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미국 리포트/ 고단했던 ‘조선판 디아스포라’
생생 미국 리포트/ 고단했던 ‘조선판 디아스포라’
  • 이훈구 작가
  • 승인 2020.08.15 12: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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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하와이 한인학교

재미없는 천국과 재미있는 지옥?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하늘로 올라갔는데 아무리 봐도 애매하게 살다가 죽었다. 천국으로 보낼지, 지옥으로 보낼지 애매했던 것이다. 결국 그에게 기회를 주기로 한다. 2주에 걸쳐 일주일은 천국을, 다른 일주일은 지옥을 경험한 후 그가 사후의 삶을 결정하도록 했다. 

먼저 천국에 갔다. 듣던 대로 지상낙원이었다. 그런데 왠지 심심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낸 후 다시 지옥으로 갔다. 입구부터 비키니를 입은 미녀들이 반겼다. 화끈하게 즐기다 돌아왔다. 그는 당연히 지옥을 선택했다. 그런데 지옥으로 간 그를 기다리는 건 채찍과 불구덩이었다. 사정없이 채찍에 맞고 이내 불구덩이에 던져졌다. 그는 하소연했다. “지난번에는 그토록 환대하더니 나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그러자 사탄이 말한다. “지난번에는 (지옥에) 관광비자로 왔지만 이번에는 영주권을 받고 왔잖아.” 

1902년 하와이 설탕업자 조선 찾아
어느 나라든 이민 역사는 고달프다. 특히 한국인의 경우는 더 서러웠다. 대부분의 이민 정착자들은 기회의 땅 미국에 이민했지만 한국과 미국을 비교할 때 ‘재미없는 천국’과 ‘재미있는 지옥’이라는 표현을 쓴다.

최초의 미국 이민은 1902년 하와이 설탕재배자협회(Hawaiian Sugar Planter’s Association)의 찰스 비숍(Charles R. Bishop) 회장이 노무자를 모집하기 위해 내한하면서 시작되었다. 청일전쟁(1894~1895)에서 이긴 일본이 본격적으로 조선의 숨통을 조여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개항의 여파로 조선인들에게는 외부 세계가 청나라와 일본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났고 미국을 비롯한 선교사들의 서양문물과 그들이 전하는 소식은 놀랍기만 했다. 

1903년과 1905년 사이에 약 7천 명의 한국인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미국 달러로 임금을 지불한다는 점, 조선과 달리 신분제가 없다는 점은 미국 이민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아울러 “하와이는 기후가 온화해 극심한 더위와 추위가 없고,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1년 내내 어떤 절기든지 직업을 얻기가 용이하다”는 이민 안내문은 모험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미주한인들

심지어 “하와이는 나무에도 돈이 열린다”는 풍문과 함께 당시 개신교인들을 중심으로 ‘개신교 국가’인 미국으로의 이민이 이뤄졌다. 일본의 경우, 개항 이후에도 ‘기리스탄’(Christian)들이 한동안 박해를 받았다. 조선 역시 다르지 않았다. 유교를 숭상하는 환경에서 서양종교인 기독교는 기존의 조상숭배와 신분제를 근간부터 뒤흔드는 일이었기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했다.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은 이유 역시 왕족으로서 최초의 개신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에는 개신교인들을 적대시했지만, 한성감옥에서 ‘회심’하여 개신교로 개종했다.

조선 패망으로 이민 발걸음 더 늘어나
조선이 패망하기 직전부터 많은 조선인 ‘디아스포라’(Diaspora)가 생겨났다. 중국 간도, 러시아 연해주, 일본 그리고 멀리 미국과 멕시코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이주를 결정했다. 그런데 미주지역(미국, 캐나다, 멕시코, 쿠바 등)의 이민은 좀 특이한 경우였다. 이미 미국 대륙에는 수많은 중국인들이 동서간 철도 부설에 동원되어 이민해 있었고, 일본인들 역시 태평양 연안 국가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먼저 발을 들여놓았다. 

특이한 것은 캐나다의 경우, 중국인들의 이민에 대하여 ‘인두세(Head Tax)’를 부과했다는 점이며 이후의 동양인 이민의 경우 중국인들의 전례에 따라 그 규정이 정해졌다는 점이다. 이후 나라가 망하면서 공식적인 국적이 ‘일본’(Japan)으로 변경되는 수모를 겪으면서 한인들의 이민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24년 북미지역에 ‘동양인 배척법’이 만들어졌다. 무질서하고 교육을 못받은 중국인들과 달리 일본인들은 잠재적 위협(이른바 나쁜 성향, Bad Character)이 된다고 간주되면서 이민자로 살 권리는 인정 받았지만 권리행사는 철저하게 제한되었다. 

한때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입국시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했다는 것 때문에 논쟁이 일어났으나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 여권을 가지고 일본인으로 취급받으면서 인종차별이 서슬 퍼렇게 살아 있는 미국에 입국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입국 거절이 되던 시기였기에 더욱 그렇다. 아무리 조선인이라고 할지라도 미국에 입국하면서 ‘나 조선인이오!’라고 주장했다면 이슈는 되었겠지만 즉시 입국이 거절되어 추방당했을 것이다.

영화 ‘브루클린’(Brooklyn)

영화 ‘브루클린’(Brooklyn)이 주는 교훈
존 크로울리(John Crowley) 감독의 영화 ‘브루클린’(Brooklyn, 2016)은 당시 인종차별이 결코 아시아계에만 해당되었던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는 주로 아일랜드계 이민자와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낯선 기회의 땅 미국의 뉴욕 브루클린에서 새로운 삶을 도전하는 에일리스(시얼샤 로넌)의 이야기가 텍스트고 이탈리아계 청년 토니(에모리 코헨)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서브 텍스트에 해당 되는데 미국 입국이 얼마나 까다로웠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들이 등장한다. 

물론 에일리스는 결국 세련된 뉴요커로 변신하면서 다른 이민자에게 비자를 받는 요령을 알려줄 정도로 발전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21세기 오늘날 미국의 입국장과 결코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고 한국인들의 경우 스스로 ‘노 비자(no visa, 비자 면제 협정)’를 악이용해 다른 선의의 이민자들 입국을 원천적으로 막아 버린 격이 되었다. 이것은 ‘인종차별’과는 결이 다르다. 아마도 한국인들은 중국(홍콩과 대만이 아닌)인들과 함께 스스로 낮춘 이민장벽을 다시 스스로 높인 ‘유일한’ 국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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