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노운의 ‘이판사판 산행기’/ 남해 금산
작가 노운의 ‘이판사판 산행기’/ 남해 금산
  • 노운 작가
  • 승인 2020.08.23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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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군 상주면에 있는 금산. 오른쪽은 금산산장이다. 

경남 남해(남해군 상주면)의 금산(錦山)은 이성계가 100일 기도를 올려 조선을 개국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삼남(三南) 제일의 명산이다. 그런 이유로 금산의 기도 도량 보리암(菩提庵)은 전국에서 ‘기도발’이 가장 잘 받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염불보다 잿밥이라고 했던가. 금산 산행이 그랬다. 기암괴석을 즐기는 눈요기보다 보리암에서 기운을 받는 일에 관심이 더 갔다. 보리암은 여수 향일암, 낙산사 홍련암,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4대 해수관음성지로 통한다. 신라 고승 원효가 창건했다는 보리암을 품은 금산을 8월 중순 올랐다. 

금산 정상 표지석에 해발 높이 표시가 없는 이유
#. “어라, 정상 표지석에 해발 높이가 안 적혀 있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8월의 주말, 경남 남해 금산(錦山) 정상에 도착했을 때다. 정상 표지석엔 ‘명승 제39호 남해금산’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대부분의 산 정상 표지석엔 해발 높이가 적혀 있다. 헌데, 금산 정상 표지석엔 그게 없었다. 

표지석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금산’이라는 글자 밑에 지워진 흔적이 보였다. 해발 높이를 새긴 글자를 긁어낸 자국이다. 당초 1987년, 남해산악회가 표지석에 금산의 높이를 해발 681m라고 적어 놓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발 높이를 두고 논란이 일면서 그 681m를 지워버린 것이다. 

남해금산의 정상 표지석. 해발 높이 글자가 지워져 있다. 

그동안 금산의 해발 높이는 681m, 701m, 705m로 들쭉날쭉했다. 남해군청, 관련 기관의 표시가 제각각이었던 것. 최근엔 국토지리정보원이 측정한 705m가 대세로 굳어지고 있다고 한다.  국토지리정보원은 모든 측량 기준이 되는 국가기준점인 ‘삼각점’을 설치하여 공공 및 민간 분야가 이용하도록 하고 있다. 등산을 다니다 보면 땅에 열십자(+) 모양의 작은 콘크리트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삼각점은 전국에 1만6000여 개가 설치되어 있는데 지도제작, 지적측량 등에 기준점으로 사용하고 있다. 

금산의 원래 이름은 보광산(普光山). 683년(신문왕 3년) 신라 고승 원효가 이곳에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하고, 절 이름도 보광사(普光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산 이름이 금산으로 바뀐 건 이성계 때문이다. 이성계가 조선 개국을 앞두고 여기서 백일기도를 올리면서 “내 소원이 이뤄지면 그 보답으로 산 하나를 온통 비단으로 덮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용케도 이성계의 소원(조선 개국)이 이뤄졌다. 헌데, 산 전체를 비단으로 두르는 일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이성계는 대신 ‘비단으로 두른 산’이라는 의미의 금산(錦山)을 이름으로 내렸다고 한다. 보광사 이름은 조선 현종 때 현재의 보리암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금산에서 내려다본 남해바다의 전경.
금산산장에선 다들 컵라면을 먹곤한다. 

원효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 80여 곳
#. 잠시 사찰 창건자인 원효 이야기를 좀 해보자. 『삼국유사』를 쓴 고려 승려 일연(1206~1289)은 『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 편에서 원효의 삶을 일컬어 ‘무호만가풍’(舞壺萬街風)이라고 적었다. ‘춤추는 호리병이 일만 거리에 바람처럼 걸어다녔다’는 것이다. 파계를 경험한 원효는 산사를 벗어나 허리춤에 호리병을 차고 저잣거리를 누비며 백성과 대중을 교화했다. 원효와 일연은 고향이 경북 경산으로, 서로 동향(同鄕)이다. 

그런 원효는 호리병 박을 ‘무애’(無碍)라 이름 짓고, ‘무애가’(無碍歌)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무애는 불교 『화엄경』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一道出生死)에 나오는 말이다. ‘모든 것에 거리낌 없는 사람이어야 생사(또는 번뇌)의 자유로움에 이른다’는 뜻이다. ‘첫새벽’이라는 뜻을 지닌 원효(元曉)는 70세 되던 해 음력 3월 혈사(穴寺: 경주시 골굴사)에서 입적했다고 알려진다. 

원효가 국가적 차원에서 재평가된 건 입적한 지 415년이 지난 고려조에서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자신의 형인 고려 숙종에게 건의해 시호 추증을 건의했다. 의천이 죽은 1101년 그해, 숙종은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마침내 ‘나라의 큰 스님’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고려 명종 때는 원효가 머물렀던 경주 분황사에 화쟁국사지가 세워졌는데, 이를 바탕으로 분황사를 근거로 하는 해동종(海東宗 또는 분황종)이라는 종파가 생겨났다. 원효가 해동종의 교조(敎祖)인 셈이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따르면, 원효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은 80여 곳에 이른다.  

보리암의 일주문 격인 쌍홍문(오른쪽)
금산의 기암괴석들.

“그 어느 곳보다 관세음보살님 가피를 잘 받는 곳”
#. 금산 산행 코스는 쌍홍문을 지나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탐방지원센터~쌍홍문~제석봉~화엄봉~보리암~금산산장~정상(망루대)~상사바위~쌍홍문~탐방지원센터. 총 6km 거리로 여유있게 걸으면 4시간 정도 걸린다. 부소암을 지나 보리암으로 가는 코스도 있다. 일반 참배객들은 다른 길을 택한다. 금산제2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20여 분 걸어서 보리암으로 올라간다. 길 양쪽으로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꽤나 시원하다.  

쌍홍문(雙虹門)은 보리암의 일주문 격이다. ‘두 굴이 마치 쌍무지개 같다’고 해서 원효가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두 굴이 마치 해골의 눈처럼 보인다.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문은 여수 향일암의 석문을 연상케 한다. 쌍홍문을 지나면 제석봉(帝釋峰)을 만난다. 부처를 모시며 불법(佛法)을 지키는 제석천(帝釋天)이 내려와 놀다 갔다는 전설이 있다. 화엄봉은 원효가 화엄경을 읽었다거나, 한자 빛날 화(華)를 닮아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남해금산의 기도도량 보리암.
해수관세음보살상은 보리암에서 기(氣(가 가장 센 곳이라고 한다. 
해수관세음보살상 앞엔 늘 참배객들이 줄을 선다

“이곳에서 기도발원을 하게 되면 그 어느 곳보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잘 받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금산 산행의 하이라이트인 보리암 안내판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가피(加被)는 부처나 보살들이 자비를 베풀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힘을 말한다. 한마디로 ‘기도를 들어주는 힘’이다. 종무소에서 바라본 보리암은 깎아지른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남해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보리암 뒤편으론 대장봉, 형리암, 화엄봉, 일월봉, 삼불암 등 기암괴석들이 즐비하다. 이처럼 기기묘묘한 바위산은 보지 못했다. 보리암은 본전인 보광전과 극락전, 법회 장소인 예성당으로 이뤄져 있다. 

이성계가 100일 기도를 한 선은전.

이성계가 100일 기도하고 조선 개국한 ‘선은전’
#. 보리암에서 기(氣)가 제일 세다는 곳. 보광전 조금 아래 쪽에 그 유명하다는 해수관세음보살상이 있다. 양쪽엔 더위를 피해 참배객들이 기도를 올리도록 천막이 쳐져 있다. 이날도 참배객들의 기도 행렬이 쉼없이 이어졌다. 필자도 잠시 합장하고 눈을 감았다. 

연꽃 좌대 위에 조각된 관세음보살의 얼굴은 온화하고 편안하다.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잡고, 왼손에는 중생의 고통을 없애준다는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정병은 관세음보살의 상징물이다. 관음상 앞 3층 석탑에도 전설이 담겨 있다. 옛날 가야시대,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돌로 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전설만으로도 보리암은 가히 흥미롭고, 또 흥미롭다.

비각 왼쪽에 ‘남해금산영응기적비’(南海錦山靈應紀蹟碑)가 있다. 

보리암에서 필자의 마음을 가장 끈 건 이성계가 100일 기도를 했다는 곳이다. 보광전에서 20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가보기로 했다. 가파른 계단을 한참 내려갔다. 헉헉 거리며 한참을 더 걸었다. 멀리 벼랑 끝에 누각이 보였다. 계단을 올라가 보니 선은전(璿恩殿)이라는 작은 누각이 나타났다. ‘구슬옥처럼 은혜가 빛나는 전각’이라는 의미쯤 된다. 

이성계가 기도한 ‘명당 중의 명당’이 여기란 말인가. 선은전 왼쪽 비각 안에 비석 하나가 있다. 1903년(광무 7년) 고종의 명을 받아 의정부 찬정(贊政) 윤정구(尹定求)가 비문을 지은 ‘남해금산영응기적비’(南海錦山靈應紀蹟碑)이다. ‘남해금산의 신령(神靈)이 부응한 비석’이라는 것이다. 선은전 오른쪽엔 ‘대한중흥송덕축성비’(大韓中興頌德祝聖碑)가 함께 세워져 있다. 

선은전은 1998년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왜구 토벌을 위해 남해 어느 땅을 누볐을 이성계. 그가 이곳의 기운을 받아 조선을 개국했지만 왕자들의 난까지 막기엔 효험이 부족했나 보다. 멀리 보이는 남해 바다만이 이성계의 100일 기도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듯하다.

가천마을의 다랭이 논.

아이쿠~보리암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네. 금산 풍광에 취하다보니 계단식 논을 까먹었다. 설흘산 산자락 아래 펼쳐진 다랭이 논을 보기 위해 서둘러 가천마을로 향했다. <글, 사진=작가 노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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