노천 박물관 아입니까(아닙니까). 2000년 12월에 산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지요”라며 자랑을 늘어 놓았다. 그는 남산이 초행인 객을 삼릉 입구에 내려 주었다. “남산을 제대로 보려면 이곳으로 다시 내려오지 말고 용장골로 하산 하이소. 그쪽 용장사터 있던 자리가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썼던 곳이라고 합디다.” 친절한 말까지 보탰다. 

용장사(茸長寺)라는 절은 익히 들은 바 있다. ‘관촌수필’을 썼던 소설가 이문구(1941~2003년)선생의 『매월당 김시습』이라는 소설에서다. 어느 해 10월 중순, 선생은 사전 현지답사를 위해 남산 용장사터를 찾았다고 한다. 헌데, 산행을 포기하고 만다. 책 서두에서 밝힌 사연은 이랬다. 

고위봉으로 향하는 이무기 능선. 남산 산행에서 가장 험한 코스다.

<그 산, 용장사터를 찾아가는 길에는 웬 뱀이 그리도 많은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뱀이 온기 있는 바위에서 똬리를 틀고 해바라기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렇지, 산 자체가 바위산인데 하고 많은 바위 다 놓아두고 하필이면 길가로만 몰려서 볕을 쬔단 말인가, 뱀은 갈수록 많았다. 초입에서는 댓 발짝 한 마리 꼴로 보이던 것이,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는 한 발짝에 서너너덧 마리씩 좌우로 길을 가로지르며 꼬리를 감추니 나중에는 아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거부 반응이 아니라 공포반응인 셈이었다. 나는 결국 목적을 포기하고 하산할 수밖에 없었다.>

소스라치듯 놀라 뒷걸음치던 이문구 선생의 표정이 자못 궁금해지는 글 토막이다. 공교롭게 용장사터에서 용장골로 내려오는 길목은 ‘이무기 능선’으로 이어진다. 남산 산행 코스 중 가장 가파른 곳인데, 용이 되려고 몸부림치는 이무기를 닮았다고 해서 그런 명칭이 붙었다는 게다. 이문구 선생이 이무기 능선 근처에서 뱀무리를 발견한 건 과연 우연이었을까. 

신라의 세 임금이 누워있는 삼릉 전경.

삼릉 소나무숲엔 세 군주의 묘가 나란히 배열
#3. 남산을 오르기 전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이 삼릉(三陵; 경주시 배동)이다. 명칭 그대로 세 왕이 누워있다. 표지판엔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능이 모여 있다고 하여 삼릉이라 불린다”고 적혀 있다. 모두 박씨 왕들이다. 아달라왕은 신라의 틀을 잡아가던 군주였고, 신덕왕과 경명왕은 세력이 쪼그라들어 경주 지역 통치에만 그친 ‘우물안 군주들’이었다. 

비슷한 크기의 세 왕능을 한 자리에 모아 놓은 건 분명 특이한 풍경이다. 삼릉은 이들 주인보다 주위를 둘러싼 소나무숲이 더 인상적이다. ‘장관’이라는 단어로는 표현이 안된다. 쭉 뻗은 꽃미남 나무는 찾아볼 수 없다. 모두 휘고 비틀린 몸통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듯, 굽은 소나무들이 왕들의 묏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마치 통일대국을 누비던 신라의 날렵한 군사들인양. 삼릉은 사진작가들 사이에 ‘사진 잘 나오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삼릉숲은 소나무들이 장관이다. 

햇살이 보통 따가운 게 아니다. 땀을 훔치며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얼마쯤 못가 여기저기 흩어진 불상들이 눈에 띈다. 헌데, 불편함과 안도감이 교차한다. 목이 달아난 불상을 보는 건 불편함이요, 반면 성한 목을 가진 불상을 발견하면 안도감이라. 대체 누가, 왜, 불상의 목을 댕강댕강 잘라 놓았을까. 숭유억불 유자(儒者)의 나라 조선의 짓일까. 
 
때마침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 ‘나랏말싸미’(2019)다. 한글 창제 자문역의 신미스님(박해일 분)과 세종(송강호 분)의 첫 대면. 스님이 임금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 그러자 임금이 그 연유를 묻는다. 스님이 답하기를 “개가 절하는 것 보셨습니까. 나라에서 중을 개 취급하니 …….”라고 했다. 비록 영화지만 조선이 불교를 어찌 다뤘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머리가 잘린 불상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매월당 김시습이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쓴 곳
#4. 이런 유학을 숭상하던 조선에 선비된 자로 스님이 된 이가 있었다. 위에서 나온 임금 세종이 궁궐로 불러 천재라 칭했던 생육신 김시습(金時習:1435∼1493)이다. 김시습은 다섯 살 때 세종 앞에서 시를 지어 이름을 떨쳤다. ‘오세’(五歲)라는 별명을 얻은 연유다. 이름 시습(時習)은 논어의 첫 구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배우고 나서 수시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세월이 흘러 스물한 살 김시습은 서울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들었다. 방에 틀어박혀 사흘 만에 뛰쳐나온 그는 책을 불태우고 머리를 깎았다. 모두들 두려워 손대지 못하던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서 노량진에 묻어주었다. 그러곤 설잠(雪岑: 눈 덮인 봉우리)이라는 법명으로 10여 년을 전국 주유한다. 그러다 경주 남산에 들어간 것이 31세 때인 세조 10년 1465년이다. 

김시습은 금오산 용장사터에 금오산실을 짓고 7년 정도 기거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썼다. 이를 보면, 당시엔 경주 남산이 금오산(金鰲山)으로 불렸다는 걸 알 수 있다. 경주 남산문화연구소에 따르면, 김시습은 매월당(梅月堂)을 비롯해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찬세옹(贊世翁), 벽산(碧山), 청은(淸隱) 등 다양한 호를 사용했단다. 이중 대표적인 호인 매월당은 자신의 한시 ‘매화 그림자 가득한 창에 달이 막 밝았구나’(滿窓梅影月明初)라는 문구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여섯 부처와 보살이 그려진 선각육존불

선각육존불-삼층석탑 등 마치 신선계에 온듯
#5. 산을 좀 더 올랐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을 지나 선각육존불(線刻六尊佛) 앞에 섰다. 어른 키 3배 높이다. 두 개의 큰 바위에 여섯 부처와 보살 형상이 선각으로 새겨져 있다.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를 마치 도화지 다루듯 스케치했다. 석공들은 스스로 부처가 되어 망치질을 했으리라. 바위 하나 하나에 징을 쪼며 긁고 깍아내며 불심을 불어넣었을 터. 석공들의 화려하고 유려한 솜씨에 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 

상선암~상사바위를 지나 금오산 정상에 도착했다. 주위를 둘러본다. 절경이 따로 없다. 저멀리 내남(행정구역 내남면) 들판이 시원스레 한눈에 들어온다. 땀은 이미 범벅. 일렁이는 산바람과 확 트인 풍경으로 땀을 씻어낸다. 이윽고 산행의 하이라이트 코스인 용장계곡으로 방향을 틀어 폐사지인 용장사터로 향했다. 

용장계곡은 금오산과 고위산 사이의 골짜기로, 남산에서 가장 깊은 계곡이다. 용장사 등 18개의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내리막길을 한창 가다 갑자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절벽 끄트머리에 세워진 ‘용장사곡 삼층석탑’을 발견하면서다. 표지판에 “용장사 법당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탑이다. 자연 암반을 다듬어 아랫 기단으로 삼아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됐다.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우수작으로 꼽힌다”고 적혀 있다. 석탑은 너른 산 능선을 옆구리에 끼고, 이마로는 높은 하늘을 떠받들고 있다. 마치 선경(仙景)에 가깝다. 

용자사곡 층석탑. 벼랑 끝에 세워져 있다. 

김시습 한시에 등장하는 작은 대나무 군락
#6. 산을 조금 더 내려가자, 자연 화강암에 부처의 얼굴이 선명하게 조각된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과 삼륜대좌 위에 목이 없는 불상을 얹은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이 자태를 드러냈다. 잠시 바람이 분다. 환청인 듯 싶다. 어디서 바위에 징 쪼는 소리가 들린다. 스님들의 청아한 독경소리도 메아리 친다. 두 소리가 합쳐져 골을 휘감더니 온 산을 뒤덮고는 이내 사라진다. 묘한 경험이다. 김시습은 이곳 용장사에 머물면서 이런 한시를 지었다.  

용장골 골 깊으니(茸長山洞窈:용장산동요)
오는 사람 볼 수 없네(不見有人來:불견유인래)

가랑비에 신우대는 냇가에서 움돋고(細雨移溪竹:세우이계죽)
비낀 바람은 들매화를 희롱하네(斜風護野梅:사풍호야매)

작은 창가에 사슴 함께 잠들어라(小窓眠共鹿:소창면공록)
낡은 의자엔 먼지만 재처럼 앉았는데(枯椅坐同灰:고의좌동회)

깰 줄 모르는구나 억새 처마 밑에서(不覺茅簷畔:불각모첨반)
들에는 꽃들이 지고 또 피는데(庭花落又開:정화락우개)

머리가 없는 삼륜대좌 석조여래좌상

이 한시엔 신우대(대나무)가 등장한다. 소나무산에 웬 대나무인가 싶었다. 근데, 용장사터에서 용장골로 내려가는 길엔 굵기가 작은 대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김시습은 이곳에서 오두막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유금오록(遊金鰲錄』(155수 한시 기록)을 짓고, 그 유명한 금오신화를 집필했다. 

산에 김시습의 흔적은 또 있다. 용장계곡으로 내려가다 보니 작은 아치형 다리 하나가 나타난다. 이름이 설잠교(雪岑橋). 법명이 ‘설잠’인 김시습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다리다. 김시습을 좀 더 알고 싶으면, 경주에서 동해 바닷가로 빠져 나가는 길에 있는 기림사(祗林寺)를 찾아가면 된다. 양북면 함월산 자락의 이 절 경내에는 김시습 전신 초상을 모신 영당(影堂)이 있다. 아울러 천년고찰 기림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茶) 성지로 알려져 있다. 김시습은 금오산을 떠난 이후, 서울 수락산 기슭에 폭천정사(瀑泉精舍)를 짓고 10년간 생활했다. 현재 수락사에는 김시습을 기리는 정자 매월정이 세워져 있다. 김시습은 1493년 59세 나이로 충남 부여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했다. 

매월당 김시습의 법명을 딴 경주 남산의 설잠교
서울 수락산 깔딱고개 능선 부근에 있는 매월정. 
매월정 옆엔 ‘수락잔조’(水落殘照) 등 김시습이 지은 한시가 적힌 표지판이 있다.

경주 남산을 꼭 와 봐야 하는 이유
#7. 용장계곡은 깊고도 길다. 물이 흘러 소(沼)를 이루더니 이내 다른 소를 낳고, 또 다른 소로 이어진다. 물소리 또한 장쾌하다. 계곡에 발 담글 겨를도 없이 산을 빠져 나왔다. 내남면 용장1리 마을이다. 그리 높지 않은 남산이지만 산재한 불교유적 앞에 넋을 잃다보니 5시간이나 흘렀다. 

이미 허기가 온 지는 오래. 허름한 슈퍼에서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한 식당에 들렀다. 밀냉면을 잘 한단다. 음식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예기(禮記)』 학기(學記) 편의 한 문장을 인용해 본다. ‘수유가효(雖有佳肴) 불식부지기지야’(不食不知其旨也).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뭘 하겠는가. 먹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를 경주 남산(금오산)에 대입해 본다. ‘아무리 좋은 산이 있으면 뭘 하겠는가. 오르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을.’ 불국토(佛國土) 경주 남산이 분명 그랬다. <글, 사진=노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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