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노운의 ‘이판사판 산행기’/ 제천 월악산
작가 노운의 ‘이판사판 산행기’/ 제천 월악산
  • 노운 작가
  • 승인 2020.08.02 17: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작가 노운의 ‘이판사판 산행기’ 2회는 충북 제천 월악산 편이다. 지난 7월 초, 충북 제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다시 충주행 버스로 갈아탔다. 목적지는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덕주골에 있는 월악산(月岳山). 버스로는 제천보다 충주에서 접근성이 더 좋다. 충주 중앙경찰학교~수안보~송계계곡을 지나 덕주골에 도착한 건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오후 3시 무렵이었다. 일단 숙소에 짐을 풀고 덕주골 일대를 둘러봤다. 산행은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할 예정. 이곳 지명이 덕주골인 이유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를 기리는 덕주사(德周寺)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오사화에 죽은 제천 현감 ‘바보 권경유’

#1. 물 맑고 산세 좋은 제천에 왔으니 ‘바보 현감’ 권경유(權景裕)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권경유는 사림의 거두 김종직의 제자로 예문관 교리 벼슬을 지낸 이다. 그는 연산군 재위 1년인 1495년, 중앙의 요직을 마다하고 궁벽한 외지인 제천 현감 근무를 자청했다.

그 무렵 경북 청도 사람인 김일손(金馹孫)도 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권경유와 김일손은 김종직을 같은 스승으로 모신 벗이었다. 김일손은 고향길 도중에 제천에 들러 권경유를 만났다. 때마침 권경유는 낡은 객사의 지붕을 새로 갈고 서재로 꾸미면서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자네가 기문을 좀 지어주겠는가”라고 김일손에게 청했다. 김일손은 서재에 ‘치헌’(癡軒)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치헌은 ‘바보의 집’이라는 뜻이다. 김일손은 왜 이런 이름을 지어줬을까. 연유는 이러하다.

월악산 남쪽 기슭의 덕주사. 신라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의 전설이 깃든 사찰이다. 

<그대는 외딴 고을의 현감을 자청하였으니 벼슬살이에서 바보짓이다. 그대는 조용히 앉아서 못된 토호와 간사한 향리를 무찌르며 홀아비와 과부를 어루만지는 데에만 마음을 두고 세금 걷는 데에 서투르니 정사에 어리석다.>(치헌기)

중앙의 벼슬자리를 버린 청빈함과 행정관리에 밝지 않은 벗을 꼬집어 바보(癡)라고 칭한 것이다. 권경유는 서재의 이름 ‘치헌’이 마음에 들었던지 자신의 호로 삼았다. 하지만 둘의 우의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가 발생하면서다. 성종 때 권경유는 김일손과 함께 사관으로 있으면서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의금부 관리의 추국(推鞫)이 시작됐다. 당시의 상황을 『연산군일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경유(권경유)는 ‘비록 만세 후라도 통분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라는 말을 문구에 넣어 달라고 청했다. 추관이 듣지 아니하니, 경유는 붓을 던지고 서명을 거부했다. 급기야 고문을 당했는데, 경유는 눈을 감고 아프다고 외치지 않고 끝까지 굴복하지 아니하니, 왕은 듣고서 ‘경유는 강포한 자다’고 말하였다.>

덕주사에는 남근석으로 보이는 큰 돌이 여럿 있다. 

권경유는 김일손과 함께 능지처참을 당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에는 권경유에 대해 ‘교리로서 외직을 청하여 제천(堤川)으로 나가서 물처럼 맑고 깨끗하게 정사를 하니 백성들은 그를 사랑하였고 이속(吏屬:하급 관리)들은 그를 두려워하였다’고 적고 있다. 짧은 기간의 제천 목민관이었지만, 권경유도 이곳의 명산 월악산을 올랐으리라 짐작된다.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 전설이 깃든 덕주사

# 2.월악산은 이름 그대로 바위가 많고 오르기 힘든 ‘악’(岳)산이다. 설악산, 치악산과 함께 ‘3대 악산’으로 불리는 월악산은 제천, 충주, 단양, 문경에 걸쳐 있다. 제천이 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주봉은 영봉(靈峰: 1097m)으로, ‘영봉에 걸린 달이 아름답다’고 해서 월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라 시대에는 월형산(月兄山)이라 불렸다고 한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건 1984년이다.

높이 13미터의 거대한 화강암에 새겨진 미애불.

신라와 백제가 중원을 놓고 겨루던 시절, 월악산 자락의 고갯마루 하늘재(525m: 문경 관음리와 충주 미륵리를 연결하는 3.5km의 길)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지금은 충북 백두대간 종주길의 중심이다. 전북 무주군 삼도봉(민주지산 인근)에서 시작된 종주길은 추풍령~개머리재~회령재~천왕봉(속리산)~눌재~지름티재~이화령~조령을 지나 하늘재까지 숨가쁘게 달려온다. 한숨 돌린 종주길은 다시 저수령~죽령~비로봉(소백산)~고치령을 거쳐 강원도 영월군까지 이어진다.

월악산 산행은 덕주공주의 전설이 깃든 덕주사 코스가 가장 일반적이다. 덕주골~덕주산성~덕주사~마애불~960m봉~영봉(정상)~동창교를 돌아오는 데 족히 6~7시간은 걸린다. 반대편 동쪽에서 오르는 수산리~보덕암~하봉~중봉~영봉~마애불~덕주사~덕주골 코스는 충주호를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월악산 산행은 덕주사에서 출발하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월악산엔 산양들도 살고 있다. 

아침 6시, 등산로 초입인 덕주골에서 산행의 첫걸음을 뗐다. 덕주골~덕주교~덕주산성~덕주사로 차례차례 이어진다. 계곡을 지나 잠시 올라가자, 덕주사가 기와지붕을 드러낸다. 대웅전 앞마당이 시원하게 사방으로 뚫렸다. 주위의 웅장한 바위 산들이 ‘기기묘묘’하다. 바위 산들이 대웅전을 거느린 것인지, 대웅전이 바위 산들을 거느린 것인지 모를 지경이다. 덕주사는 신라 진평왕 9년인 587년 창건됐다고 하는데, 당시는 월형산 월악사(月岳寺)였다. 이후 신라가 망하고 덕주공주가 마애불을 조성한 후 덕주사로 개칭했다고 전해진다.

대웅전 뜰에 왜 남근석이 서 있을까

#3.덕주공주의 아버지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 왕건에게 들어바쳤다. 그러자 그의 아들 마의태자는 망국의 한을 품고 누이 덕주공주와 함께 금강산으로 떠난다. 지금의 문경에 이르렀을 무렵, 마의태자는 꿈속에서 관세음보살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큰 터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 석불과 마애불을 조성하라”는 말을 듣는다. 마의태자가 석불을 조성하고 절을 세우니 지금의 충주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다. 덕주공주는 미륵대원지와 마주하는 월악산 남쪽 기슭에 마애불을 조성했다고 한다.

월악산은 산 전체가 거대한 바위 덩어리다. 
안개에 묻힌 월악산.

근데, 대웅전 뜰에 이상한 물건이 눈에 띄었다. 어른 키 두 배가 훌쩍 넘는 거대한 비석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새겨진 글자는 없다. 절 여기저기에 서너 개가 보인다. 알고보니 남근석이란다. 월악산은 음기가 강한 곳인데, 그런 음기를 누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수양도량 사찰에 남근석이라니, 조금은 얄궂다.

덕주사에서 30분 정도 올라가니 또 다른 절이 보인다. 거대한 화강암에 새겨진 마애불(보물 제406호)이 떡 버티고 있다. 향토 자료에 따르면, 덕주사는 예전에 상덕주사와 하덕주사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한다. 대웅전과 남근석이 있는 곳이 하덕주사, 마애불이 자리한 극락보전이 있는 절이 상덕주사라는 것. 마애불의 정식 이름은 마애여래입상. 높이 13미터 바위 절벽에 부처가 새겨져 있다. 얼굴은 뭉퉁한 형상이다. 경주 남산에서 봤던 전통적인 신라 불상의 모습과는 좀 달라 보였다. 덕주공주가 마의태자를 위해 조성했다는 전설이 있지만, 실제는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정상 영봉 가는 길은 가파른 계단으로 숨이 턱턱 막힌다. 

1094m 영봉에서 목도한 ‘안개 자욱한 수묵화’

#4. 마애불에서 1시간 정도 더 올라가니 960봉이다. 주봉인 영봉보다 960봉 전망대에서 월악산 전체 모습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다. 여기서 송계리 갈림길을 지나 주봉인 영봉까지는 ‘마의 오르막’ 코스가 기다리고 있다. 필자는 산행에 스틱을 사용하지 않는다. 호흡이 가빠지고 숨이 턱턱 막힐 땐 쥔 주먹조차 힘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를 통해 산행의 ‘마음가짐’ 하나를 배워보자. 잘 아시다시피, 그는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정복한 최초의 산악인이다. 그는 최근 번역 출간된 『에베레스트 솔로』(리리 퍼블리셔 출판)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산에서 주먹을 쥐면 에너지를 더 쓰기 때문에 손을 펼쳐야 한다. 일체의 잡념을 놓아버리고 평온한 마음을 갖는 동시에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행동해야 한다.”

월악산 영봉의 전경.

잠시 불교 용어를 빌려본다. ‘간화선’(看話禪)이라는 말이 있다. 화두(話)를 주시하면서(看) 번뇌와 잡념을 제거하여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이다. 산행도 일종의 수행이다. ‘일체의 잡념을 놓아버리고 평온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메스너의 말은 간화선과도 닮았다. “그래, 주먹 쥔 손을 펴고 편안하게 산행해 보자”. 하지만 전설적인 산악인의 간화선이 아마추어 산행자에게 먹혀들리 없다. 그렇게 허걱허걱 정상 영봉에 도달했다.

사방은 온통 안개 천지. 월악산은 좀처럼 얼굴 전체를 보여주지 않았다. 산은 깊은 호흡으로 흩뿌려진 안개를 잠시 빨아들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토해내곤 했다. 인간은 안개에 묻힌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건너편 능선에 걸렸던 안개가 조금 ‘휘발’되어 날아갔다. 산에 박힌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풍경은 마치 수묵화 같다. 안개는 화선지요, 거대한 바위와 소나무들은 그 화선지 위에 스며들고 있었다.

1097미터 월악산 영봉 정상 표석.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다. 식사도 할 겸 30분을 기다렸지만 헛수고. 당초 하산길은 충주호를 조망하기 위해 영봉~중봉~하봉~보덕암~수산리 코스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근데, 안개가 걷히지 않으니 충주호는 ‘도로아미타불’. 어쩔 수 없이 다시 덕주골로 하산길을 잡았다. 아쉽지만, 시원한 소백산 막걸리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한층 가뿐하다. 시간은 벌써 오후 2시를 지나고 있었다.

하루 묵은 숙소에 딸린 한 식당. 막걸리 한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문득 “경순왕의 무덤은 경주에서 못본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휙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검색을 해보았다. “엥? 경주가 아니고 이곳에?” 보름 후, 덕주공주의 아버지 경순왕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경순왕릉 가는 길
들어가는 양쪽엔 '지뢰' 푯말이 붙어 있다. 

경순왕 무덤은 왜 경주가 아닌 연천에 있을까

#5. “어르신은 함자(銜字)가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경순왕의 후손이고, ‘일’자 ‘규’자를 씁니다.”

신라의 56대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 왕릉 초입에서 나눈 대화다. 우연히 김일규 옹이라는 분을 만났다. 서울에 사는데 가족들과 왕릉을 찾아왔다고 했다. “나도 여기에 경순왕릉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경순왕의 무덤은 천년고도 경주가 아닌 임진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있었다.

경순왕의 왕릉은 왜 경주가 아닌 연천에 터를 잡고 있을까. 경순왕은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고 귀부해 고려 수도 개경에서 살다가 경종 37년(978년)에 죽었다. 경순왕릉 유적지의 설명에 따르면, 당초 옛 신라 수도인 경주에 묘지를 만들려고 했단다. 운구 행렬이 경주로 가기 위해 임진강 고랑포에 이르렀을 때 고려 왕실에서 “왕릉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라는 이유로 막았다. 옛 신라인들의 민심 동요를 염려했다는 것이다. 결국 고랑포에 경순왕릉이 조성됐다. 묘소는 임진왜란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잊혀졌다. 그러다 조선 영조 23년(1247년)에 다시 찾게 되었고, 조선시대의 묘소 형식으로 정비됐다고 한다.

경순왕의 왕릉은 규모가 조촐하다. 비각만이 능을 지키고 있다. 

왕릉이 있는 주차장 입구에는 ‘신라경순왕릉’이라고 적힌 큰 돌표지판이 서 있다. 왕릉이 있는 곳까지는 150여미터 숲길을 걸어 들어간다. DMZ 남방한계선이 바로 코앞이다. 숲길 양쪽 철조망에 ‘지뢰’라고 적힌 표지판이 가슴을 섬뜩하게 만든다. 남의 땅(고려 왕건의 지배지)에서 숨을 거둔 경순왕은 외롭게 누워 있었다. 무덤은 임진강변 언덕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경주를 바라보는 듯하다. 신라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곳에 있다.

주위엔 큰 조형물도 따로 없다. 

경주에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방문했을 터. 경주의 왕릉들과 비교하면 크기도 초라할 뿐이다. 웅장함도 찾아볼 수 없다. 조선의 어느 돈푼깨나 있는 양반묘라 해도 믿을 정도. 경순왕릉에서 1km쯤 떨어진 곳에 경순왕의 아들이자 우리가 마의태자로 알고 있는 김일(金鎰)의 연단이 있다. 제천 월악산과 연천 고랑포리엔 비운의 한 가족사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글, 사진=노운 작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