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㉝/ 전후 황금기11(닛카쓰)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㉝/ 전후 황금기11(닛카쓰)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0.08.0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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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수퍼스타 이시하라 유지로. 전 도쿄 도지사이자 작가인 이시하라 신타로의 동생이다.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닛카쓰 주식회사(日活株式会社; Nikkatsu Corporation)는 일본의 영화 제작·배급 회사로, 초창기 일본영화사에서 쇼치쿠(松竹)와 양대 산맥을 이뤘던 유서 깊은 제작사였다. 그러나 전후 황금기에 있어서 가장 창조적인 발상으로 재기를 하게 된 경우에 속한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당시 일본 영화계는 기존 5개 메이저 영화사(도호, 도에이, 쇼치쿠, 다이에, 신도호)들이 맺은 협정(필자의 연재물 전후황금기 4편 참조)으로 인해 배우 수급에 문제가 많았다.

1954년 제작을 재개 할 당시(닛카쓰는 2차 대전 당시 군부에 협조하지 않고 다이에에 흡수 되었었음) 5개의 메이저 영화사들의 견제로 인해 정상적인 캐스팅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다른 영화사에 출연할 수 없다는 규정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호(東宝)는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다이에이(大映)는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 쇼치쿠(松竹)의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도에이(東映動畵)의 우치다 도무(内田常次郎) 같은 스타감독도 배출하지 못했다.

참고로 신도호(新東宝)의 경우는 도호와 특수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생략하지만 구로사와 아키라의 ‘들개’(野良犬, 1949)같은 히트작을 내기도 했고 1954년 도호가 독자적인 배급시스템(도호스코프, 와이드 스크린)을 구축하기 이전 까지는 업무협약이 긴밀했기 때문에 역시 닛카쓰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당시 일본 영화계는 공동 오디션도 주최할 정도로 시스템 구축이 되어가던 시기였다. 일본국민 여배우 카가와 교코(香川京子) 역시 이러한 공동 오디션을 통해 뽑힌 경우인데 그녀의 술회를 보면 닛카쓰의 고뇌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1949년 1월에 ‘도쿄신문’에 ‘뉴페이스 노미네이션’이라는 배우 모집 공고가 났고 그녀는 최종 면접을 통과한 총 9명에 뽑혔다.

이후 그녀는 신도호에 나머지 3명은 각각 도호, 쇼치쿠로 입사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3년 가량의 전속기간이 끝나면 프리랜서(freelancer) 선언을 하고 독립하거나 이적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일본은 경제부흥이 있었고 영화산업이 힘을 만회해 감에 따라 할리우드풍의 웰 메이드 엔터테인먼트 영화와 같은 오락 영화들, 이른바 고라쿠 에이가(娛樂映畵)가 발전하였다. 수많은 하위장르들까지 양산해 낸 이러한 경향은 일본영화를 세계화 시키는데 한 몫을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기술적 발전(색, 시네마스코프, 카메라 기술, 복합성을 지는 캐릭터 중심의 시나리오)을 가져오면서 ‘프로그램 픽처’(program picture)를 만들겠다는 생각들이 영화계에 지배적이었다.

닛카쓰의 역습은 바로 이러한 토양에서 출발하게 된다. 물론 쇼치쿠의 멜러물들이나 지금까지 인기장르인 귀신영화인 ‘오바케모노’(お化け物語) 역시 이러한 토양에서 발전하게 되지만 오늘은 닛카쓰의 역습에 대해 언급하는 자리이니 닛카쓰의 이야기만 풀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 통쾌한 역전 드라마는 1954년을 전후로 제작을 재개하며 급기야 쇼치쿠의 영화인들을 흡수하기 시작했으며 이 때문에 급거 새로운 스탭들을 모집할 정도로 완벽한 역전이었다.

때문에 마지막까지 쇼치쿠 사람으로 남은 이는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惠介), 노무라 요시타로(野村芳太郎), 야마다 요지(山田洋次)뿐이었을 정도다. 물론 닛카쓰는 나루세 미키오의 데뷔 회사이기도 했고 저력은 살아 있었다. 무엇보다 파격적인 신인 기용으로 승부를 걸었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색깔을 담은 영화들을 만들어 나갔다. 닛카쓰는 정해진 기간 내에 정해진 편수를 공급할 수만 있다면 그 외 다른 요소는 어떤 부분도 간섭하지 않았다.

지난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스즈키 세이준(鈴木清順)의 회고전이 열렸을 때 닛카쓰의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장르와 스튜디오의 특색마저 구애받지 않는 ‘무국적성’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틀을 부수는 전략, B급 영화라도 참신하다면 반대할 수 없는 그런 영화들을 추구하면서 한정된 조건하에서의 완벽한 자유, 그것은 스즈키 세이준의 감각을 자극하는 최상의 환경을 제공했다고 회고했다.

한마디로 ‘영화제 통행권’이 걸린 좋은 영화라기 보다는 빈약한 시나리오와 터무니없는 제작기간을 극복하기 위해선 남들과는 달라야 하며 장르를 파괴하고 관습을 타파해도 좋다는 자유로운 창작 분위기가 닛카쓰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1960년대 도산 위기가 닥쳐왔을 때도 닛카쓰의 이러한 분위기는 ‘닛카쓰 느와르 시리즈’, ‘닛카쓰 로망포르노’ 등 히트작을 내놓으며 명맥을 이어가는 저력을 발휘하게 된다.

전속 유명감독과 배우들을 모두 내보내도 잡초처럼 살아나는 닛카쓰의 생명력,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스즈키 세이준(鈴木清順),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등이 일본 뉴웨이브 영화를 설계하고 완성하게 된 토양을 제공해 준 것이 바로 ‘닛카쓰’인 것이다. 당시 일본은 민주주의 사회 건설과 경제발전 속에서 전쟁 전 세대와 전쟁 후 세대간 갈등이 심했다. 이들은 술과 재즈, 춤, 할리우드 영화, 서구의 퇴폐문화 등을 탐닉했다. 대학가는 새로운 청년문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기존의 질서나 미풍양속은 구시대의 유물로 여기기 시작했다.

닛카쓰는 이러한 새로운 청년문화를 영화화 함으로써 살아남았다. 그 시작은 1956년 후루카와 다쿠미(古川卓巳)였다. 그는 아쿠다카와(茶川) 문학상 수상자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태양의 계절’(太陽の季節, 1956)과 나카히라 코우(中平康)의 ‘미친 과실’(狂った果實, 1956)을 만들었다. 이 두 영화는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고, ‘태양족(太陽族: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신세대)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이 영화의 히로는 전 도쿄 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의 친동생이자 가수 겸 배우인 이시하라 유지로(石原裕次郎)다. 작가였던 형과 달리 이시하라 유지로는 매우 불량스런 청년이었고 일탈행동을 하던 터라 태양의 계절이나 미친 과실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이시하라 유지로의 등장은 일본 남자 배우의 ‘표준’을 바꿔 놓았다. 종전에는 얼굴이 크고 눈에 띄는 인상이 최우선 조건이었다면 이시하라 유지로는 큰 키와 긴 다리로 승부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롱샷으로 배우의 장점을 살려주었으며 나카하시 야스시(中平康) 같은 신인감독은 세밀하고 생생하게 카메라에 잡아냈다.

이 영화들은 한 마디로 파격 그 자체였다. 일본인들이 눈 뜨기 시작한 개인주의를 완벽하게 구현했을 뿐만 아니라 자아 의식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혼자말, 역시 혼자서 흥얼거리는 노래, 목적 없는 방황, 다양한 인간 캐릭터들의 등장, 액션 배우들의 볼거리 등과 무엇보다도 파격적인 정사신들은 이후 전 세계 뉴웨이브 영화들의 교과서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들의 기존 사회나 국가, 가족에게 버림 받았지만 그들만의 공동체들이 가진 위화감과 고독 같은 의미들을 세심하게 담아냈다.

‘미친 과실’의 경우 형제가 어느 젊은 부인을 두고 싸우고 모터보트에서 대결을 벌이는 등의 장면들은 종전의 일본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파격이었다. 당연히 일본영화의 검열강화와 미풍양속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관객들은 이러한 새로운 영화들에 대해 열광했다. 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필름 누와르(film noire)를 넘어선 일본을 무대로 한 액션영화의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다.

이 때 두각을 드러낸 감독들이 대만영화의 기초를 쌓았던 베테랑 다자카 도모타카(田坂具隆), 가와시마 유조(川島雄三) 같은 감독들이다. 다자카 토모타카는 장르를 넘나드는 태양족 영화를 이시하라 유지로와 작업하면서도 미풍양속에 위배된다는 비평을 피해 나갔다. ‘유모차’(乳母車, 1956) 같은 영화를 만드는데 아버지와 아들 간의 관계 속에 절묘하게 애증의 관계를 콜라보 하여 미풍양속의 위배와 비위배 사이를 넘나든다.

후루카와 다쿠미 감독의 1956년작 ‘미친 과실'

 

가와시마 유조(川島雄三) 감독의 ‘막말 태양전’(幕末太陽傳, 1957년 작)

기와시마 유조는 ‘막말 태양전’(幕末太陽傳, 1957)을 막부시대 말기 여관을 중심으로 영국공사관을 불태우려는 사무라이와 여관에 있으면서 단골손님들을 놓고 경쟁하는 유녀들 그리고 이들을 지켜 보는 거렁뱅이들이 얽히고 설키는 스토리를 서부극 형식으로 풀어나갔다. 이시하라 유지로가 나오는 만큼 ‘지다이게키에서의 태양족’영화라고 마케팅을 했다.

마지막으로 닛캇쓰에는 이시하라 유지로만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시시도 조(宍戸錠), 고바야시 아키라(小林旭), 아카기 게이이치로(赤木圭一郎), 와타리 데쓰야(渡哲也) 같은 액션배우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 모두 이시하라 유지로의 매력적인 자아의식을 기본으로 벤치마킹한 배우들이었다.

이시하라 유지로와 함께 닛카쓰의 ‘3대 천왕’으로 불렸던 고바야시 아키라(왼쪽), 아카기 게이이치로.

이 들 중 이시하라 유지로, 아카기 게이이치로, 고바야시 아키라는 닛카쓰의 ‘3대 천왕’으로 불렸으며 이중 아카기 게이이치로는 '닛카쓰의 제3의 남자'라고 기대를 모았지만 얼마 안가 촬영장 내의 사고로 인해 21세에 요절했다. 시시도 조는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나 ‘에이스 조’(エースのジョー)라는 애칭으로 사랑받으며, 액션 스타로서 닛카쓰의 황금기를 떠받친 대스타였다. 고바야시 아키라는 한때 철새시리즈로 각광을 받았는데 일본 엔까의 여왕(女王)이자 여신(女神)으로 추앙받는 전설의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み空そら ひばり)의 남편이기도 했다.

태양족은 즉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청년문화를 나타낸다. 60년대 젊은 감독들은 수많은 청춘영화를 만들어냈고, 상대적으로 쇼치쿠의 멜로드라마는 낡은 시대의 것으로 여겨졌다. 이들 청춘영화는 청년들의 자유연애, 싱싱한 젊음을 묘사했으며, 영화 속 태양족의 행동은 말 그대로 이유 없는 반항이었다. 그들은 기성사회의 질서에 동조하지 않고 자신의 순수한 욕망을 쫓았다. 기성세대는 그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지만, 젊은 세대는 그들의 반항과 무질서를 동경했다.

그러자 서구에서 '제임스 딘'이 청년문화의 대표주자로서 대스타가 된 것처럼, 두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이시하라 유지로'는 전후 세대 사이에서 대스타가 되었다. 이시하라 유지로는 이전의 스타들과 전혀 다른 종류의 아이콘이었다. 이시하라는 전후 일본인이 눈뜨기 시작한 개인주의의 구현자이자, 그의 목적없는 방황과 혼잣말은 자아의식의 결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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